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등단 이듬해인 1936년 초 시집 ‘사슴’을 200부 한정판으로 냈다. 주로 자신의 고향마을을 배경으로 한 토속적이고도 설화적인 이야기를 썼다. 이 시집에 실린 작품 가운데 ‘여우난골족’ ‘고야(古夜)’ ‘가즈랑집’ 등이 가장 선명하게 그러한 경향을 보여준다.
백석은 자신의 시집 ‘사슴’ 첫머리에 ‘가즈랑집’을 배치했는데, 이 무당 할머니 집은 마을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백석은 그 집에서 아이가 느낄 만한 두려움과 신비로움을 잘 표현했다. 귀신의 딸이라고 생각되어서 슬퍼 보이기도 하는 이 무당 할머니는 야생적인 자연에 바짝 다가서서 승냥이나 곰과 가까이 지내고, 온갖 나물과 약초의 세계 속에 거주한다.
‘외갓집’이나 ‘오금덩이라는 곳’ ‘고사(古寺) 개’ 등의 시에서도 자연 속에 깃들어 있는 마력을 보여준다. 이러한 전설적 경이로움과 신비한 마력의 세계가 근대화되고 서구화되면서 모두 사라져 버렸다.
백석은 시집 ‘사슴’을 낸 이후에는 여러 지역을 여행하며 각 지역의 토속적인 풍물을 소재로 시를 쓰게 된다. 경남 고성이나 삼천포 등 남해안 지역에 대해서 쓴 ‘남행시초’ 연작이나 평안도 함경도 지역을 노래한 ‘서행시초’ 연작, 그리고 만주지역과 그 접경지역을 방랑하며 쓴 ‘북방에서’ ‘수박씨 호박씨’ ‘귀농’ ‘고향’ ‘절망’이 그것이다.
그는 자신의 고향마을 밖에서도 우리 땅 고유의 토속적인 풍물과 음식 맛, 거기에 깃들인 정신을 잘 포착해낸다. 그는 만주지역을 유랑하면서는 자신의 외로운 처지에 대해 뼈저린 슬픔을 느끼기도 했다. 그러한 방랑의 끝에서 그는 거대한, 그러나 처절한 외침을 ‘북방에서’라는 시를 통해 토해냈다.
“아득한 옛날에 나는 떠났다”라는 구절로 시작되는 이 시는 우리 민족의 고대적 영토에서 이제는 낯선 자가 되어 방랑하는 자신의 깊은 회한을 노래했다. 그는 그 옛날 만주 북방영토로부터 남쪽으로 쫓겨 갔던 시절로 되돌아가 그 선조의 역사와 그 이후의 역사를 모두 하나로 엮어 ‘나’라는 서사시적 자아로 통합시켰다. 이제 만주벌판을 헤매는 자신은 그 ‘나’의 태반으로 돌아온 셈이지만 이곳에는 ‘나’와 관련된 어떤 것도 남지 않았다. 이 장탄식이야말로 지금 우리 민족에게 얼마나 절절하게 울려오는 것인가.
그는 이 안타깝고도 장대한 우리 민족의 서사적 비가를 한때 ‘여성’지에서 같이 근무했던 화가 정현웅(鄭玄雄)에게 바쳤다. 1935년부터 동아일보사 등에서 전문 삽화가로 활동한 정 화백은 그 당시 매우 단아한 백석의 옆모습을 한 장 그려 잡지에 싣기도 했다. 백석의 시는 그 단아한 모습을 닮았다.
신범순 서울대 교수·국어국문학과
동아일보,2005.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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