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이 애송하는 사랑시(詩)] [49]
낙화, 첫사랑-김선우
1
그대가 아찔한 절벽 끝에서
바람의 얼굴로 서성인다면 그대를 부르지 않겠습니다
옷깃 부둥키며 수선스럽지 않겠습니다
그대에게 무슨 연유가 있겠거니
내 사랑의 몫으로
그대의 뒷모습을 마지막 순간까지 지켜보겠습니다
손 내밀지 않고 그대를 다 가지겠습니다
2
아주 조금만 먼저 바닥에 닿겠습니다
가장 낮게 엎드린 처마를 끌고
추락하는 그대의 속도를 앞지르겠습니다
내 생을 사랑하지 않고는
다른 생을 사랑할 수 없음을 늦게 알았습니다
그대보다 먼저 바닥에 닿아
강보에 아기를 받듯 온몸으로 나를 받겠습니다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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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러스트=클로이
내 속에서 추락하는 그대는 꽃이다, 바람이다
통일신라 성덕왕 때의 일이다. 강릉 태수로 부임하는 순정공을 따라가던 수로부인이 벼랑에 핀 철쭉꽃을 보고 꺾어 달라고 말했다. 아무도 감히 나서지 못하는데 문득 소를 몰고 가던 노인(견우노옹)이 나타나 꽃을 꺾어 바치며 노래를 부르니 이것이 향가로 전하는 헌화가(獻花歌)이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랑은 끝내 벼랑으로 간다. 수로부인이 원했던 꽃은 그 절체절명의 벼랑 끝에서 확인하는 사랑이었을지도 모른다. 사랑이 벼랑에 이르러 꽃 한 송이가 됐고 그 꽃이 막 떨어지려 하고 있다. 이 시의 화자는 지금 두 겹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중이다. 한 겹은 지나온 길이고 다른 한 겹은 벼랑에 다다른 시간이다. 그는 공간을 떠나 기억을 통해 영원의 시간으로 이동하는 사랑을 바라보고 있다. 꽃이 떨어지는 이별의 순간, 그는 '내 사랑의 몫'을 알므로 '수선스럽지'않겠다 한다. 이 이별은 범상하지 않아서 '손 내밀지 않고 그대를 다 갖는' 이별이다.
'그대'는 '그대'로 가는 것이 아니라 '바람의 얼굴'이거나 꽃의 얼굴이 되어 내 속에서 '추락'하려고 한다. 그리고 '나'는 그대보다 먼저 추락해 '강보'를 펼치는 자기 희생적 사랑을 통해 오히려 자신을 살린다고 한다. 이것은 '그대 없이 나는 없는 것'을 아는 사랑의 가장 숭고하고도 높은 경지이다. 언제부터인지 너는 나였기 때문이다. 그대와 나는 그리하여 서로 물들어 시간이 끊어놓지 못하는 영원한 사랑의 갈피 속으로 스밀 것이다. 이때 '그대'를 받는 '강보' 또한 벼랑의 다른 이름이다. 그곳에서 꽃이나 바람이 되어보지 않고 어떻게 강보를 펼 수 있겠는가.
강릉에서 나고 자란 김선우(38) 시인은 이 시대 최고의 사랑시인이다. 시집 《도화 아래 잠들다》, 《내 몸 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 등을 통해 그녀는 사랑이 두 연인을 구속하지 않고 자유케 하는, 그리하여 궁극적으로 사랑을 통해 실존적 자아를 완성하게 되는 높은 사랑의 경지를 노래해 왔다. 시인은 사랑을 "죽을 만큼 사랑하는데 구속하지 않고 자유로운 것, 내가 너를 사랑해서 네가 자유로워지는 것, 내가 너를 사랑해서 내가 자유로워지는 것, 그래서 우리가 서로를 살릴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하기에 '아프지 마, 목숨이 이미 아픈 거니까/ 아파도 환한 벼랑이 목숨이니까'(〈무서운 들녘〉)라며 사람이 타고난 운명을 위로하고, '스스로 있는 그대여, 떠나가셔도 좋습니다.// 불두화 무심하니 서럽습니다 불두화 무심하니 참 좋습니다'(〈칠월의 일곱 번째 밤〉)라며 만남과 헤어짐을 '자재(自在)한 것'이라고 따뜻하게 고백할 수 있는 것이다.
장석남시인,조선일보,2008.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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