[문학이 태어나는 자리]⑬
광기-광인의 시선 빌려 세상의 허위·모순 날카롭게 드러내다
기차역으로부터 200㎞나 떨어진 한적한 시골마을에 병원이 있다. 이 병원의 6호실은 정신병자 다섯 명이 갇혀있는 특수 병동이다. 6호실의 수위 니키타는 세상에서 무엇보다도 질서를 사랑하는 인물이다. 그는 질서를 지키기 위해서는 때려야 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 그는 언제나 하느님을 들먹이며 환자를 착취하고 구타한다. 6호실에는 지식이 해박하고 신경이 예민한 이반 드미트리치가 갇혀 있다. 병원장은 지독한 독서광으로 철학을 사랑하는 허무주의자 안드레이 예피무이치이다.
안드레이는 6호실의 환자들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어느 날부터인가 그는 매일 6호실을 찾아 이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반은 주장한다. 의사들이 미치광이와 정상적인 사람을 구별하지 못해, 불행한 몇몇 사람들만이 속죄양으로 병실에 들어와 있다고. 안드레이는 대답한다. 감옥이나 정신병원이 존재하는 이상 누군가는 그 안에 들어가 있어야 한다고. 두 사람은 정상인과 미치광이 사이에는 근원적인 구분이 없으며, 불합리한 제도와 불온한 의도가 억지로 두 부류 사이를 가르는 것이라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안드레이는 20년 만에 처음으로 총명한 대화 상대자를 찾은 것이 기뻤다. 의사와 정신병자는 대화하고 교감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차츰 안드레이를 이상한 눈으로 보기 시작했다. 안드레이는 강직함 때문에 고을 유력 인사들에게서 미움까지 사 곧 병원장 자리를 잃었다. 새로 부임한 의사는 안드레이를 정중하게 초대하여 6호실에 가두었다. 안드레이는 처사의 부당함을 주장하며 강력하게 항의했지만, 돌아온 것은 니키타의 무자비한 폭력뿐이었다. 물빛 같은 달빛이 쇠창살을 뚫고 들어와 방바닥 위에 그물 같은 그림자를 만들었다. 안드레이는 공포를 느끼며 생각했다.
이 사람들이 몇 년 동안을 매일같이 이와 똑같은 아픔을 맛보지 않으면 안됐다는 무섭고 참을 수 없는 생각이 똑똑히 떠올랐다. 2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자기가 그걸 몰랐을 뿐 아니라 알려고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그는 몰랐다. 고통에 대한 관념조차 없었다.
- 체홉, ‘6호실’(1892) | 동완 옮김
안드레이는 격한 분노에 사로잡혔지만 침대 위에 쓰러져 이튿날 죽고 만다. 이 이야기는 정상인 사람이 미치광이로 취급되어 정신병동에 갇히게 되는 경로와 함께, 정상/비정상의 구분에 작용하는 계략과 폭력을 섬뜩하리만치 생생하게 보여준다. 자기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안드레이를 정신병자로 몰아가는 지식인들은 ‘앎’의 비도덕성을, 어제의 상관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니키타는 부도덕한 ‘앎’이 야기하는 잔혹한 폭력을 상징한다. 젊은 시절 레닌은 이 글을 읽다가, 자기가 6호실에 갇힌 듯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문 밖으로 뛰쳐나갔다고 한다.
<일러스트 | 김상민기자> |
중행(中行)의 선비를 얻어 더불어 하지 못하면, 반드시 광견과 함께할 것이다. 광자(狂者)는 진취적이며 견자는 근실하다. - ‘논어’
공자의 말이다. 동아시아 사회에서 ‘광(狂)’은 ‘뜻이 너무 높고 커 행동이 받쳐주지 못함’을 뜻하는 말이었다. 이러한 부류의 사람들은 자기의 뜻을 좇아 세상과 화합하지 못한다. 세상의 허위와 모순을 용납할 수 없고 더더욱 그 논리에 용납될 수 없을 때, 지적·도덕적 우월성과 현실적·사회적 미약함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광사(狂士)가 탄생했다. 공자 뒤로 수많은 사람들이 광사(狂士) 또는 광객(狂客)을 자처했다. 광사나 광객을 자처함은 거대하고 완강한 세계에 맞서 자존심을 지키는 방식이었다. 그 팽팽한 대결 가운데서 언제나 시대의 고민을 담은 문학이 태어났다.
광사의 사유와 행동은 인습을 타파하고 부조리를 파헤치는 파괴적인 힘으로 작용했다. 홍우교(洪禹敎)는 18세기의 광사(狂士)였다. 술을 잘 마셨는데, 술 마신 뒤에는 반드시 통곡하며 ‘조여식(趙汝式), 조여식’ 하고 크게 부르짖었다. 여식은 중봉(重峯) 조헌(趙憲)의 자이다. 밥을 많이 먹어 배가 불룩한 사람을 보면 혀를 차며 말했다. “선비가 밥을 많이 먹으면 그 집은 반드시 망하니, 그들은 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신분이 높은 사람을 만나면 일면식이 없어도 반드시 ‘너’라고 호칭하며 이름을 불렀다.
이덕무(1741~1793)가 지은 홍우교 이야기다. 홍우교의 행동은 격식을 파괴한다. 통곡하며 조헌을 찾은 것은 세상에 그만한 인물이 없음에 절망한 때문이고, 배 나온 선비를 보며 혀를 찬 것은 그들의 무위도식을 조롱한 것이다. 고관대작의 이름을 막 부름은 그들의 무능을 욕보인 것이다. 통념을 따르지 않고 지배층의 거짓을 까발려 놓는 행동을 사람들은 ‘광(狂)’이라 했고, 이덕무는 자칫 사라질 그의 이야기를 조촐하게나마 엮어놓았다. 당대에 뜻을 이루지 못했지만, 뒷사람들의 귀에 쟁쟁하게 들려오는 건 바로 그들의 목소리이다.
니체는 자라투스트라의 입을 빌려, 낙타에서 사자를 거쳐 아이가 되는 정신의 세 단계 변화를 말한 적이 있다. 자부심을 억누르기 위해 머리를 숙이는 것은 무거운 짐을 기꺼이 지는 낙타의 단계이다. 그런데 낙타는 사막에 이르면 사자가 된다. 사막에서는 무시무시한 용이 나타나 당위에 따를 것을 강요한다. 이에 정신은 사자가 되어 “나는 원한다”고 말하며 용에 맞선다. 새로운 가치에 대한 권리를 획득하는 건 억세고 경건한 정신의 무서운 약탈이다. 자유를 약탈하기 위해서는 가장 신성한 것 속에서 광란과 방종을 찾아내야만 한다. 창조하기 위해 부정하고 파괴하는 것이 바로 사자의 단계이다. ‘광(狂)’은 그런 정신이다.
광사(狂士)들이란 묵은 규범을 부정하고 새로운 자유를 찾으려 했던 역사의 사자들인 셈이다. 하지만 광사와 미치광이 사이에는 명확한 경계가 없다. 작은 시내에 고래를 가져다 놓으면 몸부림치다가 죽는 것처럼, 편협한 사회에 놓인 호걸의 처지도 마찬가지이다. 용납되지 못하고 소통이 차단되어 있는 식견과 경륜은 썩다 못해 기이한 형태로 굴절되어 표출될 수밖에 없다. 일반적인 기준에서 그건 광증(狂症)의 징표가 되어 세인들의 비난을 받는다. 말이나 그럴듯하게 하고 낯빛이나 꾸미는 속유(俗儒)들은 언제나 광사(狂士)와 광인을 구분하지 못하여 끝내 호걸 현사들의 삶을 누추하게 만든다고, 조성기(趙聖期, 1637~1689)는 분통을 터뜨렸다. 조성기의 울분은 안드레이의 그것과 본질상 다르지 않고, 아래 시에 보이는 임제(林悌, 1549~1587)의 심정과도 통한다.
말을 하면 세인들 미쳤다고 하고 出言世謂狂
입 다물면 세인들 바보라 하네 緘口世云癡
나의 눈으로는 나를 볼 수가 없고, 물고기는 물을 보지 못한다. 나는 남의 시선을 빌려야 나를 볼 수 있고, 물고기는 물을 떠나야 물을 볼 수 있다. 오만한 이성과 신념으로 가득찬 세상의 허위는, 그 이성과 신념의 건너편에서만 볼 수 있는 법이다. 안드레이가 6호실 안에서 보았을 때 그 밖은 모두 비정상이다. 홍우교의 관점에서 세상에 제대로 된 선비는 하나도 없었다. 임제는 당시 미치광이 아니면 바보로 몰렸지만 오늘 우리는 임제의 눈으로 그 시대를 본다. 돈키호테는 편력기사를 꿈꾸는 과대망상증 환자인가, 아니면 온 몸으로 시대의 모순을 통렬하게 보여주는 광사인가?
3·1 운동 이후 극도의 무력감과 우울증에 사로잡혀 있던 청년은 평양 남포에서 만난 광인 김창억을 통해 자유와 해탈을 강하게 느꼈다. (염상섭, ‘표본실의 청개구리’(1921)) 이를 비웃는 동료들은 알지 못한다. 식민지에서 누리는 권리와 자유와 인식은 모두 가짜라는 사실을. 현실에서 질식하며 광인과 교감하는 그가 정상인가, 빼앗긴 들에서 술 취해 겨우 광인이나 조롱하는 그의 친구들이 정상인가?
루쉰(1881~1936)은 ‘광인일기(狂人日記)’(1918)에서 광인의 시선으로 역사의 허위를 일거에 드러냈다. 나는 친구를 통해 광인의 며칠 일기를 엿본다. 일기의 주인공은 역사책에서 ‘인의도덕(仁義道德)’과 ‘식인(食人)’이라는 글자만을 조합하여, 사람들이 자신을 잡아먹을 것이라는 강박증에 사로잡힌다. 이는 지난 중국의 4000년이 인의도덕(仁義道德)의 이름으로 자행해온 잔혹한 식인(食人)의 역사임을 말하고 있다. 세상에 강도가 죽인 사람이 많은가, 아니면 인의도덕이 죽인 사람이 많은가?
문학은 광인(狂人)의 시선으로 세상을 통찰하는 노력을 멈추지 않아왔다. 어떤 이는 스스로 미쳐 격렬하게 세상과 맞서며 천지에 가득한 통곡을 터뜨렸다. 아니면 세상과 무모하게 대결하는 광사(狂士)에 공명했고, 사람들의 조롱 속에 광인(狂人)의 말을 경청했으며, 광자의 시선을 빌려 세상의 허위를 날카롭게 드러내기도 했다. 광인의 번뜩이는 눈빛과 몇 마디 중얼거림으로 세상의 명료한 질서는 일순 허위와 가식의 혼돈으로 바뀐다. 그러니 기지(旣知)의 명료함은 문학의 천적인 것이다.
뜻이 높고 커서 부조리한 세상을 용납하지 못한다.
식견과 경륜은 소통되지 못하고 썩다 못해 기이한 형태로 표출된다.
스스로 미쳐 격렬하게 세상과 맞서며 통곡을 터뜨린다.
그 팽팽한 대결 가운데시대의 고민을 담은 문학이 태어나고 …
이승수 | 경희대 연구교수
경향신문,2008.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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