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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의 향기/사랑詩vs위안詩

[현대시 100년-사랑의 詩] 황동규 - 소곡3 (04)

by 골든모티브 2008. 1. 25.

[현대시 100년-사랑의 詩]

 

황동규 - 소곡3 

 



내 마음 안에서나 밖에서나 혹은 뒤에서나

당신이 언제나 피어 있었기 때문에

나는 끝이 있는 것이 되고 싶었읍니다.

선창에 배가 와 닿듯이

당신에 가까워지고

언제나 떠날 때가 오면

넌즛이 밀려나고 싶었읍니다.

아니면 나는 아무것도 바라고 있지 않았던 것을

창 밖에 문든 흩뿌리는 밤비처럼

언제나 처음처럼 휘번뜩이는 거리를

남몰래 지나가고 있었을 뿐인 것을.

 

 

 

서평

 

내게 사랑하는 한 사람이 있다는 것은, ‘당신이 날것으로 살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날것! 당신은 내 존재의 안과 밖에서 살아서 움직이는 그 무엇이다. 당신을 사랑하는 것이 진행형이기 때문에, 당신은 날것의 존재다. 내 사랑은 살아 있는 사건이다. 그런데 이 시는 이상한 소망을 고백하기 시작한다. 내가 ‘끝이 있는 것’이 되고 싶었다는 것. 왜 내 사랑은 ‘끝’을 소망하기 시작했을까?

 

당신이 내게 살아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차라리 나는 끝이 있는 것이어야 한다. 내가 끝이 있는 존재라는 이유로, 내 사랑의 살아 있음은 오히려 생생하게 경험된다. ‘나’의 ‘끝’은 ‘선창에 배가 와 닿고’ ‘창밖에 문득 후득이다 숨죽이는 밤비’의 이미지를 얻는다. 내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사랑의 능동성은 내 존재의 수동성과 한계성과 대비된다. 그리하여 나는, 차라리 ‘아무것도 바라고 있지 않았던’ 존재이고, 내 사랑은 ‘남 몰래 지나가고 있었던’ 누구도 모르는 은밀한 사건일 뿐.

 

하지만 깊은 곳에서 욕망하는 것이 단지 ‘끝’을 예감하는 사랑일까? 내 사랑의 수동성과 무심함은, 당신의 저 눈부신 생생함을 드러내려는 내 사소하고 내밀한 사랑의 다른 언어가 아닐까? 내 사랑의 언어는 언제나 당신에게조차 암호처럼 속삭인다. 가끔 내 사랑은 무심함을 가장한다.

 황동규 시인은 올해로 등단 50년을 맞는다. 젊은 날 시인의 놀랍도록 투명한 감성은 지워지지 않는 청춘의 문장으로 기억된다.

 

이광호 서울예대 교수·문학평론가

동아일보,2008.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