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이 태어나는 자리]⑪
풍류-농염한 달빛에 겨워 마음을 읊조리면그대로 한 편의 詩
1년 내내 집안에 갇혀 온갖 가사에 시달리던 아낙들이 술과 음식 장만하고 벗님들 불러모아 화전놀이를 가던 때도 바로 이 시절, 청명(淸明) 무렵이었다. 그들은 꽃지짐 몇 처럼으로 봄기운을 삼켜 규중에서 썩은 간장을 씻어내었다. 그리고 높이 올라 홍진 세상 굽어보았고, 호탕해진 심신으로 또 힘겨운 일상을 버텨내곤 했던 것이다.
고등학교 시절 밑줄을 그어가며 ‘상춘곡’을 공부했지만, 이 노래의 가락이 내 몸에서 되살아난 것은, 문학을 공부하고도 한참 세월을 보낸 뒤였다. 오갖 신고 속에서 나름대로 일 점 여유를 놓치지 않으려고 안간힘쓰던 어느 봄날 ‘상춘곡’은 나의 노래가 되었다.
갓 괴여 닉은 술을 갈건(葛巾)으로 밧타노코 / 곳나모 가지 것거 수 노코 먹으리라 / 화풍(和風)이 건닷 부러 녹수(綠水) 건너오니 / 청향(淸香)은 잔에 지고 낙홍(落紅)은 옷새 진다.
밑줄 칠 이유도, 분석할 필요도 없다. 흥얼흥얼 읊조리기만 하면 원문 그대로 내 몸의 가락이 된다. 이 맛은 삶의 애환이 몸에서 숙성되고, 가끔은 시간보다 더디게 걷는 여유를 지닌 이라면 누구나 맛볼 수 있다.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 1653~1722)은 평생 전국을 떠돌며 시문을 짓고 깊은 산중에 은거하며 독서로 세월을 보낸 사람이다. 1705년 섣달 스무날 밤, 그는 이운(李澐)이란 제자와 함께 묘적암(妙寂庵,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을 방문했다. 마침 날도 몹시 춥고 눈까지 내리려 하여 제자는 나들이를 그만두자고 하였다. 삼연은 흥을 깬다며 크게 꾸짖고는 혼자 걸어 나섰다. 제자는 할 수 없이 좇아 나섰다. 계곡에 들어서자 함박눈이 쏟아져 땅에 한 자나 쌓였다. 제자는 소매로 갓에 쌓인 눈을 연신 털면서 가다가 돌아보니, 스승은 온몸에 눈을 뒤집어쓰고 갓은 눌려 찌그러질 정도였지만 끝내 한 번도 털지 않았다. 제자는 그날 스승의 모습을 두고 마치 유리광여래가 세상에 나온 듯하다고 했다. 김창흡도 이날의 느낌을 ‘눈 속에 묘적암을 찾아 雪中訪妙寂菴’란 시에서 이렇게 남겨놓았다.
큰 눈도 이는 흥취 막지 못하니 / 신명이 먼저 일어 길을 나서네. 大雪莫禁興, 超超神欲行.
1768년 겨울 어느 날 밤 한양 종로, 희미한 달빛이 어스름했다. 청년 박제가(1750~1805)는 생각했다. ‘이러한 때 벗을 찾지 않으면 벗은 있어 무엇에 쓰겠는가?’ 그는 돈 10전을 움켜쥐고, 가슴엔 ‘이소경(離騷經)’을 품은 뒤, 원각사 탑 북쪽에 있는 유금(柳琴, 1741~1788)의 집 문을 두드려 막걸리를 사 마셨다. 유금은 두 딸의 재롱을 보고 있다가, 박제가를 맞이하여 해금을 탔다. 잠시 후 눈이 내려 뜰에 가득 쌓였다. 흥이 다하지 않은 박제가가 시를 지어 제안했다.
올 적에는 달빛이 희미했는데 / 취중에 눈은 깊이 쌓였네 / 이러한 때 벗이 있지 않으면 / 장차 무엇으로 견딜 것인가 / 나는 ‘이소’ 지녔으니 / 그대는 해금 끼고 / 한밤중에 문을 나서 / 이자(李子)를 찾아가세. 來時月陰, 醉中雪深. 不有友生, 將何以堪. 我有離騷, 子挾琴, 夜半出門, 于李子尋.
이자(李子)은 역시 근처에 살던 이덕무(1741~1793)를 가리킨다. 이들은 이덕무의 집을 찾아가 또 술을 마시고 시를 짓고 해금을 켜고 놀다가 잠시 눈을 붙였다. 유금은 이 날의 광경을 이렇게 그려냈다.
손님은 ‘이소경’을 품에 지니고 / 눈 오는 한밤중에 나를 찾았네 / 불평한 그대 마음 나는 아노니 / 광릉산(廣陵散) 한 곡조를 연주하노라. 客持離騷經, 訪我雪夜半. 知君不平心, 一彈廣陵散.
이들이 넘치고 남아 밤 늦도록 술 마시고 돌아다닌 것은 아니었다. 세 사람은 모두 서얼이었다. 식견과 포부는 세상을 덮었지만, 발 디딜 땅은 사방 몇 자에 지나지 않았다. ‘불평한 마음’이란 그것을 말함이다. ‘광릉산’은 이름만 전해지는 전설의 곡조이다. 이들은 자기들만의 ‘광릉산’ 곡조를 연주하며, 세상으로부터 외면받은 자신들의 처지와 심정을 위로했던 것이다.
1798년 정약용(1762~1836)을 비롯한 열다섯 사람이 뜻을 모아 시사(詩社)를 만들었다. 참여하는 사람의 나이는 정약용보다 네 살이 많거나 적은 것으로 한정했다. 뜻이 모아진 다음에는 규약을 만들었는데, 그중 모임의 날짜는 이렇게 하기로 했다.
살구꽃이 피면 한 번 모이고, 복사꽃이 피면 한 번 모이고, 한여름 참외가 익으면 한 번 모이고, 서늘한 바람이 불면 서지(西池)의 연꽃을 구경하기 위해 한 번 모이고, 국화가 피면 한 번 모이고, 겨울에 큰 눈이 내리면 한 번 모이며, 한해가 저물 무렵 매화가 꽃망울을 터뜨리면 한 번 모인다. ‘죽란시사첩서(竹蘭詩社帖序)’
바람 부는 대로 물 흐르는 대로 마음의 리듬을 맞추는 것이 풍류다. 한 자락 자유만 있다면, 스치는 봄바람에서도 풍류를 지어낼 수 있다. 때론 가난하고, 때론 고달프다 해도 풍류를 잃지 않음은 삶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다.
이 글을 보고 있으면 먹을 게 없어도 입맛이 다셔진다. 사람들은 나며들며 살구나무에 꽃이 언제 피나 살폈을 것이고, 겨울이 오면 하늘을 보며 눈 오기를 기다렸을 것이다. 시흥은 이미 가슴에 가득해졌으니, 몇 글자 시야 짓지 않아도 그만이다. 그보다 200년 전 김육(1580~1658)은 술벗을 청하며 이렇게 읊조렸다. “자네 집에 술 익거든 부디 날 부르시소 / 내 집에 꽃 피거든 나도 자네 청해옴세 / 백년 덧 시름 없을 일을 의논코자 하노라.” 언제 어디에서 만날지는 그 다음에 상의할 문제이다. 이만한 여유라면 문학은 부르지 않아도 오게 마련이다.
큰집에서 밤을 이어 잔치가 벌어져도 / 부귀할 때의 맛은 쉬이 사라지는 법이라네 / 어찌 눈 내린 깊은 겨울밤 산사에서 / 한가로이 나무 등걸 태워 술 데움만 하리오. 華堂煥室宴連宵 富貴中間味易銷 何似山齋深夜雪 閑燒暖寒.
이규보(1168~1241)의 시, ‘겨울밤 산사에서의 한 잔 冬夜山寺小酌’이다. 천천히, 아주 느리게 술을 데운다. 아름다운 풍경과 따스한 분위기를 천천히 음미하려는 것이다. 이 밤을 어서 보내고 싶지 않은 것이다.
최근 몇몇 술자리에서 폭탄주 세례를 받았다. 예외 없이 대취하여 정신을 못 차렸다. 투자 대비 소득 효과로 보면 최고의 경제성을 지닌 셈이다. 사람들은 묵묵히 마시다가 자기도 모르게 쓰러져 자고, 헤어지고, 그리고 다음날이면 굳이 어제를 기억하지 않는다. 폭탄주를 마시는 이유는 분명하다. 빨리 취해 어색한 사람들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고, 해가 가고 달이 뜨는 느린 시간을 앞질러 가고 싶기 때문이다. 폭탄주 술문화에는 명확하게 경제 논리가 자리 잡고 있다.
속도와 계산만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풍류는 설 자리가 없다. 하지만 아무리 급박한 상황에서도 일 점 여유가 웃음을 자아내듯, 한 자락 자유가 풍류를 지어낸다. 풍류란 마음의 작용을 불어가는 대로[風] 흘러가는 대로[流] 맡겨두는 것이고, 바람과 시내의 속도에 마음의 리듬을 맞추는 것이다. 풍월(風月)이라고 할 때는 바람과 달의 속도에 삶의 보조를 맞추는 것을 뜻한다. 달이 돋아오는 속도에 맞춰, “솔불 혀지마라 어졔 진 달 도다온다 / 아희야 박주산채(薄酒山菜)일망정 없다 말고 내여라”(한석봉)라고 말하는 것을 이름이다.
한 잔의 소주에도 풍류가 있다. 남의 자유와 희망을 빼앗는 일이 아니라면, 죽을 때까지 버리지 말아야 할 것은 한 자락 풍류이다. 때로 가난하고, 고달프다 해도 말이다. 풍류를 잃지 않음은 자기 삶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신경림의 ‘가난한 사랑 노래’를 이렇게 바꿔 부른다.
가난하다고 해서 풍류를 모르겠는가 / 말없이 달이 뜨길 기다리면서 / 목젖 타고 흐르는 소주의 소리를 듣는 / 한 자락 풍류를 어찌 버리겠는가.
이승수 | 경희대 연구교수
경향신문,2008.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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