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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과 소설의 향기/문학이태어난자리

[문학이 태어나는 자리](5) 호기 -세상에 이루지 못할 일 무엇이랴

by 골든모티브 2008. 2. 8.

[문학이 태어나는 자리](5)

 

{호기} - 세상에 이루지 못할 일 무엇이랴

삶은 고단하기만 하다. 뜻대로 되는 일은 없고 눈치 볼 것은 왜 그리도 많은지한 없이 초라해지고아무에게도 위로 받지 못 할때 산에 올라보라. 세상을 굽어보는 호연지기의 순간 삶은 새로워지고 그 삶에서 문학이 숨 쉬리라.

시진(柴進)의 집에 식객으로 있던 무송(武松)은 고향의 형을 보러 길을 나섰다. 고향 마을로 가기 위해서는 경양강(景陽崗)을 넘어야 했다. 마침 고개 아래 주막 앞에 주기(酒旗)가 흔들리는데, 깃발에는 ‘삼완불과강(三碗不過崗)’이라 씌어 있었다. “세 사발을 마시면 고개를 넘지 못한다”는 뜻이다. 무송은 아랑곳하지 않고 술을 시키고 안주로 소고기 두 근을 주문했다. 무송은 석 잔을 마시고 술을 더 요구했다. 주인이 난색을 표하자, 무송은 얼굴을 부라리며 기어이 고기 두 근 안주에 남은 술을 모두 마신 뒤 호기롭게 문을 나섰다. 그 다음 술 취한 무송이 호랑이를 때려잡은 일은 ‘수호전’을 읽은 사람이면 누구나 아는 일이다.

7, 8년 전인가, 한겨울 밤에 폭설이 내려 그만 성남에서 버스가 끊기고 말았다. 광주 집에 가기 위해서는 갈마치를 넘어 40리를 걸어야 했다. 잠시 하늘을 보며 투덜대던 나는 인근 해장국집에 들어가 “여기 순대국밥 하나에 소주 한 병!”을 호기롭게 외쳤다. ‘삼완불과강’의 금기를 어기며 술을 마시던 무송의 호기를 흉내낸 것이다. 소주 몇 잔으로 호기가 등등해진 나는 천지간에 독행(獨行)하는 기분으로 눈 쌓인 밤길을 세 시간 넘게 걸어 집에 도착했다. 범을 잡지는 못했지만 그때 내 기개는 완연 호걸의 그것이었다. 나는 옛 이야기의 까만 글자들을 보았을 뿐인데, 삶의 마디마디마다 소설 속 인물들이 내 안에서 살아나기도 하고 내 옆을 나란히 걸으며 의기를 독려하기도 한다. 묘한 일이다.

정몽주(1337~1392)는 극심한 혼란의 시기인 고려말, 수차례 전쟁에 참여하고 도합 여섯 차례나 외교 사행을 떠났던 풍진남북의 경륜가였다. 그는 지사이기 전에 굳세고 시원시원한 호걸의 면모가 강하다. 바닷길로 명나라 남경에 사신 갔을 때 예부의 관리에게 준 시는 “남아는 평생토록 먼 노닒 사랑하니, 타향에 오래 머묾 무엇을 탄식하리”로 시작하여 다음 구절로 마무리된다.

때로 성남 저자에서 술을 마시면 時來飮酒城南市
호기가 온 중국을 덮고도 남지요 豪氣猶能塞九州

기상이 이만하면 맹자가 말한 바 나약한 자를 붙들어 세울 만하지 않은가? 내가 병든 나뭇잎처럼 생명이 부대낄 때 한잔 술을 청할 만하지 않은가? 내가 한없이 초라해지고 내 삶이 끝없이 추락해가는데 수십억 누구에게서도 위로받지 못해 외로울 때, 우리에겐 천고 이전의 호걸 친구들이 필요하다.

조선후기의 여러 야담들은 임형수(1504~1547)에 관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임형수가 이황(1501~1570)과 같이 홍문관에서 근무했을 적의 일이다. 어느 날 밤 입직하던 임형수는 술에 취해 이황에게 말했다. “자네도 남아의 기이하고 장쾌한 일을 아는가?” 퇴계는 빙그레 웃으며 말해보라고 했다. 임형수는 취기가 도도하여 말했다.

“함박눈이 펑펑 쏟아질 때 검은 담비 갖옷을 입고, 허리에는 긴 백우전(白羽箭)을 차고, 어깨에는 백 근짜리 각궁(角弓)을 멘 채 철총마를 타고 말을 달려 산골짜기로 들어가면 만 리 바람이 몰아쳐 나와 산의 온갖 나무들이 흔들리는데, 갑자기 송아지만한 멧돼지가 길을 잃고 달아나면 살을 먹여 쏘아 죽이네. 허리춤에서 칼을 뽑아 배를 가르고, 긴 꼬챙이에 고기를 꿰어 불에 구우면 기름과 피가 뚝뚝 떨어진다네. 이때 호상(胡床)에 걸터 앉아 고기를 잘라 씹어 먹고는 큰 은사발에 자하주(紫霞酒)를 가득 부어 한 입에 쭈욱 마시네. 날이 어스레하여 고개를 들어보니 눈보라가 몰아쳐 술 취한 얼굴에 달려든다네. 이러한 맛을 자네가 어찌 알겠는가?”

임형수는 이렇게 말하고는 무릎을 치며 껄껄 웃었다.

이완(1602~1674)이 소년 시절 사냥을 하다가 길을 잃고, 잘못 산적의 집에 들었다. 그는 두려움에 떠는 여인의 무릎을 베고 누워 희롱하다가 돌아온 산적의 손에 잡혀 대들보에 매달리는 신세가 되었다. 산적은 갓 잡아온 사슴 고기를 구워 술을 마시다가 이완을 힐끗 보고는, 곧 죽을 놈이지만 맛이나 보게 해준다며 칼 끝에 고기를 찍어 주었다. 이완은 태연자약하게 고기를 받아 먹었다. 산적은 이완의 기개에 마음이 울려 묶은 것을 풀어주고 술과 고기를 함께 먹으며 의형제를 맺었다. 산적은 뒷날 포도대장이 된 이완에게 발탁되어 나라에 쓰였다고 한다. 또한 조선후기 야담에 나오는 이야기다. 글만 보아도 취기 가득하여 걸걸한 임형수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산중에서 기름이 뚝뚝 떨어지는 사슴고기를 안주삼아 술을 마시는 이완과 산적의 모습이 떠오른다. 나도 모르게 입맛이 다셔지며 장한 기운이 솟아오른다. 이만하면 삶이 구차스럽지 않다. 머릿속에 가득하던 시름들이 일순 무색해진다. 옛 사람들도 이들의 호기로 고달픈 삶을 달래면서 끊임없이 이야기를 전해왔던 것이다.


 

 

김종서(1390~1453)가 함경도 절제사 시절 지은 것이다. 잎 다 진 나뭇가지에 북풍이 사정없이 몰아치고 눈 위에 비치는 달빛은 얼음처럼 차갑다. 나라 끝 국경인지라 공기에는 전선의 긴장감이 팽팽하다. 이때 성곽의 장대 위에 장검을 짚고 서서 두만강 너머를 바라보니 온 천하에 거칠 것이 없다. 세상에 이루지 못할 일이 무엇이랴!


 

일러스트 | 김상민기자


 

  조선조 지식인들에게서 절대적 존숭을 받은 주희(朱熹·1130~1200)는 38세이던 1167년 가을 벗 장식(張·1132~1180)을 찾아 장사(長沙)로 여행을 했다. 다섯 달이나 걸린 긴 여정이었다. 11월에는 ‘구운몽’의 무대이기도 한 남악 형산(衡山)의 축융봉(祝融峯·해발 1290)에 올랐다. 산 꼭대기에서 탁주 몇 사발을 마시고 호기가 발동 나는 듯 산을 내려왔다. 그리고 시 한 수를 남겼다.

만리라 먼길 와서 긴 바람에 몸 맡기니我來萬里駕長風
깊은 골 층층 구름 가슴을 씻어주네 絶壑層雲許蕩胸
막걸리 세 사발에 호기가 일어나서 濁酒三杯豪氣發
목청껏 읊조리며 축융봉 날아 내려왔네 朗吟飛下祝融峰

일개 서생이라도 천근의 무게와 만리의 시야를 갖추면 마치 태산처럼 일월과 호흡을 함께 하게 된다. 글만 읽는 일이야 참으로 작은 일에 지나지 않는다. 축융봉을 가슴에 품은 주희가 산에서 내려온 뒤 하산주(下山酒)를 걸렀을 리 없다. 조선의 지식인들은 아마도 이런 면모 때문에 주희를 더 좋아했던 것은 아닐까?

몇 해 전 조선시대 연행로를 답사할 때의 일이다. 요동벌이 끝나는 지점에서, 오랜 세월 중국의 북진(北鎭)이었던 의무려산(醫巫閭山)에 올랐다. 홍대용의 ‘의산문답(醫山問答)’이 탄생한 곳이다. 꼭대기에 올라보니 동쪽에는 우리가 달려온 요동벌이 끝없이 펼쳐져 있고, 북쪽에는 산의 능선들이 파도치는데 그 너머에는 몽골 초원이 펼쳐져 있다. 남쪽에는 아스라이 발해가 눈에 들어온다. 서쪽은 북경으로 가는 길인데 점점이 산들이 솟아 있다. 구름은 몸을 감싸고 있는데, 손만 뻗으면 하늘을 잡을 수 있을 듯하다. 동서남북과 천지상하를 차례로 돌아보니 절로 통쾌한 마음이 들었다.  다산의 ‘불역쾌재행(不亦快哉行)’을 흉내 내 다섯 줄 ‘호기가’를 읊조렸다.

의무려산 꼭대기에 주연을 펼쳐놓고 / 요동벌 발해 신을 한 자리에 불러 모아 / 미주(美酒) 삼백 잔을 나누어 마신 뒤에 / 호기가 한 곡조를 목 놓아 부른다면 / 그 또한 통쾌하지 아니할까

보통 사람들의 간과 쓸개는 20대 후반부터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해서 50쯤 되면 거의 남는 게 없다. 뜻대로 되는 일은 없고 세상은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돌아간다. 눈치 볼 곳은 또 왜 그렇게도 많은지.

너무 작아진 자신을 견딜 수 없으면 주말 높은 산에 올라 세상을 굽어보고 한 곡조 호기가를 불러볼 일이다. 초저녁 비감한 심정으로 조촐한 술상을 받았을 때 옛 이야기 속 호걸들을 하나하나 불러내어 술잔을 주고받을 일이다.

문학이 그 삶을 새롭게 하고, 다시 그 삶에서 문학이 태어나리라. 옛 말에 ‘문정상생(文情相生)’이라 했다.

< 이승수 | 한양대 강사 〉

경향신문,입력: 2008년 02월 0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