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송 동시- 제 2 편]
풀잎2-박성룡
풀잎은
퍽도 아름다운 이름을 가졌어요.
우리가 '풀잎'하고 그를 부를 때는,
우리들의 입 속에서 푸른 휘파람
소리가 나거든요.
바람이 부는 날의 풀잎들은
왜 저리 몸을 흔들까요.
소나기가 오는 날의 풀잎들은
왜 저리 또 몸을 통통거릴까요.
풀잎은,
퍽도 아름다운 이름을 가졌어요.
우리가 '풀잎' '풀잎' 하고
자꾸 부르면,
우리의 몸과 맘도 어느덧
푸른 풀잎이 돼버리거든요.
- ▲ 일러스트=윤종태
시평
풀이 있고 풀잎이 있다. 서로 크게 다르지 않은 말들이다. 풀이라고 해도 좋고 풀잎이라고 해도 상관없다. 그러나 어떤 시인에게 풀잎은 꼭 풀이라고 불려야 하고 또 어떤 시인에게 풀은 꼭 풀잎이어야만 한다. 김수영이 전자에 속한다면, 박성룡은 후자다. 그에게 풀은 항상 '풀잎'이다. 풀잎은 "꽃보다/ 고운 이름// 흙보다 가까운 이름"(〈풀잎1〉)이자 "퍽도 아름다운 이름"(〈풀잎2〉)이다.
풀을 풀잎이라고 부르는 것, 그 순간 환기되는 존재의 마법적 열림은 박성룡 시의 출발점이다. 그의 시는 우리가 '풀잎'이라고 부르는 순간의 미를 노래한다. 'ㅍ'의 파열음이 울림소리 'ㄹ', 'ㅇ'을 만나 만들어내는 '푸른 휘파람 소리'는 그가 포착해낸 시적 주문 가운데 하나다. 우리는 이 주문을 통해 '우리의 몸과 맘도 어느덧/ 푸른 풀잎이 돼버리는' 우주적 신비 속으로 빠져든다. 이 순간 풀잎이라는 '이름'과 나는 별개가 아니다. 나는 풀잎이고 풀잎은 나다.
1932년 전남 해남 출생인 박성룡 시인은 평생 꽃, 바람, 새, 이슬, 흙 등 자연의 사사로움을 노래해왔다. 그는 "과목에 과물들이 무르익어 있는 사태처럼/ 나를 경악케 하는 것은 없다"(〈果木〉)고 했다. 이 당연하다면 당연하고 경이롭다면 경이로운 자연의 '황홀한 은총'은 그의 시적 경험의 저변을 형성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를 행복한 '전원시인'으로만 여겨서는 곤란하다. 그는 30여 년을 신문사 문화부에서 일한 기자 출신이기도 하다. 북적대는 신문사 한쪽 끝에서 바람 부는 날의 풀잎들의 흔들림과 소나기 오는 날의 풀잎들의 통통거림을 보고 듣는 자, 그가 바로 박성룡 시인이다.
그래서일까. 그가 "가을을, 듣고 있었다"(〈능금〉)라고 하거나 "나는 끝끝내/ 이 지상의 풀섶에 맺혔던 이슬들을/ 보석이라 부르다가"(〈이슬〉) 갈 것이라고 할 때 거기에는 묘한 애수가 엿보인다. 도시의 번잡함을 아는 자만이 풀잎이 제공하는 마법을 끝끝내 포기하지 못한다. 우리 모두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중학교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던 이 시가 새삼 우리를 향수에 젖게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봄비 내리는 날, '풀잎' '풀잎' 하고 자꾸 불러보자. 그러면 알게 될 것이다. 그 '주문'이 우리의 오늘을 견디게 한다는 것을.
신수정 문학평론가 / 조선일보,2008.5.13
풀을 풀잎이라고 부르는 것, 그 순간 환기되는 존재의 마법적 열림은 박성룡 시의 출발점이다. 그의 시는 우리가 '풀잎'이라고 부르는 순간의 미를 노래한다. 'ㅍ'의 파열음이 울림소리 'ㄹ', 'ㅇ'을 만나 만들어내는 '푸른 휘파람 소리'는 그가 포착해낸 시적 주문 가운데 하나다. 우리는 이 주문을 통해 '우리의 몸과 맘도 어느덧/ 푸른 풀잎이 돼버리는' 우주적 신비 속으로 빠져든다. 이 순간 풀잎이라는 '이름'과 나는 별개가 아니다. 나는 풀잎이고 풀잎은 나다.
1932년 전남 해남 출생인 박성룡 시인은 평생 꽃, 바람, 새, 이슬, 흙 등 자연의 사사로움을 노래해왔다. 그는 "과목에 과물들이 무르익어 있는 사태처럼/ 나를 경악케 하는 것은 없다"(〈果木〉)고 했다. 이 당연하다면 당연하고 경이롭다면 경이로운 자연의 '황홀한 은총'은 그의 시적 경험의 저변을 형성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를 행복한 '전원시인'으로만 여겨서는 곤란하다. 그는 30여 년을 신문사 문화부에서 일한 기자 출신이기도 하다. 북적대는 신문사 한쪽 끝에서 바람 부는 날의 풀잎들의 흔들림과 소나기 오는 날의 풀잎들의 통통거림을 보고 듣는 자, 그가 바로 박성룡 시인이다.
그래서일까. 그가 "가을을, 듣고 있었다"(〈능금〉)라고 하거나 "나는 끝끝내/ 이 지상의 풀섶에 맺혔던 이슬들을/ 보석이라 부르다가"(〈이슬〉) 갈 것이라고 할 때 거기에는 묘한 애수가 엿보인다. 도시의 번잡함을 아는 자만이 풀잎이 제공하는 마법을 끝끝내 포기하지 못한다. 우리 모두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중학교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던 이 시가 새삼 우리를 향수에 젖게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봄비 내리는 날, '풀잎' '풀잎' 하고 자꾸 불러보자. 그러면 알게 될 것이다. 그 '주문'이 우리의 오늘을 견디게 한다는 것을.
신수정 문학평론가 / 조선일보,2008.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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