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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의 향기/詩와 시인

시인을 섬기는 사회( 서정주, 김동리의 일화)

by 골든모티브 2008. 1. 11.
[조선데스크] 시인을 섬기는 사회
 
서정주, 김동리, 김훈, 김소월 일화

 


 

시인 서정주와 소설가 김동리는 시와 소설에서 각각 양대 산맥을 형성한 평생 문우였다. 젊은 시절 두 사람 사이에 있었던 일화는 문단에서 시와 소설의 차이를 설명할 때 자주 거론된다. 두 사람이 어느 날 술을 마셨다. 술이 거나해진 김동리가 "어젯밤 잠이 아니 와서 지었다"면서 자작시 한 편을 낭송했다. "벙어리도 꽃이 피면 우는 것을…"이라고 읊자 서정주가 무릎을 탁 치면서 탄성을 내질렀다. "벙어리도 꽃이 피면 우는 것을…이라. 내 이제야말로 자네를 시인으로 인정하겠네." 그러자 김동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이다 이 사람아. 내는 '벙어리도 꼬집히면 우는 것을'이라고 썼다." 순간 어이없는 표정을 지은 서정주가 술상을 내리치면서 소리쳤다. "됐네 이 사람아."

'벙어리도 꼬집히면 운다'는 소설가의 표현은 인과관계에 충실한 산문적 발상에서 나온 것이다. 사실 그것은 시적 표현이랄 수 없다. 그러나 시인의 귀에는 '벙어리도 꽃이 피면 운다'로 들렸다. 말 못하는 인간과 개화(開花)로 말하는 자연의 상응(相應) 관계를 노래한 기막힌 서정시로 들렸기 때문이다. 소설가의 입과 시인의 귀 사이에 일어난 이 기묘한 오해의 일화는 문학의 본질이 시성(詩性)에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사례로 종종 인용된다.

최근 100만부 판매를 돌파한 소설 '칼의 노래'는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작가 김훈은 처음에 '꽃은 피었다'로 썼다가 고치고, 고치기를 거듭했다고 한다. 시인 역시 조사 한 글자를 놓고 그렇게 고뇌에 빠진다. 김소월은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라고 노래했다. 소월은 '강변에 살자'라고 쓰지 않고, 조사 '에'를 생략했다. '에'가 빠짐으로써 이 시는 늘어지지 않고, 급격한 리듬 감각을 살려서 한 편의 노래가 됐다.

그렇게 한국어를 다듬어 빛나는 언어의 보석을 만들어내는 우리 시인들에게 2008년은 매우 각별한 해가 된다. 최남선의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1908년)가 발표된 것을 기점으로 삼을 때 올해는 한국현대시 100주년이 된다. 이를 맞아 조선일보는 현역 시인 100명으로부터 추천받은 현대시 100편을 매일 아침 독자들에게 소개하고 있다.

올해는 잘하면 시에 대한 국민적 관심을 높일 수 있는 기회다. 그러나 현대시 100주년을 기념하는 전국적 축제가 열릴 것이란 소식은 전혀 없다. 가난한 시인들이 모인 한국시인협회 같은 단체의 힘만으로는 어려운 일이다. 미국의 경우 해마다 4월이면 '전미(全美) 시의 달'(National Poetry Month)을 선포한다. 1996년부터 미국 시인 아카데미가 정부 기관과 언론·출판사의 후원을 받아 한 달 내내 시에 대한 국민적 관심을 높이는 행사를 갖는다. 지난해에는 15만 달러의 민간 기부금까지 걷혔다. 프랑스에서는 1999년부터 매년 3월이면 문화부와 교육부의 후원을 받는 시의 축제 '시인들의 봄'(Le Printemps des poetes)이 열린다.

새 정부 출범을 앞두고 '국민을 섬기는 리더십'이란 말이 자주 들린다. 지난 5년 동안 분열과 갈등을 조장하는 '거친 언어를 섬긴 리더십'에 시달린 국민들이다. 모국어를 섬기는 시인들로 하여금 정제된 언어의 미학을 되살리기 위해 시에 대한 국민적 관심을 높이면 어떨까. 현대시 100주년을 맞아 올 한 해 만이라도 시인을 섬기는 사회가 되도록 새 정부가 나서서 시의 축제를 꾸민다면 얼마나 좋으랴.
 
조선일보,박해현 문화부 차장 , 2008.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