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석 탄생 100주년]
넘치는 사랑과 슬픔속에 산 당신
선생의 100번째 생신을 축하합니다
운명적인 만남 이후에 평생 동안 당신을 그리워하며 살았던 자야와 당신의 흔적을 조금이라도 느끼고 싶어 성북동 산자락에 있는 수려하고 단아한 길상사를 찾았습니다. 우연히도 길상사는 당신이 동경유학 때 하숙했던 길상사 지명과 동명이네요. 가장 먼저 수령 200년이 넘은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나를 반기며 땀을 식히라고 여유와 운치의 그늘을 내어주고 있습니다. 매미 소리와 계곡에서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세상의 시름을 잠시나마 내려놓으니 마음이 평안해지는 것 같아 더할 나위 없이 좋습니다. 길상사는 당신의 연인 자야가 대원각이란 고급 요정을 법정스님에게 조건 없이 시주하여 세운 사찰로 세간의 관심을 모았지요. 그녀는 ‘내 모든 재산이 그 사람의 시 한 줄만도 못하다’라는 말을 남겨 세상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어요. 세상에 천억을 아무 조건 없이 기부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다시 한 번 법정의 ‘무소유’가 떠오릅니다. 또한 당신과의 짧았던 숭고한 애련으로 평생을 그리워하며 살다가 당신의 이름으로 문학상을 제정하여 세상 사람들의 가슴속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은 이름으로 기억되고 있답니다. 역시 당신과 당신의 시를 온 가슴으로 열렬히 사랑해온 여인의 향취가 느껴지네요.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이별은 없을 것”이라던 당신과 자야는 이제 길상화로 다시 태어나 풍경소리, 독경소리, 범종소리가 청아하게 울려 퍼지는 성북동 골짜기의 고즈넉한 산사에서 다정하게 팔짱을 낀 채 거닐고 있을 줄도 모르겠네요.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당신을 향한 애달픈 러브스토리는 지금도 사람들에게 진한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당신의 여인을 떠올리며 썼다는 ‘나와 나탸사와 흰 당나귀’를 한 번 읊조리며 자야와의 애틋한 연정을 떠올려 봅니다.
'가난한 내가/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오늘밤은 눈이 푹푹 나린다//……나타샤와 나는/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눈은 푹푹 나리고/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 한다/……눈은 푹푹 나리고/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어디선가 불쑥 ‘나타샤’가 튀어나와 내 옆에서 속삭이고 있는 것 같은 전율을 느낍니다. 쇠뿔도 녹일 것 같은 뜨거운 땡볕에, 갑자기 ‘눈이 푹푹 나리던 날, 나타샤와 눈이 푹푹 쌓이는 산골’로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들기도 하구요. 정말 걸작 중의 걸작 아닌가요. 당신의 빼어난 시편들 중에서 나를 매혹시킨 작품 중의 하나이지요. 불가능했던 사랑이 이제라도 재회하여 이루어지기를 기대하며 길상사를 둘러봅니다. 순간 극락전 한쪽으로 수림이 울창한 계곡이 보이고 길상헌 뒤쪽에 푸른 나무와 돌에 둘러싸여 잘 단장된 공덕비를 발견했지요. 이제 인간의 모습은 내려놓고 망부석이 되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육십 평생을 오로지 당신만을 사랑하고 그리워하며 당신의 생일에는 물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다는 비련의 여인이 길상화라는 법명을 받고 잠들어 있고, 유해는 눈이 하얗게 내리는 날 길상사 앞마당에 뿌려졌다고 하네요. 살아있는 동안은 비록 만날 수 없었지만 내세에서라도 자야를 만나 백년해로하시길 바랍니다. 이렇듯 당신과 자야의 이야기는 길상사를 통해 세상에 알려지고 있답니다. 아쉬움을 뒤로 한 채 경내를 내려오면서 소나무를 휘감으며 우아한 자태를 뽐내고 있는 능소화와 마주합니다. 주홍빛 꽃망울을 나팔꽃처럼 활짝 터트리며 지열이 후끈거리는 한낮의 염천을 견디고 서 있습니다. 사랑하던 사람을 애절하게 기다리던 슬픈 전설을 간직한 능소화처럼 자야도 기나긴 기다림의 세월만 보낸 것은 아닌지 오늘따라 더욱 처연하게 보입니다.
산골 오지 삼수 관평리에서 기구한 삶을 살았기에 당신의 흔적을 따라갈 수는 없지만 당신이 걸어온 노정을 거슬러 올라가 봅니다. 올해는 당신의 탄생 100주년을 맞는 해입니다. 평북 정주에서 태어난 당신은 해방 후 북에 남은 탓에 우리 문학사에 등장하지 못하고 오랫동안 공백 상태로 존재했지요. 그러다 1988년 남북 · 월북 문인 해금 조치로 우리에게 알려지게 되어 시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으로 찬사를 받고 있습니다. 또 수능 언어영역에서 처음으로 복수정답을 인정해야 했던 ‘고향’이라는 시를 통해 또 한 번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고 지금은 당신을 빼놓고는 한국 시문학사를 이야기할 수 없을 정도로 최고의 시인이 되었지요. 오랫동안 자야의 가슴에만 묻혀있던 사랑이야기가 ‘내 사랑 백석’으로 출간되었고, ‘사슴’은 평론가가 뽑은 한국 대표 시집으로 선정되었어요. 또한 100주년 기념학술대회와 최근에 새로 발굴한 작품을 수록한 ‘백석문학전집’을 출간하는 등 당신의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그러던 당신이 북에서는 북풍한설이 몰아치는 삼수군으로 쫓겨나 30여년의 세월을 양치기 목동으로 살았다니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요? 시인 백석이 아니라 창작활동을 중단한 양치기이라뇨? 당신의 빛나는 시편들은 다 어디로 사라졌나요. 당신을 소외시킨 분단의 상황이 밉고 안타깝기만 할 뿐입니다.
‘하눌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라고 노래한 것처럼 이미 당신의 운명을 예감하고 있었던 것 아닌가요.
셰익스피어가 탄생 400년이 넘도록 축복을 받고 있듯이, 그대도 한국 현대시의 새로운 100년을 비추는 영원히 꺼지지 않는 모던보이로 거듭나길 바랍니다. [서울교육 2012년 가을호 김동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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