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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과 소설의 향기/월북문인 친일작가

월북문인 - 박태원

by 골든모티브 2008. 1. 17.

월북지식인들의 행로 (9) 박태원

 

최고의 모던보이 ... 구인회 동인 

 


죽음이 넘나드는 병상에서 월북작가 박태원은 완전실명과 전신마비의 몸으로 혼신의 힘을 다해 구술 집필을 하고 있었다.

받아쓰는 사람은 그의 아내 권영희. 마지막에는 그의 말문조차 막혀버렸다. 아내가 대신 써서 읽어주는 글을 그는 필사의 몸짓으로 감수(감수)했다. 그렇게 해서 완성된 작품이 대하 역사소설 ‘갑오농민전쟁’ 3부작이다.

 


◇사진설명: 손녀의 도움으로 독서하는 모습. 북한 화보 '조선' 80년 12월호에 소개됐다.



 

처절한 사투였다. 그래도 그는 행복했을 것이다. 월북 작가로서 죽음의 순간까지 작품을 쓸 수 있는 ‘행운’을 누린 사람은 드물었기 때문이다.

박태원은 1930년대 이상(리상)과 더불어 최고의 모던보이로 꼽혔다. 그는 "장거리 문장"을 쓰는 최고의 기교파로서, 이태준 김기림 김유정 등과 함께 1933년 결성된 구인회의 중심인물로 활동했다. 당시 이 "순문학적 몰이념적" 문학단체인 구인회에 대해 카프(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는 일제히 비난의 화살을 퍼부었다.



1930년대의 박태원



굵은 테 안경에 둥그런 바가지 모양의 머리를 한 박태원은 외모 못지 않게 문장 기술 방식이나 소설 구성 방법에 있어서도 혁신적인 데가 있었다. ‘방란장주인’은 소설 전체가 단 하나의 문장으로 이루어졌다. 대학노트 한 권을 끼고 서울 시내를 답사하면서 그날의 일기를 기록한 듯 써내려간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은 이른바 "고현학(고현학)적 방법"이라는 이름아래 최인훈 같은 후대의 소설가들에게 패러디의 대상이 되었다. 소설가의 시선이 카메라의 눈처럼 청계천 주변의 일상과 세태를 셔터 누르듯 훑어가는 기법을 택한 ‘천변풍경’에 대해 이광수는 "톨스토이의 작품에서 받는 감동과 방불한 감동"을 받는다고 평가했다. 이상은 소설집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의 삽화를 그려줄 정도로 그에게 둘도 없는 친구였다.

전형적인 서울 토박이면서 모던보이였던 박태원의 월북동기에는 문학사적으로도, 소설미학적 측면에서도 의문이 생긴다. 구인회 시절 절친한 동료였던 이태준을 따라 6.25전쟁 중 정인택 설정식 이용악 등과 함께 북한으로 가게 되었던 것으로만 알려져 있다.

박태원이 남한 문학계의 시야로 들어 온 것은 1986년 그의 사망소식과 함께 말년의 행적이 전해지면서였다. 그가 대하 역사소설 ‘계명산천은 밝아오느냐’와 ‘갑오농민전쟁’ 3부작을 남기는 과정은 하나의 장엄한 의례였고 경이였다. 거기에는 병상에 누워 구술 집필을 하고 있는 박태원의 마지막 사진이 담겨 있었다.

‘갑오농민전쟁’ 3부의 표지에는 지은이로 박태원과 함께 부인 권영희의 이름이 나란히 적혀 있다. 그는 ‘계명산천은 밝아오느냐’를 탈고할 무렵인 1965년 양안시신경 위축증과 색소성 망막염으로 실명을 했고 거기다 고혈압이 겹쳐 전신불수가 되었다. 그의 아내 권영희도 이 과정에서 청각장애를 얻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이같은 창작의 열정은 어디에서 왔을까. 부유한 서울 명문가 출신의 수재에 기교적 스타일로 이름을 날리다 월북, 숙청, 복귀의 과정을 거친 그에게 마지막 남은 혼불은 소설가로서의 전 인생을 거는 것, 그것만이 자신의 생애를 보상해 준다고 믿었던 것은 아닐까.

월북 전 그의 생애는 이념과는 거리가 있었다. 30년대 등단 무렵 ‘성탄제’ ‘사흘 굶은 봄 달’ 등을 통해 카페 여급이나 서울 변두리 지역의 민중들에게 연민과 동정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계급 이데올로기적 접근은 아니었다.

1954년 북한에서는 "자백사업"이라는 폭풍이 휘몰아치면서 특히 월북 문인들에게 공포의 시대가 도래한다. 남로당 계열 숙청 이후 잔존파를 온전히 제거할 필요가 생겼고 거기다 이태준이라는 존재의 제거가 긴급한 사정에서 준비작업이 필요했다. 1956년 이태준이 숙청될 때 그와 함께 구인회 동인이었던 박태원도 구인회 시절에 대한 자기비판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에 이르게 된다. ‘북의 예술인’을 썼던 이철주는, 당시 박태원이 자신의 창작 부진을 21년 전 구인회 시절의 몰사상적 경향과 부르주아적 습관때문이라고 견강부회하는 것은 부당하다며 "월북한 것의 슬픔"을 토로했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박태원은 "자의든 타의든 월북 했으면 당의 문학정책을 따를 수 밖에 없다. 내가 좀더 공산주의를 배웠으면... 좀 더 멋있는 글을 쓸 수 있지 않았을까"라고 되뇌었다고 한다. 그의 내면에는 월북의 후회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인정론이 교차하고 있었다.

그도 숙청의 여파를 벗어나지 못하고 4년간 평남 강서지방의 한 협동농장으로 추방되었다가 1960년 복귀한다. 이후 그는 역사소설 집필에 몰두하게 된다. 사회주의리얼리즘의 창작방법으로부터 좀 더 자유로운 입장에서 소설가로서의 길을 가기 위한 마지막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가 마지막까지 매달렸던 ‘갑오농민전쟁’은 1부 "굶주리는 봄"(1977), 2부 "서면 백산 앉으면 죽산"(1980), 3부 "새야새야 파랑새야"(1986)로 구성되었다. 실제인물 전봉준과 가상인물 오수동 오상민 부자의 영웅담을 적절히 배치하면서도 민중적 영웅인 허구적 인물의 투쟁성을 강렬게 부각시키는 북한 역사 대하소설의 특징을 보여주었다.

북한은 그가 1986년 7월 10일 사망했음을 알리면서 “서울에서 창작생활을 하다 공화국 북반부로 들어와 우리 당의 문예사상을 받들고 소설문학을 발전시키는데 자기의 정열과 재능을 다 바쳤다”고 추모했다.

박태원의 경우가 보여주듯, 월북 지식인들의 행로에는 개인적 이념 성향보다는 현실 정치의 원근법과 남북한간 상황의 역학관계가 작용하고 있다. 거기에 그들의 삶과 죽음이 있고, 이를 두고 우리는 "운명"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 아닐까.


박태원(박태원ㆍ1909~1986) 누구인가

서울 출생. 호는 몽보(夢甫) 또는 구보(丘甫, 仇甫, 九甫).

1930년 동경 호세이대학(法政大學) 예과 2학년을 중퇴하고 귀국해 ‘신생’ 10월호에 단편소설 ‘수염’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문단 활동을 시작했다. 1933년 이태준 정지용 김기림 이상 이효석 조용만 등과 함께 순문학 단체인 구인회(九人會)에 가입하고, 1936년 ‘조광’에 장편 ‘천변풍경’을 연재했다.

1945년 조선문학가동맹 중앙집행위원에 피선됐고, 6.25전쟁 중 월북해 평양문학대학 교수등으로 재직하다 1956년 남로당 계열로 몰려 숙청당해 작품 활동이 금지됐다. 1960년 복권후 ‘계명산천은 밝아오느냐’를 집필했고, 1977년 국기훈장 제 1급을 받았다. 1977년부터 사망(86년) 때까지 완전실명과 전신불수의 몸으로 동학혁명을 소재로 한 ‘갑오농민전쟁’ 3부를 완간했다.

 

조영복 광운대 국문과교수ㆍ문학평론가 qbread@hananet.net
조선일보,2001.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