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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과 소설의 향기/문학이태어난자리

[문학이 태어나는 자리](27) 고독

by 골든모티브 2008. 7. 19.

[문학이 태어나는 자리](27)

 

고독-선택의 순간 남겨진 외톨이의 처절한 독백

 

지난해 덴마크의 연극 배우 카이 에릭 브레드골트가 한국을 찾았던 결정적인 이유는 김홍도의 풍속화 ‘서당’에서 느낀 동질감 때문이었다. 그는 선생과 아이들이 웃고 있는 가운데 혼자 울고 있는 아이에게서, 어릴 때부터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고 방황했던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고 했다. 이제껏 관습적으로 웃고 있는 아이들이나 선생의 처지에서 그림을 보아왔던 우리와는 사뭇 다른 입장이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패거리가 되어 울고 있는 한 학동을 조롱해왔고, 이러한 태도가 오늘날 우리 학교의 현실을 만든 것인지도 모르겠다.

일본의 대표적 우익 작가였던 미시마 유키오(三島紀由夫, 1925~1970)의 ‘금각사’(金閣寺, 1956)는 중의 아들로 몸이 허약했던 미조구치(溝口)의 성장 이야기다. 미조구치는 심한 말더듬이였다. 그는 말을 하려고 할 때마다 첫 발음이 나오지 않았다. 최초의 발성은 바깥 세계의 문을 여는 열쇠였는데, 그는 그 문을 열지 못했던 것이다. 아이들은 놀려댔고, 그는 자기 안에 갇히고 만다. 자기 안에서 그는 역사 속의 폭군에 마음이 끌렸고 원숙한 대예술가를 상상했다. 뒷날 그는 불멸의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금각사에 불을 지른다. 미조구치 이야기는 극단의 고독감이 어떻게 만들어지며 어떤 결과를 자아내는지를 잘 보여준다.
김홍도의 ‘서당’에서 울고 있는 학동과 ‘금각사’의 어린 시절 미조구치는 교실에서 여러 아이들의 조롱을 혼자 감당하고 있다는 점에서 똑같다. 울고 있는 학동의 존재는 웃음으로 버무려지면서 대상화되어버렸고, 미조구치는 열패감과 고독감 속에서 자기 안의 집착과 상상력을 증폭시켰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이들의 고독이 어떻게 해석되고, 또 어떻게 발전하는가는 별개의 문제이다. 우리는 그 시비와 선악을 따지기에 앞서, 고독 그 자체에 더 주목할 필요가 있다. 벽안의 이방인에 의해 그림 속에서 울고 있는 학동의 고독이 발견되었다는 것은, 우리가 사회 또는 교육 현상의 하나인 소외와 고독에 무심했다는 방증은 아닐까?

연대감이 끊어지고 소속감이 깨지며 혼자 남는 순간 자신과 세상은 온전한 모습을 드러낸다. 우리는 어느날 불쑥 나타난 자신을 앞에 두고 속삭이듯 말을 건넨다. 성큼 내 앞을 가로 막아선 세상은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문학이란 그때 자신에게 속삭인 말씀이고, 세상이 들려준 이야기다. 그래서 자기 호흡소리를 벗 삼아 뛰는 마라토너, 외줄기 길, 조각구름 한 점, 들판의 한 그루 나무, 작은 암자의 수행자, 승부의 분수령에서 투수 교체를 고민하는 야구 감독, 수술실에 들어가는 환자, 링 위의 격투기 선수, 여행 가방을 끌며 혼자 내린 여행객 등은 모두 문학의 표상이다. 고독에서 태어나지 않는 문학은 없다.

<일러스트 | 김상민기자>


천제의 아들이요 하백(河伯)의 외손인 주몽은 신격(神格)이다. 주몽과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유리는 반인반신(半人半神)이다. 불우하게 어린 시절을 보낸 유리는, 아버지가 떠나면서 남긴 수수께끼를 풀어 아버지도 만나고 왕위도 잇는다. 하지만 이런 유리도 두 아내의 다툼을 말리지 못했고, 치희가 떠나간 자리에서 암수 어울리는 꾀꼬리를 보며 회한에 젖는다.

포르릉 나는 저 꾀꼬리 / 암수 서로 어울려 나네. / 나는 이리 홀로 남았으니 / 누구와 함께 돌아갈거나. (編編黃鳥, 雌雄相依. 念我之獨, 誰其與歸.) ‘황조가’(黃鳥歌)

이 노래의 시발점은 이별이지만, 무게 중심은 3구에 드러나는 고독감에 놓여있다. 신의 아들이자 일국의 제왕인 유리도 한 여인이 떠나고 남긴 자리의 공허감을 이기지 못해 한탄조의 노래를 불렀다. 그의 아버지는 그렇지 않았다. 태어날 때도, 어머니 곁을 떠날 때도 주저함이 없었으며, 떠난 뒤에도 두고 온 아내를 그리워하는 감정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하늘의 뜻을 구현하는 신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의 피를 받고 태어난 유리에게는 고독감이 밀려왔으며, 그는 그 감정을 이기지 못해 노래를 불렀다.

고독은 사람의 숙명이고, 따라서 문학은 사람의 혈연이라는 사실을 ‘황조가’는 보여준다. 문학사는 이 명제의 부연과 변주의 과정이다. 매창(梅窓)의 “거문고에 강남곡을 얹어보지만, 내 그리움 물어줄 사람이 없네.”(綠綺江南曲, 無人問所思.)는 버려진 여인의 외로운 심사를 표출한 것이다.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 조용히 울고 있었다.”(신경림, ‘갈대’)나, “울지 마라 /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정호승, ‘수선화에게’)는 존재론적 고독을 노래한 것이다. “해삼 한 토막에 / 소주 두 잔 / 이 죽일 놈의 고독은 취하지 않고.”(이생진, ‘고독’)는 고독이 인생과 쌍생아임을 갈파한 것이다.

물나라에 가을빛 저물어가니 / 추위 놀란 기러기 떼 진을 쳐 높이 나네. / 시름에 이리저리 잠 못 드는 밤 / 새벽달 활과 칼을 비추어드네. (水國秋光暮, 驚寒雁陣高. 憂心輾轉夜, 殘月照弓刀.) ‘한산도야음’(閑山島夜吟)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戍樓)에 홀로 앉아 / 긴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차에 / 어디서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

이순신의 작품이다. 휘하의 장졸들과 생사를 함께하되 전략을 세우고 판단을 내리는 일을 함께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의견은 나누되 결정은 혼자서 해야 한다. 내 생각의 한 치 어긋남은 군사들의 죽음으 로 이어지고, 국가의 위기로 치달을 것이다. 높이 줄지어 나는 기러기 떼는 군대의 진을 연상시키고, 새벽달은 방에 들어 활과 칼을 골라 비추며, 어디선가는 전장의 신호음인 뿔피리 소리가 울려온다. 전략 수립에 골몰한 장수의 눈에 들고 귀에 들리는 것 모두 군사의 일이 아님이 없다. 밤이 깊어갈수록 장수의 머릿속은 맑아진다. 이 시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진중 장수의 마음을 얻어야 한다.

영국의 비평가 콜린 윌슨은 앙리 바르뷔스의 소설 ‘지옥’에 나오는 한 구절 “나는 너무 깊이 그러면서도 너무 많이 보는 것이다”를 주목하여 아웃사이더(방외인)의 특질을 집어낸 바 있다. 그에 따르면 아웃사이더란 깨어나 질서의 이면에 감추어진 혼돈을 본 자이다. 이들은 진실을 말하는 순간, 애꾸눈의 나라에서 두 눈을 가진 사람처럼 비정상적인 고독자가 될 수밖에 없다. 무당이 신과 소통하면서 사람들 사이에서 외롭듯, 남들이 보지 못하는 진실이 눈에 보이는 사람은 외톨이가 될 수밖에 없다.

장 타루는 의사 리외를 도와 페스트 환자 구호에 전념하는 한편, 페스트 유행 초기부터 도시 사람들의 미묘한 변화를 예의 주시하여 꼼꼼하게 기록한다. 사람들은 그가 어디서 왔고, 왜 그렇게 구호 활동에 열심인지 모른다. 어느날 타루는 리외에게 고백한다. 그는 어린 시절 ‘피고’라는 추상적 이름에 갇히지 않은 ‘살아있는’ 죄인의 모습을 보았고, 아무렇지도 않게 사회의 이름 아래 그의 죽음을 요구하는 검찰차장 아버지의 목소리를 듣고 충격에 빠졌다. 이후 그는 살아있는 동안 자기도 모르게 수천 명의 죽음에 동의했고, 그러한 죽음을 가져오게 했던 행위나 원칙들을 선(善)이라고 인정함으로써 죽음을 야기하기조차 했다는 것을 깨닫고 괴로워했다. 사람들은 자칫하면 잠시 마음을 놓고 있는 동안에 남의 얼굴에 입김을 뿜어서 병균을 옮아주고마는 페스트에 걸려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페스트균에 감염되고 또 전염시킨다. 여기서 페스트는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사회의 이론과 도덕과 관습을 상징한다. 페스트에 걸린 병자들처럼, 온전하게 보이는 사람들은 기실 폭력을 정당화하고 살인을 미화하는 관념에 젖어있는 것이다. 장 타루는 이를 깨닫고 그러한 행위에 동참하기를 거부했다. 하지만 그에게 돌아온 것은 사회로부터의 추방과 고독이었다. 사람들은 표면에 만족할 뿐 굳이 깊은 진실을 알려고 하지 않는다. 더 절망적인 것은 바로 그들이 권력을 가지고 역사를 만들어간다는 사실이다. 장 타루는 그 거대한 힘과 싸우기로 한다. 그는 끝내 페스트에 걸려 죽는다. 이는 깊은 진실을 본 개인의 패배를 의미한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리외에게 전해졌고, 리외는 그 사실을 기록한다. 그는 승리하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전적으로 패배한 것도 아니다.

카뮈의 ‘페스트’(1947) 이야기다. 불가항력의 페스트에 대하여 무력하지만 성실하게 맞서는 장 타루와 리외의 이야기는, 그럴 듯한 논리로 인류에게 내면화되어 있는 폭력과 착취와 살인을 인지하고 거기에 맞서는 것이 얼마나 외롭고 힘든 일인지를 잘 보여준다. 비슷한 시기 김수영은 “자유를 위해서 / 비상하여본 일이 있는 / 사람이면 알지 … 어째서 자유에는 / 피의 냄새가 섞여있는가를 / 혁명은 / 왜 고독한 것인가를”(‘푸른 하늘을, 1960)이라고 노래했다. 사람들은 자유에서 자유를 볼 뿐이다.

온갖 연줄이 판치고 패거리가 지배하는 사회이다. 문학판도 예외가 아니다. 대부분의 문학인들은 관계와 연대를 중시하는 관습 속에 함몰되어 있다. 떼로 몰려다니며 자기들끼리 치켜 주고, 또 끼리끼리 어울리며 서로를 위로하고 불만을 공유한다. 그러니 거기서 나오는 문학이래야 그만그만한 재담이나 덕담에 지나지 않는다. 얄팍한 재주가 거래되고 가벼운 상상력이 난무한다. 말의 무게를 떨어뜨리는 것도 문학이고, 말의 무게를 늘리는 것도 문학이다. 문필을 잡은 이라면 독자와 출판사와 평론가와의 안이한 연대를 끊고 홀로 자기 속에 침잠하여 사유를 단련하고 도서관에 파묻혀 공부를 할 때이다.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아이, 자신의 호흡을 벗삼아 뛰는 마라토너, 연인의 떠난자리에 남은 공허감, 결전을 앞둔 장수의 마음, 모두가 좋다는 것을 나쁘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 불가항력 앞에 무기력한 좌절 … 인간에게 고독은 숙명이다

<이승수 | 경희대 연구교수><시리즈 끝>경향신문,2008.7.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