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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의 향기/시론 칼럼

청록파 재조명-청록집 발간 60주년

by 골든모티브 2009. 2. 11.

[청록파 재조명]청록집 발간 60주년… 맑은 시의 추억


격조 높은 서정성과 대중성 있는 시로 명성…
“일제 탄압기에 우리말로 민족정서 이어”

 

오는 6월 6일로 박두진·박목월·조지훈의 3인 시집 ‘청록집(靑鹿集)’이 나온 지 꼭 60년이 된다. 청록집의 발간으로 세 시인은 각자의 이름 외에 ‘청록파’라는 근사한 이름 하나를 새로 얻었다. 청록집 이후 셋의 작품 세계가 늘 같은 곳을 향한 것은 아니었다. 때로 조금씩 어긋났고 종종 전혀 다른 곳을 지향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 청록집 출판기념회에 모인 박목월ㆍ조지훈ㆍ박두진(앞줄 왼쪽 두 번째부터)과 동료 문인들.
세 시인은 사람들에게 ‘영원한 청록파’로 기억되고 있다.
예순 살 생일은 예로부터 자신이 태어난 간지(干支)의 해가 다시 돌아왔음을 기념하기 위해 성대하게 잔치를 벌여 축하해온 특별한 기념일이었다. 그 주인공이 사람 아닌 무생물이라 하여 그 의미가 퇴색될 이유는 없을 터. 여기, 청록집 발간과 청록파의 시세계에 관한 이야기들을 좇으며 2006년 한국 문학사에서 청록파가 갖는 의미를 되짚는 자리를 마련했다. 상다리가 부러질 만큼 화려하지는 않지만 나름대로 소박하고 정갈한 청록집의 수연(壽宴)상을 이 지면이 대신하길 바란다면 과욕일까?
1939년 초, 30대 후반의 혈기방장한 시인 정지용(1950년 납북)은 휘문고보 1년 후배인 상허 이태준으로부터 문학잡지 ‘문장’의 시 고선위원(考選委員)을 맡아 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문장’은 김연만 당시 문장사 사장이 그 해 2월 1일 야심차게 창간한 월간 문학잡지. 책임 편집자로 소설 쪽 추천을 맡은 이태준이 시 분야 신인 발굴의 중책을 정지용에게 맡긴 것이다. 일본 도시샤(同志社) 대학 유학을 마치고 모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그의 심미안이 빛을 발한 것도 그 때부터였다. 그리고 그 해 4월(조지훈 ‘고풍의상’)과 6월(박두진 ‘향현’ ‘묘지송’), 9월(박목월 ‘길처럼’ ‘그것은 연륜이다’) 등 불과 2~3개월 간격을 두고 훗날 한국 현대 시문학의 큰 획을 그을 걸출한 신인 3명이 그의 손 끝에서 태어났다. ‘청록파(靑鹿派)’가 처음 세상의 빛을 보는 순간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1939년 당시부터 청록파라는 이름이 통용된 것은 아니었다. 한 스승으로부터 추천을 받아 활동을 시작하기는 했지만 이후 셋이 자주 왕래했다는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다. 이들의 제휴 가능성을 알아본 것은 당시 신생 출판사였던 을유문화사의 조풍연 대표였다. 조 대표는 연세대의 전신인 연희전문 출신으로 삼사문학 동인을 비롯해 매일신보 편집과 문장 편집위원직을 두루 거친 타고난 출판 기획자였다. 그런 그의 눈에 다른 듯 닮은 세 시인의 시풍(詩風)이 예사롭지 않게 보인 것은 당연한 결과. 셋 중 한 명인 박두진이 을유문화사에서 근무했다는 점도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
▲ 청록집 초판 표지.

이어령의 책 ‘한국작가 전기 연구’를 보면 청록집의 탄생 경위가 흥미롭게 서술돼 있다. 1946년 3월 어느 날, 박두진은 조 대표의 주선으로 경주에 있던 박목월에게 ‘급히 상경해 달라’는 메시지를 담아 전보를 보낸다. 이것이 박두진과 박목월의 첫 번째 만남이었다. 둘은 그날로 성북동에 있는 조지훈의 집으로 찾아가 3인 시집의 발간을 모의하게 된다. 조지훈은 훗날 ‘나의 시의 고향’이라는 회고록을 통해 당시의 기억을 이렇게 떠올리고 있다. “청록집이 우리 세 사람의 시의 고향이라는 것을 모두들 안다. 그러나 청록집 간행을 을유문화사로부터 요청 받고 이를 연락한 이는 두진이요, 청록집 원고를 서로 뽑아주던 것은 어느 눈 오던 밤의 성북동 지훈의 집에서의 일이요, 청록집이란 이름을 붙인 것은 목월이라는 것을 아는 이는 우리 세 사람뿐이다.”

 

그로부터 3개월 후, 세 작가가 서로 골라준 원고들로 채워진 한 권의 시집이 드디어 완성됐다. 시집의 제목은 조지훈의 회고에서처럼 박목월의 원고 중 하나였던 ‘청노루’에서 그 의미를 따와 청록집으로 정했다. 박두진이 대표 저자를 맡았지만 작품의 수록은 ‘목월-지훈-두진’의 순으로 이루어졌다. 작품 수는 박목월이 15편으로 제일 많았으며, 조지훈과 박두진이 각각 12편을 골라 실었다. 114쪽짜리 국판 반양장 형태의 책 표지 앞면에는 스케치하듯 그려진 노루 한 마리가 파란색 물감으로 옅게 채색됐고 그 위에 한자로 ‘박목월 조지훈 박두진 삼인시집 청록집’이라는 글자가 씌어졌다. 책의 장정(裝幀), 즉 표지 디자인과 제본 작업은 서양화가 김용준이, 책 속에 포함된 세 작가의 소묘(素描)작업은 ‘코주부’ 김용환의 동생 만화가 김의환이 각각 맡았다.

 

청록집 초판이 몇 부나 인쇄되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당시 기록이 명확하게 남아 있지 않고 청록집의 발간을 진두지휘했던 조풍연 대표를 비롯, 청록파 시인 세 명 모두 저세상 사람이 되었기 때문. 그러나 초판 중 한 권을 보유하고 있는 장서가(藏書家) 오영식씨(서울 보성고 교사)는 “못해도 수백 권은 찍었을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백석 시집 ‘사슴’ 초판(1936년)이 100부, 오장환 시집 ‘헌사’ 초판(1939년)이 80부 인쇄됐는데 해방 이후 문학에 대한 열망이 커졌다는 점을 감안할 때 청록집은 그보다 약간 더 많은 수준일 것”이라는 추측이다.
청록집 초판은 이미 희귀본이 된 지 오래다. ‘적게 찍어서’이기도 하지만 ‘보관과 관리가 허술해서’가 더 큰 이유다. 심지어 책을 직접 찍었던 을유문화사에도 초판은 한 권도 없다. 1949년에 발간한 재판이 있을 뿐이다.

을유문화사 측은 작년 창립 60주년 기념 팸플릿을 만들 때 자사에 보관 중인 재판이 초판인 줄 알고 그대로 게재했다가 뒤늦게 알아차리는 해프닝을 벌이기도 했다. 7~8년 전 한 수집가로부터 20만원 안팎에 청록집 초판을 구한 오 교사는 당시에도 너무 귀한 책을 구했다는 기쁨에 어쩔 줄 몰랐다고 한다. 오 교사가 보관 중인 청록집은 다른 초판에 비해 깨끗하고 표지와 내지의 마모도 심하지 않아 보관 상태가 양호한 편. 그는 “지난번 인터넷 경매 사이트 코베이에 청록집 재판이 나왔었다”며 “초판의 경우 잘 나오지도 않을 뿐더러 나온다 하더라도 가격을 매길 수 없을 정도”라고 밝혔다.

 

▲ 왼쪽부터 조지훈ㆍ박목월ㆍ박두진.

청록집은 당시로서는 흔치 않았던 재판을 찍을 만큼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1929년 이광수와 주요한, 김동환이 함께 펴낸 ‘3인시가집(三人詩歌集)’ 이후 3인 시집으로서는 우리 시 문단사상 두 번째 베스트셀러였던 셈이다. 청록집 발간 직후의 흥겨운 분위기는 1946년 9월 25일 열렸던 ‘청록집 출판기념회’의 사진을 통해서도 엿볼 수 있다. 당시 청록파 3인과 함께 조선청년문학가협회 소속 동인이었던 곽종원씨가 사진에 곁들여 기록한 글이 있다. “1946년 9월이면 문단의 좌우대립이 가장 격심했던 계절이다. 이러한 소란 속에서 나온 청록집은 순수시의 한 표본처럼 논의되어 찬부(讚否) 양론이 서로 엇갈려 있었으나 문단의 동지적 결합은 이때가 가장 순진스러웠다고나 할까. 그날 밤도 우리는 2차 회, 3차 회까지 돌아다니다가 마지막에 얼근히 취해서 남은 친구들끼리 기념촬영을 했다.”

 

청록집에 실린 작품들은 대개 자연을 작품의 소재로 채택해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청록집의 어느 쪽을 펼쳐도 이러한 경향은 쉽게 감지된다. ‘江나루 건너서/밀밭길을//구름에 달가듯이/가는 나그네//길은 외줄기/南道 三百里//술익는 마을마다/타는 저녁놀’(박목월 ‘나그네’ 중) ‘木蓮꽃 향기로운 그늘 아래/물로 씻은 듯이 조약돌 빛나고/흰 옷깃 매무새의 구층탑 위로/파르라리 돌아가는 新羅千年의 꽃구름이여’(조지훈 ‘古寺 2’ 중) ‘산이여! 장차 너희 솟아난 봉우리에 엎드린 마루에 확확 치밀어 오를 火焰을 내 기다려도 좋으랴?/피ㅅ내를 잊은 여우 이리 등속이 사슴 토끼와 더불어 싸리ㅅ순 칡순을 찾아 함께 즐거이 뛰는 날을 믿고 길이 기다려도 좋으랴?’(박두진 ‘香峴’ 중)

 

이런 경향에 대해서는 지금도 의견이 분분하지만, 가장 많은 힘을 얻고 있는 것은 민족탄압이 최고조에 달했던 일제 말기의 시대적 상황과 연계시키는 해석 방식이다. 현실과의 화해가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시기에 시인이 취할 수 있는 최선의 대응 방식이 ‘자연의 폭넓은 수용’이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박두진은 그의 저서 ‘시인의 고향’(1958)을 통해 “일제의 강압 검열하에서 받는 온갖 제약을 타개하기 위한 시의 유일한 혈로(血路)는 정치나 사회 세계가 아닌 자연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시풍이 모두에게 환영 받은 것은 아니었다. 일부 평론가들은 ‘현실을 외면했다’ ‘고뇌의식이 없다’ ‘행동하지 않고 침묵했다’는 이유를 들어 청록파를 비난했다. 시인 고은씨는 1969년 ‘월간문학’ 8월호에서 “그들의 시는 일제 암흑기의 민족적 비극에 대해서 제1의적으로 투신할 만한 적극적 고뇌의식을 가지지 않았고, 그 암담한 현실에서 그들의 생득적인 향토에 돌아간 세계이다”라고 언급, 청록파에 대한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한국현대문학사’(2004년)를 펴낸 신동욱 전 연세대 교수는 박목월에 대해 “뛰어난 감수성과 시적 기교를 지녔으나 개인적 향수와 고전 의식에 잠김으로써 미래로 열린 시 창조의 길을 걷지 못한 채 시대 이념을 시화(詩化)하는 길에서 멀어져 간 시인”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청록파 시의 대비 연구’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순천향대 국어국문학과 김기중 교수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청록파 시인들은 민족말살 정책으로 모든 예술활동을 억압 받는 와중에서 우리말 시를 고집하며 우리 고유의 심성에 호소했으므로 제대로 된 평가를 받을 만하다”는 것이다. 그는 ‘현실적 진실’과 ‘당위적 진실’에 관한 이야기도 했다. 치열하게 현실을 받아들이는 문학이 있다면 현실이 담지 못하는 꿈을 그리는 문학도 있어야 다양성을 인정 받을 수 있다는 논리다.

 

▲ 1974년 박두진 시집 '해' 출판기념회에서 다시 모인 청록파(가운뎃줄 오른쪽 두번째부터 박목월, 조지훈, 박두진).
고려대 국문학연구회에서 청록파를 연구했던 창원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민병기 교수는 일제 말기 ‘문인 탄압’이라는 신산(辛酸)을 겪으면서도 우리 시가의 전통 음보를 놀랍도록 재현해낸 박목월과 조지훈의 문학적 업적에 높은 점수를 매긴다. “조지훈의 시 ‘귀촉도’를 한번 읊어보세요. 3장 6구로 구성된 완전한 시조 형식입니다. 현대시의 형식을 빌려 전통 가락을 살려내는 맛이 일품이지요. 박목월의 ‘나그네’ 같은 시도 4음보의 정형률을 엄격하게 지키며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는 “두 시인이 훌륭하게 일구어놓은 전통이 후대에 제대로 계승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고 말했다.

1946년 가을, 서울 어느 술집에서 청록집의 성공적인 발간을 자축하는 조촐한 술자리가 마련됐다. 참석자는 청록파 3인과 그들의 스승 정지용, 그리고 발행자인 을유문화사 조풍연 대표였다. 박목월은 훗날 조지훈을 회상하며 쓴 책 ‘지훈회상이제(芝薰回想二題)’를 통해 그날의 기억을 술회하고 있다. 책에 따르면 술자리에서 정지용은 “내가 얼마나 무서운 호랑이 새끼들을 길러냈는지 모를 거야. 아무리 추천해주어도 고맙다는 인사 한마디, 연하장 하나 보내는 자가 없었어. 지독한 놈들이야”라며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투덜거렸다고 한다. 그 말을 들은 조 대표가 “그래요. 추천을 취소하지 그랬어요”라며 익살을 부리자 정지용은 정색을 하고 이렇게 대답했다는 것이다. “이 사람 뭐랬지. 왜 취소해. 왜 취소하느냐 말이다. 그게 얼마나 자랑이었다고. 고만한 자만도 못 가지고 굽실거리는 자를 내가 추천해. 어림없지, 어림없어.” 신인 추천에 지독할 만큼 까다로웠다는 평가를 받는 정지용이었지만 청록파에 대한 그의 애정은 각별했다. 그리고 그러한 평가는 응당 받을 만한 것이었다.

 

김기중 교수는 최근 한국 시단의 흐름에 대해 아쉬움이 크다. 모더니즘을 표방하는 부류의 시들은 난삽한 언어로 지나치게 개인화된 이미지들을 나열하고 있어 도통 감동이 없고, 그나마 독자들을 확보하고 있는 ‘대중시’ 부류의 작품은 쉽게 읽히지만 지나치게 감정적이고 시적 세련미나 서정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요즘 같은 때 청록파에 대한 재조명이 더욱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들의 시처럼 격조 높은 서정성과 대중적 호소력을 겸비한 작품이 흔치 않다는 생각에서다.

 

“청록파에 대한 평가의 잣대는 논외로 해도 좋습니다. 다만 시가 대중으로부터 외면 받고 있는 요즘 시대에 청록파의 존재를 통해 ‘시의 의미’를 되묻는 작업은 꼭 필요하지 않을까요?” 청록집 탄생 60주년에 즈음해 한번쯤 떠올려 봄직한 질문이다. /주간조선,2006.5.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