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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과 소설의 향기/월북문인 친일작가

미당과 친일 문학작품

by 골든모티브 2008. 1. 16.

[미당 친일 새얼굴 드러나]


미당의 친일 문학  

                         

  미당 서정주는 한국 최대 최고의 시인이다. 시인 고은이 아직 미당의 시 그늘에 푹 파묻혀 있을 때 그를 가리켜서 말한 ‘그는 또 하나의 정부’라는 수식어가 크게 과장된 말이 아닐 정도로, 미당의 시인된 이력과 그의 작품은 이미 하나의 ‘고정’이자 살아 있는 ‘문학사’가 된지 오래다.

  그러나 그의 시 “국화 옆에서”는 줄줄 외면서도, 또 ‘스물 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팔 할이 바람’이라는“자화상”의 첫 구절은 곧잘 인용하면서도, 그가 일제 말기에 그 눈부신 시적 재능을 일제에 대한 찬양과 황국 신민화 정책의 선전에 기꺼이 쏟아 부었던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주 드물다. 또한 조선 청년들에게 일본을 위한 전쟁에 나가서 싸우다 죽을 것을 강권하고, 일본 군대의 꽁무니를 쫓아다니며 종군기사를 썼던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도 거의 없다. 더러 있었다고 해도, 해방 이후에 일제 잔재 청산 작업이 한 번도 제대로 이루어진 적이 없고, 또 미당이 지금 누리고 있는 문단적 지위와 업적의 광휘, 그리고 그의 문하서 배출된 수많은 후배와 제자들의 엄호에 가리어 미처 제대로 드러날 기회가 없었다.

 


 

 

미당 서정주의 친일 문학작품 세 편이 새롭게 발굴되었다.

국문학자 김재용 교수(42·원광대 한국어문학부)는 다음주에 나올 <실천문학> 여름호에 서정주의 시 <헌시>와 <무제>, 그리고 산문 <경성사단대연습종군기>를 발굴, 소개했다. 두 편의 시는 타계한 친일문학 전문가 임종국의 저서 <친일문학론>의 부록인 `관계작품연표'에 제목만이 실려 있던 것으로, 작품이 소개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또 <경성사단 대연습종군기>는 그 동안 존재조차 알려지지 않았던 글로 이번에 처음 공개되는 것이다. 이 가운데 <무제>는 일본어로 되어 있고, 나머지 두 편은 한글로 쓰여졌다.

<매일신보> 1943년 11월 16일 치에 실린 <헌시>는 학병 출정을 권하는 작품이다. “정면에서 눈을 돌릴 수는 없느니라./그리움에 젖은 눈에 가시를 세워/사랑보단 먼저 오는 원수를 맞이하자.”고 시작되는 이 시는 미당 특유의 어투에 이미지와 운율이 효과적으로 구사된 `수작'이다. 그러나 “교복과 교모를 이냥 벗어 버리고/모든 낡은 보람 이냥 벗어 버리고//주어진 총칼을 손에 잡으라!/적의 과녁 위에 육탄을 던져라!”는 `사주'는 얼마나 끔찍한 아름다움인가.


<국민문학> 1944년 8월호에 창씨개명한 미당의 이름 `달성정웅(達城精雄)' 명의로 발표된 <무제>는 `사이판섬에서 전원 전사한 영령을 맞이하며'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시는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이 옥쇄한 격전지들을 거명하며 전사자들을 향한 슬픔과 공감의 마음을 격정적인 어조로 노래한다.

“어머니여. 저곳이리라, 그대가 낳은 내 동포의 넋들이 모두 돌아올 곳은/앗츠에서 매킨·타와라에서 또한 사이판에서/모두 전사하여 돌아올 곳은/저곳이리, 저곳이리 아아, 견딜 수 없는 색으로 물들어”

시는 전사자들의 뒤를 따르겠노라는 기껍고도 결연한 각오를 밝히며 끝을 맺는다.

“아아, 기쁘도다 기쁘도다/희생제물은 내가 아니면 달리 없으리.//어머니여. 나 또한 창을 들고 일어서리/배를 띄우리/사이판으로!/매킨·타와라로!/앗츠로!”

역시 `달성정웅' 명의로 <춘추> 1943년 11월호에 실린 <경성사단대연습종군기>는 경성사단의 전북지역 훈련 현장을 따라가서 쓴 글이다. 서정주는 훈련 종군기를 두 편 썼는데, 그 중 한 편은 기왕에 알려져 있었다.

김재용 교수는 <실천문학>에 서정주의 친일문학에 대한 별도의 논문을 실었다. `전도된 오리엔탈리즘으로서의 친일문학'이라는 제목의 이 글에서 김 교수는 미당의 친일문학은 일제가 주창한 대동아공영권론에 대한 자발적 동의에 바탕한 것으로, 그에게 있어 전쟁 찬미와 동양적 세계의 추구는 다른 것이 아니었다고 지적했다.

소설가 조정래(59)씨 역시 같은 잡지에 `용서는 반성의 선물'이라는 제목으로 미당의 친일문학에 대한 글을 기고했다. 이 글에서 그는 자신에게는 학교 스승이자 부인 김초혜 시인을 등단시킨 은사이며 두 사람 결혼식의 주례였던 미당과의 남다른 인연을 설명한 뒤, 생전에 그로부터 공개적인 사죄의 말을 받아내려 했다가 실패한 일화를 소개한다. 결국 죽을 때까지 진심에서 우러난 사과를 하지 않음으로써 미당은 자신이 매듭지었어야 할 역사의 짐을 후세에게 떠넘기고 말았다는 것이 조씨의 결론이다.

최재봉 문학전문기자/한겨레,2002.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