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0회 앞둔 ‘시가 있는 아침’ 시인 고은·정끝별 특별 대담
“각박한 현실과 바쁜 일상의 숨통을 터줄 ‘詩(시)가 있는 아침’과 함께
좀 더 넉넉하고 따뜻한 하루를 여시기 바랍니다.”
시가 제일 많이 소개된 시인은 정진규 시인으로 27회였고 정현종(26회), 문정희·이시영(이상 24회), 나희덕·안도현·장석남·황동규(이상 22회)씨 등이 뒤를 이었다. 가장 자주 인용된 시는 김종삼의 ‘묵화’, 이정록의 ‘의자’, 정끝별의 ‘밀물’ 등으로 각각 네 차례 인용됐다. 세 차례 인용된 시는 고은의 ‘순간의 꽃’, 함민복의 ‘긍정적인 밥’ 등 21명의 22편이었다. 시인들이 좋아하는 시인·시편들이 자연스럽게 드러난 셈이다.
고은 시인은 3일 서울대 연구실을 찾은 정끝별 시인에게 소주잔부터 내밀었다. 안주는 튜브에 담긴 기내용 고추장이었다. 술에 취해, 꽃 향기에 취해 두 시인의 시 이야기는 금세 발그레해졌다. | |
‘시아침’의 값어치는 그러나 이런 ‘실적’으로 셈할 수 없다. 연재 취지가 매일 아침 시원한 바람 한자락, 서늘한 두레박 우물물 한 모금같은 시 한 수 선사해 빠듯한 일상에 숨 쉴 틈을 주자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아침’을 처음 연재한 고은 시인(76)과 2년 전 ‘밥’을 주제로 한 시를 두 달간 소개한 정끝별 시인(45)으로부터 연재 계기와 의미 등 ‘시아침’ 이야기를 들었다.
# 아이를 생각하는 마음이 시의 마음
-연재를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
고은(이하 고)=현재 ‘시아침’ 해설을 맡고 있는 문학평론가 이경철가 중앙일보 문학담당 기자였던 1997년 말 함께한 술자리에서 우연히 얘기가 나왔다. 프랑스 시인 이브 본느푸아는 ‘시는 접근’이라고 했다. 나는 천동설의 지구처럼 시가 가만히 있는데 독자가 찾아와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동안 시를 사랑하는 데 있어 시인은 독자에게 빚졌다, 시인이 시를 가지고 독자를 찾아가자, 그런 뜻이었다. 그런 통로로 신문이 적당하다고 여겼고, 마침 다른 신문에 비슷한 연재를 하는 곳이 없었다. 처음 연재를 제안했을 때 중앙일보도 반신반의했지만 막상 시작하고 보니 독자·문단 양쪽 모두의 반응이 즉각적이었다. 1년쯤 연재했을 무렵, 하버드대 등에서의 미국 생활이 시작됐지만 그곳에 가서도 원고를 보냈다. 어느덧 3000회가 된다고 하니 감회가 깊다.
-중앙일보에 연재해야 했던 특별한 이유라도 있었나.
고=필연이 우연이 되는 것보다 우연이 필연이 되는 게 더 매혹적이다. 나는 70년대부터 중앙일보에 많은 글을 써왔다. 자연스럽게 중앙일보에 끌렸다.
정끝별(이하 정)=70, 80년대가 시의 황금기였다면 90년대 들어 시의 위기를 얘기하는 담론이 나왔다. 이런 상황에서 ‘시아침’은 ‘위기의 시’에 힘을 실어줬다. 일상적으로 시를 향유하도록 해 잊고 살았던 우리 시심(詩心)을 자극했다는 점도 ‘시아침’의 공로다. 우리는 전통적으로 ‘문(文)’을 숭상했다. 하지만 빡빡한 현대사를 거치며 먹고 사는 데 바빠 시심을 잃어버렸던 거다.
-시아침의 문학사적 의의까지 짚어주셨다. 단도직입으로 묻고 싶다. 왜 신문독자들이 아침부터 시를 읽어야 하나.
고=(신문 지면에서) 옆에 시 아닌 다른 것들이 있으니까.
정=시는 우주의 언어이자 자연의 언어이고 삶의 비의가 담긴 신같은 언어다. 이런 언어는 간직해야 한다. 엄마로서 나는 아이를 생각하면 세상이 간단해진다. 아이에게 뭘 먹일지, 누굴 만나게 해야 할지 분명한 판단이 선다. 아이를 생각하는 마음, 아이 같은 마음, 이게 동심(童心)이자 시심이다. 사람들이 동심·시심을 잃지 않는다면 우리 사회는 한결 따뜻해지고 스스로 자정작용도 할 수 있을 게다. ‘시아침’이 아침마다 시심을 톡 건드려준다면 아이에게 뽀뽀 한 번 받고 출근하는 기분이지 않을까.
고=아침에 시 한 편 읽는 일은 눈물 없이 메마른 눈에 눈물이 고이게 하고 맨 얼굴에 미소를 그려주는 일이다. 처음에는 의식적으로 읽다가 차츰 자기 삶에 시를 관련시키다 보면 본능적으로 읽게 될 것이다. 마치 아낙네가 하루라도 창가에 꽃을 놓지 않으면 그 창이 황량해 견딜 수 없는 것처럼, 산 중턱에 그럴듯한 정자라도 하나 있어야 산이 살아나는 것처럼.
# 시는 심장의 뉴스
-이야기를 듣다 보니 시의 실체가 궁금해진다. 시란 결국 뭔가.
고=수 만 년 전 화석에서, 죽은 아이에게 바쳐진 국화꽃이 발견된 적이 있다. 이게 시다. 죽음을 애통해하는 마음, 다시 태어난다면 이 세상보다 더 나은 황홀한 빛의 세상에서 태어나기를 바라는 마음, 이런 게 시의 마음이다. 논리가 머리에 와 닿는다면 시는 가슴으로 온다. 때문에 나는 시를 심장의 뉴스라고 부른다. 시는 결국 이런 마음이 문자화된 거다. 엄청난 우주 운율의 지극히 일부 사투리를 채록한 게 시라고 보면 된다. 이럴 때 우리는 문자에 갇히면 안된다. 너무 문자화된 형태로 시의 우월성을 따지다 보면 시를 잃게 된다. 미국 관타나모 수용소 수감자들이 시집을 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들은 시인도 아닐 뿐더러 종이도 펜도 없었을 텐데 시를 썼다. 시는 극한 상황에서 태어난다. 이런 걸 보면 시는 지구가 끝나더라도 살아남을 거다. 나는 시가 위기라는 데 동의하지 않는다.
정=우선 시가 영원하리라는 말씀에 200% 동의한다. 나는 시란 삶의 에너지, 열도라고 얘기하고 싶다. 아주 짧고 비약적이고 정갈한 그런 열도 말이다.
- 그런 열도의 언어적 표현이 시란 말인가.
정=열도 그 자체라는 거다.
고=이미지가 어른거리는, 그게 에너지고 시인은 이미지에 대한 권리가 있다. 시인은 이미지를 발견해 그것을 세상에 소리로, 언어로 내보낼 의무가 있다.
-두 분이 연재할 때 어떤 기준으로 시를 고르고 해설을 썼나.
고=편견 없이 무작위로 시를 고르되 숨어 있는 보배도 찾으려고 노력했다. 불쌍한 시인의 부족한 시를 고쳐서 소개한 적도 있다. 해설은 시라고는 평생 읽을 것 같지 않은 할머니나 총각이 무심코 지나다 ‘악’하고 들여다보도록 써야 한다. 하지만 난 그런 언어를 찾지 못했다. 또 기질상 글 쓸 때 과학적으로 엄밀하게 계산하지 못한다. 그냥 한 잔 먹고 썼다. 나 자신을 놓아버렸다.
정=나는 밥을 테마로 한 시들만 소개하며 현대시사를 아우르는 다양한 음역을 보여주려고 했다. 해설은 북 칠 때 박자 맞춰주는 추임새 같은 거라고 본다. 내가 읽으며 느낌이 왔던 구절, 그런 핵심을 꼭 집어 알려주려고 노력했다.
-아까 시아침 연재의 반응이 즉각적이라고 했는데.
고=편지도 오고 전화도 왔다. 나중엔 집 전화를 아예 받지 않았다. 중앙일보 보고 다른 신문들이 결국 비슷한 연재를 따라했다. 그런 점에서 나는 시를 전염시키는 바이러스 역할도 했다고 생각한다. 보람을 느낀다.
◆고은=1933년 전북 군산 출생. 58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한 이래 첫 시집 『피안감성』, 연작시편 『만인보』(전26권), 서사시 『백두산』(전7권) 등 시·소설·평론 등에 걸쳐 150여 권의 저서를 냈다. 영어·독일어 등 10여 개 언어로 시집, 시선집 등이 번역됐다. 대산문학상·중앙문화대상·대한민국예술원상, 스웨덴 시카다상 등을 받았다.
◆정끝별=1964년 전남 나주에서 태어나 이화여대 국문과 및 대학원을 졸업했다. 88년 ‘문학사상’ 시 부문에, 9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각각 당선돼 시쓰기와 평론 활동을 병행하고 있다. 시집 『자작나무 내 인생』『흰 책』『삼천갑자 복사빛』『와락』 등과 밥 테마 시를 모아 엮고 해설한 시선집 『밥』을 출간했다.
/ 신준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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