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이 태어나는 자리](23)
신념-깨어있는 양심 혼탁한 세상 속 갈 길을 밝히다
사마천은 말했다. 사람은 한 번 죽게 마련인데, 어떤 것은 태산보다도 무겁고 어떤 것은 기러기 털보다도 가벼우니, 이는 삶의 지향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마찬가지로 사람은 누구나 똑같은 언어를 사용하지만, 어떤 말에는 태산의 무게가 담겨 있고, 어떤 말은 오리털처럼 가볍다. 그 차이는 일생의 처신에서 비롯하는 것이니, 말의 무게를 결정하는 것은 솜씨가 아닌 행동이다. 태산의 무게가 담긴 말들은 개인의 삶을 넘어 역사의 이정표가 된다.
10여년 전 김수영 전집의 여백에 이런 등속의 메모를 해놓았다. “자기 영혼을 잠재우지 못했던 사람. 늘 깨어있었기에 고문의 의자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사람.” 작년에는 나머지 여백에 다시 이런 메모를 했다. “삶도 시도 까칠했다. 하지만 그는 아직도 시정신의 주유소이다. 약고 원만한, 자기 몫 이상을 다 먹고 가는, 그래서 옆 사람은 물론 뒷사람에게 아무 것도 남기지 못하는, 똑똑한 타협주의자를 생각한다.” 자기 몫을 다 챙겨먹고 남의 몫까지 착복한 뒤 떠나는 사람들만 있다면, 이 세상은 참 견디기가 어려울 것이다.
김수영은 자기 영혼에게 시는 용감하고 자유롭고 불온해야 한다고 끊임없이 속삭였던 사람이다. 그의 많은 시는 시인의 다짐이거나 시의 책무이다. 젊은 시인에게는 “눈 위에 대고 (마음 놓고) 기침을 하자”며 “가래라도 마음껏 뱉자”(‘눈’)고 했다. 눈은 죽음을 잊은 종이이고 세상이고 순결한 양심이다. 활자(活字)는 간간이 자유를 말하는데, “나의 영(靈)은 죽어있는 것이 아니냐”(‘死靈’)며 자학했다. 그가 가장 두려워한 것은 나이가 들어 삶도 시도 동그랗게 되어가는 것이었다. “정말 무서운 나이와 시(詩)는 / 동그랗게 되어가는 나이와 시”(‘詩’) 그에게 있어 동그란 것은 시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니 그의 삶이나 시는 모두 원숙해질 수 없었다.
김수영을 보면 김시습이 떠오른다. 이 이상한 연상 작용의 근거는 아마도 ‘원숙하지 못함’일 것이다. 이 ‘원숙하지 못함’은 의도된 것이고, 또 끝까지 견지되었으며, 시정신의 동력이 되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닌다. “남아가 관 뚜껑 덮지 않았다면 / 일이 벌써 끝났다 말하지 마라 / 마음을 세움에는 조급해 말고 / 언제나 처음인 듯 끝을 삼가라”(男兒未蓋棺, 莫道事已已. 立心勿草草, 愼終常如始)는 세상과 끝까지 맞서기 위해 마음을 벼리는 시인의 다짐이 아닌가!
두 사람은 모두 똑똑한 타협주의자가 아니었으며, 시대와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했다. 이들은 의식이 깨어있는지 수시로 확인했으며, 신념이 실천되고 있는지를 예고 없이 점검했다. 양심에서 점화된 감시의 불빛 때문에 이들의 정신은 평생 안식하지 못했다. 어리석은 삶이었다. 하지만 태생적인 유전자인 그 잘난 ‘자의식’ 때문에 번민할 때, 김시습과 김수영의 글을 만나면 상처가 아물곤 한다. 이들이야말로 고통을 감내하며 자기 몫의 양식을 뒷사람에게 남겨주고 간 사람들이 아닐까? 김시습이 뒷사람들에게 끊임없이 나눠주고 있는 것은 고독과 방랑자의 정신이다.
1045년 파릉(巴陵) 태수 등주종(藤宗周)은 동정호(洞庭湖)의 악양루(岳陽樓)를 고쳐 지은 뒤, 범중엄(范仲淹, 989~1052)에게 이를 기념하는 글을 청했다. 범중엄은 모두 359자에 지나지 않는 ‘악양루기’를 지었다. 경관이 아름다운 악양루는 유배객과 시인 등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다. 거기 선 사람들의 표정은 크게 두 가지이다. 먹구름이 음산하게 드리우고 바람이 사납게 몰아치는 날이면 사람들의 얼굴은 두려움과 근심으로 가득하다. 반대로 달빛이 고요하고 난초 향기가 은은한 날이면 서로 온 세상을 다 얻은 듯 술잔을 권하며 기세를 올린다.
<일러스트 | 김상민기자> |
범중엄은 이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가 만난 옛날 어진 분들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주변 상황이 좋아졌다고 경망스레 기뻐하거나 일신상에 고달픈 일이 생겼다고 슬퍼하지 않았다. 조정의 높은 지위에 있으면 늘 백성들의 생활을 걱정했고, 혹 벼슬에서 물러나 강호에 있어도 임금의 정사를 걱정했다. 그들의 삶은 나아가도 걱정이요, 물러나도 걱정이니 걱정의 연속인 셈이다. 그리고 이런 문답을 가설했다. 누군가 그들에게 묻는다. “그럼 언제 즐긴단 말입니까?” 아래가 그들의 대답이다.
온 천하가 걱정하기에 앞서 걱정하고, 천하 사람들이 즐긴 뒤에 즐기지요. (先天下之憂而憂, 後天下之樂而樂歟.)
가정법으로 옛 인자들의 입을 빌려 말했지만 기실은 범중엄의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말이다. 한 마디 말에 만근의 무게가 실려 있다 함은 바로 이를 두고 이름이다. 범중엄은 악양루의 경관이 아니라 지식인의 책무를 말했다. 이는 곧 자신이 가야 할 길을 놓은 것이기도 하니, 신념은 때로 짧은 글을 먼 길로 만든다.
이순신(1545~1598)은 임진왜란 중에 아래 시구를 남겼다.
바다에 맹세하니 어룡이 꿈틀거리고 / 산에 다짐하니 초목도 내 마음 아네. (誓海魚龍動, 盟山草木知.)
사람의 귀에 들려준 시라기보다는 산과 바다를 두고 한 서원(誓願)이다. 그 마음이 닿아 바다의 물고기와 용들도 감동하여 꿈틀거리고 산의 초목도 그 마음을 알아 가볍게 몸을 떨었다. 지금도 사람들은 그 목소리에 가슴이 두근거린다. 이는 문사의 손끝에서 나올 수 있는 글이 아니다. 어떤 이는 이 시가 완편이 되지 못함을 안타깝다고 했지만, 어디 꼭 넉 줄 여덟 줄을 맞춰야 시가 된다던가. 그리고 또 진중의 장수가 어느 겨를에 글자 수나 맞추고 있을 것인가. 산을 우러르고 먼 바다를 바라볼 때 가슴에서 울컥 솟구치는 말이 우연히 시의 모습을 띠었을 뿐이다. 그것은 원래 가슴에 품고 있던 산악이고 바다였던 것이다.
무엇을 맹세했다는 말인가? 1594년 한산도에서 제작한 두 자루 칼에 새긴 검명(劍銘)이 대신 말해준다. “석 자 칼로 하늘에 맹세하니, 산하도 표정을 바꾸네.”(三尺誓天, 山河動色.) “한 번 휘둘러 모조리 쓸어내어, 그 피로 산하를 물들이리라.”(一揮掃蕩, 血染山河.) 조국을 침범한 왜적을 남김없이 몰아내겠다는 것이다. 그 칼의 길이가 2m에 이르고 무게는 5㎏이 넘으니 실제 휘두를 수 있는 게 아니다. 이순신은 밤낮으로 그 검기(劍氣)를 느끼려고 했으니, 두 자루의 칼 또한 바로 장수의 시인 셈이다.
김구(1876~1949)는 끝까지 남북 신탁통치를 반대하며 38선을 넘나들었다. 당시 그가 경교장에 머물면서 즐겨 쓴 휘호가 있었다.
눈 밟으며 들판을 간다고 해도 / 어지러이 밟아서는 아니 된다네 / 오늘 내가 지난 발자국은 / 끝내는 뒷사람의 길이 될지니. (踏雪野中去, 不須胡亂行. 今日我行跡, 遂作後人程.)
해방은 되었지만 정국은 혼미했고, 대세는 미국과 소련의 남북 분할 신탁 통치였다. 그야말로 눈 쌓인 들판의 형국이었다. 사람들은 모두 우왕좌왕 자기 살길을 찾았으니 눈 위에는 발자국이 어지러웠다. 김구는 자신이 가야 하는 길을 생각했다. 그 길이 사람들의 길이 되고, 역사의 길이 될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찌 취객처럼 어지러이 행보하랴! 그는 끝까지 남북을 오가며 단독 정부 수립을 주장했다. 당시 정지용은 시종 반탁 투쟁에 변절 없는 이는 ‘대(大)백범옹’뿐이니 신문기자들은 최경어를 사용하라고 촉구했다. 60년이 지난 오늘 나는 지용의 말을 지지한다. 백범이 간 발자국이 있어 우리는 그걸 길로 삼아 가고 있지 않은가! 시는 조선 후기 이양연(1771~1853)의 ‘야설(野雪)’이다.
나는 반항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존재한다.
알제리 출신의 알베르 카뮈(1913~1960)가 ‘반항인’에서 한 말이다. ‘내’가 반항하는데 왜 ‘우리’가 존재할까? 의식이 깨어있을 때 세계는 부조리하다. 여기서 개인의 번민이 발생한다. 이 개인의 번민은 부조리에 반항함으로써 집단의 차원으로 옮겨간다. 반항 속에서 인간은 스스로를 초월하여 참으로 타인 속으로 들어가게 되며, 반항운동을 기점으로 하여 고통은 집단적인 것이라는 의식을 띠게 된다는 것이다. 내가 반항하는데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이다. 그는 어떤 자유도 한계가 있어야 한다며 일체의 폭력과 이데올로기를 부정했다. 이러한 주장으로 카뮈는 회색분자라는 비난을 들어야 했지만, 그의 문학세계를 일관했던 그 신념은 오늘 이 땅에서 익어가고 있다. 또한 묘한 일이다.
개인의 차원을 넘어 부조리한 세계와 마주 설 때 신념은 권력의 핍박을 받는다. 신념을 지키는 삶은 슬프고 외롭다. 세계와 맞서는 긴장 속에서 몇 줄 글이 탄생한다. 1930년 23세 윤봉길은 아내와 어린 두 아들을 두고 집을 떠나며 ‘丈夫出家生不還’(장부가 집을 나서니 살아서는 아니 돌아오리) 일곱 자를 남겼다. 일제 말 이육사는 눈 내리는 겨울 노래의 씨앗을 뿌리며, “다시 천고의 뒤에 /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고 외쳤다. 그건 자기 다짐이요, 마음의 증거이며, 행동의 지침이다.
이 몇 줄 글들은 활자에 그치지 않고 광장이 되고 또 길이 된다. 사람들은 그 광장에 모여 연대하고, 또 용기를 내어 그 길을 간다. 우리는 그것을 역사라고 한다. 이때 그 짧은 글은 표류하는 마음의 등대가 되고, 비바람 몰아치는 역사의 관제탑이 되는 것이다.
부조리한 세계와 맞선 신념. 광야에서 목놓아 울부짖는 외로움 속에서 몇 줄 글이 탄생한다. 이 몇 줄 글은 활자에 그치지 않고 광장이 되고, 또 길이 된다. 사람들은 그 광장에 모여 연대하고, 또 용기를 내어 그 길을 간다. 우리는 그것을 역사라고 한다.
<이승수 | 경희대 연구교수>경향신문,2008.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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