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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의 향기/詩와 시인

민족시인, 저항시인 이육사

by 골든모티브 2008. 1. 9.
민족시인, 저항시인 이육사
 
 

독립운동가 이육사
 
[1904.4.4 ~ 1944.1.16]
 


 
 
평북 출신으로 어릴적 안중근 의사의 이등박문 처단에 크게 감동되다
 
 
"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白馬)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이 광야(曠野)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

육사(陸史)의 시(詩) <광야>(曠野)의 한 귀절이다. 복국의식(復國意識)과 광복(光復)의 열의(熱意)속에 점철된 삶을 영위한 선생은 의열단(義烈團)에 가입, 항일투쟁(抗日鬪爭)으로 무려 17회에 걸쳐 옥고(獄苦)를 치렀으며 민족 저항시인으로서 민족혼을 일깨웠다.
 
경북 안동 출신으로 신의와 의리가 강한 선비로 알려지다
 
 
육사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원촌리 - 오른쪽에 낙동강이 보인다. 지금 이 원촌리에 이육사문학관이 건립되었다.
 
 
육사의 여섯형제가 태어나고 자랐던 원촌리 집 - 지금은 안동댐 수몰로 사라지고 없다.
 
1904년 4월 4일(음) 경북 안동군(安東郡) 도산면(陶山面) 원촌리(遠村里) 881번지에서 아은처사(亞隱處士)인 부친 이가호(李家鎬)와 모친 선산인(善山人) 허형(許衡)의 딸 허길(許佶) 사이에서 5형제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진성(眞城)이며 본명은 원록(源祿)이나 후에 원삼(源三) 또는 활(活)이라 하였으며 자(字)는 태경(台卿), 아호는 육사(陸史)이다.
 
어려서부터 형제지간의 우애가 지극하였으며 용모는 청수하고 깨끗한 선비형으로서 한번 사귀면 생사를 같이 할 만큼 신의와 의리가 강하였다.
 
12살이 되던 해에 조부 이중직(李中稙)이 숙장(塾長)이었던 예안보문의숙(禮安普文義塾)에서 한학을 배웠다.
 
17세가 되자 대구로 이사하여 시내에 있는 교남학교(嶠南學校)에서 신학문을 배우고 이듬해에 영천에 살고 있던 안일양과 혼인하였다.
 
영천에 있는 백학서원(白鶴書院)에서 학문을 연수하였으나 끊임없는 미지의 세계를 동경하여 1923년에 일본에 건너가 1년여 간 동경에 있는 대학을 다니다가 1925년에 귀국하였다.
 
 
육사의 최초 시집
 
 
 
(왼쪽) 육사 생가터의 육사시비-청포도. (오른쪽) 안동댐의 육사시비-광야. 
 
의열단원 윤세주에 감화되어 의열단에 가입 활동중,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으로 붙잡히다
 
 
윤세주는 조선의용군의 가장 신뢰받는 지휘자로 존경을 받았으며 1942년 중국 태항산에서 일군의 40만 병력과 최후결전으로 장렬히 전사했다.
그 당시 중국에서 국내에 들어와 일제(日帝) 주요기관 등을 파괴, 활동을 하다가 붙잡혀 대구형무소에서 옥고(獄苦)를 치르던 윤세주(尹世冑)의 의열투쟁에 큰 감화를 받은 선생은 형 원기(源琪), 동생 원유(源裕)와 함께 의열단(義烈團)에 가맹(加盟)하였다.
 
당시 의열단(단장 김원봉)은 중국 길림(吉林)에서 북경(北京)으로 이동하여 의열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선생은 북경에 왕래하며 국내정세를 보고하고 군자금(軍資金)을 전달하였다.
 
그러던 중 1927년 10월 18일 장진홍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이 일어나자 일경은 주모자를 체포하기 위해 경북의 경찰, 헌병, 관공서 직원 등을 총동원하여 과거에 조금이라도 의심이 있던 사람들을 모두 수색 검거하게 되자 선생은 형, 아우 등과 함께 붙잡혀 대구지방법원에 송치되었다. 이때 미결수 번호가 64번이었는데 이때 수감번호를 따서 호를 육사(陸史)라 하였다.
 
일경은 선생의 형을 이 사건의 지휘자로, 선생은 폭탄운반자로 그리고 동생은 폭탄상자에 글씨를 쓴 것으로 조작하기 위하여 온갖 고문을 가하였으나, 일본 대판(大板)에서 장진홍 의사가 붙잡히게 되자 2년 4개월여 간의 옥고를 끝으로 석방하였다. 출옥후 선생은 윤세주가 경영하는 『중외일보』의 기자로 활동하면서 청년지도 등에 힘썼다.
 
선생은 모진 고문의 후유증으로 병을 얻게되어 요양하고 있을 때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다시 붙잡혔으나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났다.
 
이후 선생은 북경으로 가던 중,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심양(瀋陽)에서 김두봉을 만나 독립운동 방략을 논의한 후 다시 귀국하였다.
 
 
육사의 형 원기가 이영우에게 1931년 1월에 육사와 원일이 대구경찰서에 구금되었다는 소식과 도움을 요청한 편지.
 
노신(魯迅)을 만나고 남경(南京) 조선혁명간부학교에 입학하다
 
1932년 6월초 중국 북경에 가서 만국빈의사(萬國殯儀社 : 중국 혁명원로인 楊杏佛 장례식)에서 노신을 만나게 되어 동양의 정세를 논하였으며, 후일 노신이 사망하자 『조선일보』에 추도문을 게재하고 그의 작품 <고향>을 번역하여 국내에 소개하였다.
 
 
1932년에 독립을 위한 무장 투쟁단체인 의열단은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설립한다. 이육사는 제1기생 26명 가운데 한 명이다.
 
선생은 북경에서 본격적으로 무장항일운동에 뛰어들기로 결심하고 1932년 10월 22일 중국 국민정부 군사위원회에서 운영하는 간부훈련반인 조선군관학교(교장 김원봉, 남경 소재)에 입교하였다. 이 훈련반은 김원봉이 황포군관학교 재학당시 장개석에게 요청하여 설치한 조선 청년간부 속성 양성기관이었다.
 
실전에 응용할 수 있는 능력배양에 중점을 두고 총기사용법 등 군사훈련과 정치, 경제, 철학 등 정신무장과 교양 함양을 위한 과목으로 편성하였으며 훈련기간은 전시(戰時)를 고려하여 6개월 간으로 하였다.
 
교관은 한국인 20여 명으로 편성하였으며, 지원부서에 약간명의 중국 군인이 파견되었다. 교생 전원은 합숙, 수용되고 교내에서는 상관의 명령에 절대 복종토록 하였다.
 
 
1934년 6월 20일자로 서대문형무소에서 작성된 신원카드와 사진.
 
선생은 이 학교 제1기생 정치조에 소속되어 6개월 동안 비밀통신, 선전방법, 폭동공작, 폭파방법 등 게릴라 훈련을 받고 1933년 4월 23일 수료한 후 상해, 안동, 신의주를 거쳐 귀국하여 차기 교육대상자 모집, 국내 민족의식 환기, 국내정세조사 등의 비밀임무를 띠고 활동중 1934년 5월 22일 서울에서 일경에게 붙잡혔으나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났다.
 
민족시인으로서 <청포도> 등 30여 편의 시를 발표하여 민족의식을 일깨우다
 
이때 선생은 건강이 매우 악화되어 앞으로 진로에 대한 인간적인 고뇌와 갈등을 하게 되었다. 그것은 의열단의 밀명(密命)을 계속 수행할 것인가, 아니면 광복을 위한 투쟁에서 이탈할 것인가 하는 결단이었다.
 
마침내 선생은 시와 글을 통하여 민족의식을 깨우치고 일제에 대한 저항정신을 복돋는다는 새로운 항일의 길에 나서기로 결심하고 문인으로써 새출발하기로 결심하였다.
 
이후 선생은 정치, 사회분야에 걸쳐 폭넓은 작품생활을 하여 1935년 『개벽지』(開闢誌)에 <위기에 임한 중국 정국의 전망>, <중국청방비사>(中國靑幇秘史) 등을 발표하였다.
 
다음해인 1936년에는 처음으로 <한개의 별을 노래하자>라는 시를 발표, 시인으로서 출발하여 <해조사>(海潮詞), <노정기>(路程記) 등 산문을 발표하였으며, 1938년에는 <강 건너 간 노래>, <소공원> 등의 시작품과 <조선문화는 세계문화의 일륜(一輪)>, <계절의 5월>, <초상화> 등 평론과 수필을 『비판지』, 『조선일보』, 『중앙일보』 등에 발표하였다.
 
 
(왼쪽) 초간본 『 陸史詩集』(1946)의 편자 이원조가 《自由新聞 》(1945. 12. 17)에 최초로 게재했던 육사의 유고시 「曠野」, 「꽃」.
(가운데) 육사의 유고시 「편복」 친필 원고.
(오른쪽) 육사의 유고시 「바다의 마음」 친필 원고.
 
이어 1939년에는 <절정>, <남한산성>, <청포도> 등의 시작과 <영화에 대한 문화적 촉망>, <시나리오 문학의 특징>과 같은 영화 예술부문의 평론을 『인문평론』, 『문장』 등지에 게재하였고 이어 1940년에는 <일식>, <청난몽> 등을 『인문평론』, 『문장』, 『냉광』 등 잡지에 발표하였다.
 
1941년에 들어서자 일제는 조선어말살정책을 강행하고 일본식 창씨를 강요하고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등을 폐간시키는 등 민족혼을 억압하는 상황하에서 선생의 건강은 아주 극도로 악화되었으나 문필생활은 의연히 계속되어 <파초>, <독백>, <자야곡> 등의 시를 지었으며, 중국인 호적이 쓴 《중국 문학의 50년사》를 초역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글을 발표하던 『문장』, 『인문평론』지 마저 일제에 의해 폐간되고 말았다.
 
1942년에는 사실상의 유고(遺稿)인 <광야>를 발표하는 등 시를 비롯하여 수필, 평론, 번역 등 매우 광범위한 문필활동을 계속하였다.
 
선생은 이와 같은 작품 활동속에서 다시 북경으로 갔다가 모친과 백형의 소상(小祥)으로 1943년 5월에 귀국하였으나 동년 7월 서울 동대문경찰서에 피체되어 북경으로 이송되었다.
 
한줌의 재가 되어 고국에 돌아오다

 
1944년 1월 19일에 이육사의 순국을 알린 부고 엽서이다. 
육사는 1944년 1월 16일 베이징 일본총영사관 감옥에서 순국하였다. 육사와 같은 마을 출신이자 독립운동 활동을 하던 친척 이병희(여)가 육사의 마지막을 정확하게 증언해 주었다. 육사가 사망했으니 시신을 인수해가라는 연락을 듣고  이병희는 베이징 일본 총영사관 감옥으로 가서 관을 인수하고, 급히 빌린 돈으로 화장을 치렀다. 그 유골이 든 상자를 이귀례라는 친구집에 두었다. 순국 후 9일 지나 1944년 1월 25일에 육사의 동생 원창에게 넘겨졌다.
 
아! 천애(天涯)의 고아와 같이 일가친척 한사람 임종을 지켜주는 이 없이 이국(異國)에서 유명(幽命)을 달리 하였으니 그 슬픔을 어찌 말로 다 형언할 수 있으리요.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삼키며 유해를 받은 원창은 서울에 도착하여 미아리공동묘지에 안장하였으며 1960년 봄에는 선생의 유해가 고향 원촌으로 이장되어 낙동강을 바라보는 곳에서 고히 잠들게 되었다.
 
" 어데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 한발 재겨 디딜곳조차 없다."
<절정>에서
 
"거미줄만 발목에 걸린다 해도 / 쇠사슬을 잡어맨듯 무거워졌다."
<연보>에서
 
선생의 시에서 나타나듯 선생의 일생은 고난과 역경 그리고 광복의 열의와 복국의식(復國意識)으로 점철된 삶이었다. 무한한 사색과 영혼 깊은 곳에서 울어난 선생의 시문은 모든 사람의 심금을 울렸으며 이 민족에게 한없는 용기와 희망을 갖게 하였다.
 
무려 17회에 걸쳐 옥살이를 하면서도 오로지 독립을 위해 의열투쟁 대열에 앞장섰으며, 육신이 쇠약해지자 민족시인으로서 일제에 대한 저항의식을 불러일으키는 등 암흑기에 주옥같은 많은 작품을 남기셨다. 이제 선생의 위대한 이름은 영생불망(永生不忘)하리라.
 

출처 : 편안한 마음이 깃들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