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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의 향기/詩와 시인

박인환 - 목마와 숙녀

by 골든모티브 2008. 1. 19.

[시인공화국 풍경들] <31>

 

박인환의 '목마와 숙녀'


감상에 버무려 절망을 어루만지다
센티멘털 저니
이국에 대한 선망으로
궁핍한 시대를 살아가려한
문학청년의 내면적 풍경

 

박인환의 ‘목마와 숙녀’는 해방과 더불어 성년을 맞은 뒤 곧바로 참혹한 전쟁을 겪은 한 조선 청년의 내면을 보여준다. 이 시집을 뒤덮고 있는 죽음의 이미지는 시인이 살아낸 연대가 죽음의 연대였음을 증언한다. 


 박인환(1926~1956)의 20주기였던 1976년 3월 고인의 유족이 엮어 펴낸 시집에 ‘목마와 숙녀’라는 표제가 붙은 것은 자연스러웠다. ‘목마와 숙녀’는 박인환에게 호의적이었던 문학 동료들로부터 그의 대표작으로 꼽혀왔을 뿐만 아니라, 그보다 몇 해 앞서 전파를 타기 시작한 가수 박인희의 토크송을 통해 라디오 방송 청취자들에게 매우 친숙해진 터였기 때문이다.

 

“한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로 시작하는 이 작품의 감상적 시행들은 이 시를 알고 있는 사람들 대부분에게, 종이 위의 활자로서보다는, 그 시행들만큼이나 감상적인 배경음악과 거기 실린 박인희의 목소리로 기억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곧이곧대로 말하자면, ‘목마와 숙녀’(근역서재 간행)는 시인이 작고하기 한 해 전(1955년) 출간된 ‘박인환 선시집’(산호장 간행)의 개정판 격이라 할 수 있다.

 

‘박인환 선시집’의 수록 작품을 거의 고스란히 옮기고 거기 빠져 있던 작품 일곱 편을 보탠 것이 ‘목마와 숙녀’이기 때문이다. ‘박인환 선시집’이 시인 생전에 나온 유일한 시집이므로, ‘목마와 숙녀’는 박인환의 시를 얼추 망라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시인의 초기 작품인 ‘인도네시아 인민에게 주는 시’(1948)를 비롯해 몇몇 시가 빠져 이 시집이 박인환 시 전집이 되지 못한 것은 당시의 엄혹한 정치 상황에 대한 고려 탓이었을 것이다.

“전인민은 일치단결하여 스콜처럼 부서져라/ 국가방위와 인민전선을 위해 피를 뿌려라” 같은 선동이, 비록 시대와 대상을 달리해 발설됐다 하더라도, 유신 체제 아래서 버젓이 활자화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박인환이 누린 생애는 서른 해에도 채 이르지 못했고, 그의 작품 활동은 생애 마지막 열 해 동안 이뤄졌다. 물론 20대의 10년은 큰 시인이 되기에 짧은 기간이 아니다. 소월이 그것을 증명한 바 있다.

 

소월처럼 요절하지는 않았지만, 서정주나 이용악도 이미 20대에 커다란 시인이었다. 더 나아가, 아르튀르 랭보는 10대 후반 다섯 해의 작업만으로 큰 시인이 되었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타고난 재능이 필요하다.

누구나 소월이나 랭보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 재능을 타고나지 못한 시인에게는 이드거니 재능을 벼릴 시간이 필요하다. 박인환은 뒤쪽에 속했다.

 

연극이나 영화 쪽에까지 관심을 돌린 것을 보면 그는 장 콕토나 자크 프레베르처럼 대중적으로 영향력 있는 전방위 예술인이 되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하고(그의 시에 이진섭이 곡을 붙인 ‘세월이 가면’은 프레베르의 시에 코스마가 곡을 붙인 ‘고엽’ 만큼이나 시큼들큼하다), 한 산문에서는 위스턴 오든과 스티븐 스펜더를 향한 선망과 연대감을 내비치기도 했지만, 그에게는 이들에게 견줄만한 재능이 없었다.

더군다나 그는 이들처럼 고종명하지도 못했다. 재능의 모자람에다 요절까지 겹친 시인들도, 특별한 사회적 문화적 맥락의 도움을 받으면, (부당한) 문학사적 위세를 누리기도 한다. 이상(李箱)이나 윤동주가 그런 경우다. 그러나 박인환에게는 그런 요행도 없었다.

 

한국 시인으로서 박인환의 가장 큰 불행은, 그 세대 시인들에겐 흔한 일이었지만, 한국어가 서툴렀다는 점일 것이다. 그의 세대에 속하는 한국인들은 학교를 비롯한 공적 공간에서는 일본어를 사용하고 가정을 포함한 사적 공간에서는 조선어를 사용하는 비대칭적 이중언어 상태(다이글로시아)에서 지적 성장기를 보냈다.

말하자면, 문화적 언어적 양서류가 되기를 강요받았다. 이런 생태 환경에 잘 적응한 종(種)은 물에서도 뭍에서도 편안하지만,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 종은 뭍에서도 물에서도 불편하거나, 적어도 한쪽에서는 불편하다.

박인환은 이런 생태 환경에 충분히 적응한 양서류가 아니었다. 일본어에 대한 그의 감각은 확인할 길 없지만, 적어도 그의 한국어 감각은 문필가로 행세하기에 넉넉지 않았다.

 

‘박인환 전집’(1986, 문학세계사 간행)에 묶인 그의 조악한 산문들을 살피면, 그의 시가 드러내는 한국어의 생경함이 단지 시적 허용의 과감한 실천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박인환)는 일본말이 무척 서툴렀고 조선말도 제대로 아는 편은 못되었다”는 김수영의 비아냥은, 김수영 자신의 한국어가 썩 탐스럽지 않았다는 점에서 개운치는 않지만, 박인환의 조선말에 관한 한 중상모략이 틈었뇩?p> 시집 ‘목마와 숙녀’에 자주 나오는 외래어(나 추상적인 관념어를 포함한 이른바 ‘문명 어휘’)와 이국적 이미지들은 그의 서툰 한국어를 치장하면서(말하자면 이 박래어들은 그것들이 명사의 꼴을 취하고 있을 때도 사실은 ‘형용사’다) 그 한국어의 서?을 도드라지게 한다. 그런 설익은 관념 취향이, 한편으로는, 박인환의 시가 잠시동안이나마 누린 대중적 인기의 비결이기도 했을 것이다.

 

“신문지의 경사(傾斜)에 얽혀진/ 그러한 불안의 격투// 함부로 개최되는 주장(酒場)의 사육제/ 흑인의 트럼펫/ 구라파 신부(新婦)의 비명/ 정신의 황제!”(‘최후의 회화’)라거나, “대륙의 시민이 푸롬나아드하던 지난해 겨울”(‘불행한 샹송’), “실신한 듯이 목욕하는 청년/ 꿈에 본 <죠셉 베르네>의 바다/ 연체동물의 울음이 들린다/ 사나토리움에 모여든 숙녀들/ 사랑하는 여자는 층계에서 내려온다”(‘서정가’) 같은 시행에서는 유럽인으로 살고 싶었던 제3세계 청년의 허위의식이 씁쓸하게 감지된다.

 

이 한국 청년이 “나신과 같은 흰구름이 흐르는 밤/ 실험실 창 밖/ 과실의 생명은/ 화폐모양 권태(倦怠)하고 있다/ 밤은 깊어가고/ 나의 찢어진 애욕은/ 수목이 방탕(放蕩)하는 포도(鋪道)에 질주한다”(‘장미의 온도’)고 노래할 때, 청자(聽者)는 대뜸 그의 한국어 교사가 되고 싶은 유혹에 빠진다. 한국어 명사 ‘권태’에는 접미사 ‘하다’가 붙을 수 없음을, ‘방탕하다’는 동사가 아니라 형용사임을 이 청년이 모르는 듯하기 때문이다. 그가 “생(生)과 사(死)의 눈부신 외접선(外接線)을 그으며/ 하늘에 구멍을 뚫은 신호탄”(‘신호탄’)이라고 쓸 때, 독자는 ‘외접선’이라는 비유가 그 겉 멋에도 불구하고 흐리터분하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어진다.

 

‘목마와 숙녀’의 적잖은 시들은 고물 텔레비전 같다. 전류는 흐르는데 화면은 가로띠 무늬로 뒤덮여 있고, 지지거리는 소리 때문에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는 한두 세대 전의 고장난 텔레비전 말이다. 그 시대엔 텔레비전이 문명의 상징이었듯, 이 시집은 문명의 이미지들로 가득하다. 그 이미지들은 자주 단절적이어서, ‘목마와 숙녀’의 언어를 ‘구조물’이 아니라 ‘분위기’로 보이게 한다. 이런 문명의 이미지들에도 불구하고 박인환이 모더니스트가 되지 못한 것은, 거의 체질적으로 보이는 그의 감상주의 때문이다. 사실 감상주의는 ‘목마와 숙녀’ 전체를 휘몰아 가는 동력이다. ‘목마와 숙녀’를 분위기의 시집이라고 할 때, 그 분위기는 센티멘털리즘인 것이다. 시인은 동인지 ‘신시론(新詩論)’과 동인 그룹 ‘후반기(後半紀)’ 등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며 모더니스트를 자임했으나, 그의 ‘모더니즘’은 1980년대의 민중문학 못지않게 감상주의에 감염돼 있었다.

 

이런 모든 허물에도 불구하고 ‘목마와 숙녀’는 한 번 읽어볼 만한 시집이다. 이 시집은 1920년대에 태어나 태평양전쟁의 실감 속에서 성장기를 보내고 해방과 더불어 성년을 맞은 뒤 곧바로 참혹한 내전을 겪은 조선 문학청년의 평균적 내면풍경을 보여준다. 그의 제스처가 과장된 만큼이나 그의 황폐한 내면은 더욱 또렷하다.

분단과 전쟁으로 찢겨진 옛 식민지 출신 청년이 이국에 대한 선망과 감상주의로 제 상처를 어루만지며 그 궁핍한 시대를 버텨내려고 했을 때, 그 안간힘이 안쓰러울 망정 그것을 비난할 수만은 없다. 감상주의에 버무려진 대로 이 시집에 그리도 자주 나오는 죽음의 이미지는 이 청년 시인이 살아낸 연대가 그대로 죽음의 연대였음을 증언한다. 게다가 이 시집은 시인 박인환이 ‘목마와 숙녀’나 ‘세월이 가면’ 이상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세 사람의 가족’이나 ‘어린 딸에게’ 같은 작품에서, 시인은 얼치기 댄디의 옷을 벗어던지고 한 가족의 책임있는 가장으로서 시대와 결합한다.

 

전시(戰時) 피난열차에서 그가 “어느 날 역전에서 들려오는/ 군대의 합창을 귀에 받으며/ 우리는 죽으러 가는 자와는/ 반대 방향의 열차에 앉아/ 정욕처럼 피폐한 소설에 눈을 흘겼다”(‘검은 강’)고 썼을 때, 짤막한 미국 방문을 되돌아보며 자신이 “마음만의 신사(紳士)”(‘에베레트의 일요일’)였음을 깨달았을 때, 그의 시와 세계관은 새로운 지평을 겨냥하고 있었다. 한국문학을 위해서, 박인환은 더 살았어야 했다. / 한국일보,2005.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