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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사색당파

by 골든모티브 2008. 5. 12.

조선시대 사색당파

 

 

사림 ┬ 동인 ┬ 남인 ┬ 청남

       │          │         └ 탁남

       │          │

       │          └ 북인 ┬ 대북

       │                      └ 소북         ┐  ┌ 시파(남인+소론+노론)

       │                                        ├─┤

       └  서인 ┬ 소론 ┬ 준소          ┘  └ 벽파(노론)

                    │         └ 완소

                    │

                    └ 노론 ┬ 호파

                                └ 낙파   

 

 

[당파의 역사적 흐름]


1) 동인VS서인:

당시 중요한 관직이었던 이조전랑직을 둘러싼 싸움, 그리고 선조의 외척이었던 기성세력인 심의겸에 대해서 진보적인 선비들이 정치적 공세를 시작하면서 붕당이 발생.)

 

2) 남인VS북인(동인이 두갈래로 분당됨)VS서인:

1589년에 벌어진 기축옥사(정여립 반역 의혹 사건) 당시 정여립과 친했던 많은 동인계 인사들을 처벌한 서인의 주요인물인 송강 정철의 행동에 대해서 동인에서는 맞대응해야한다는 쪽과, 정여립이 모반한 것은 사실이니 그냥 자숙하자는 의견이 대립.

정철은 2년 후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해야 한다]고 선조에게 진언했다가 밉보이고 강화도로 유배당하는데 이 당시 정철의 처벌 강도를 둘러싸고 동인이 두 패로 갈려서 대립함으로서 북인/남인으로 선이 그어짐.)

 


3) 대북VS소북(북인이 분당됨):

임진왜란 이후 유성룡이 실각하면서 수많은 의병장을 배출한 북인이 실권을 잡게 됨. 선조 말년에는 서자인 광해군의 세자자리를 빼앗고 이를 선조의 적자인 영창대군에게 물려주려던 소북과 이를 저지하려는 대북이 대립했으나 선조가 갑자기 죽으면서 대북이 승리. 광해군 즉위 이후 소북은 광해군에게 숙청. 이 당시 정치 주도권은 완전히 대북이 차지.)

 

 

4) 남인VS서인 <공존기>:

인조반정(1623년)에 의해서 대북은 제대로 말살, 도살. 소북은 얼마간 근근히 명맥 유지하다가 자연소멸(북인 몰락) 남인과 서인은 한동안 평화적으로 공존했으나 인조반정을 일으킨 세력이 서인이었으니만큼 실권은 서인에게 있음.

 

 

5) 남인VS서인 <대립기>:

"효종의 계모가 죽은 효종을 위해서 몇년 간 상복을 입어야 하는가"라는 문제로 시작한 현종 때의 예송논쟁. 얼핏 보기엔 별 것 아닌 문제이지만 이것은 [왕은 특별하다]남인[왕도 신하랑 다를 게 없어야 한다]서인의 이념적 대립이 숨어있는 것이었고, 효종 같은 경우는 형인 소현세자가 의문의 죽음을 당한 이후 소현세자를 미워했던 아버지 인조의 개입으로 인해 정식 상속자인 소현세자의 아들들을 젖히고 새치기로 왕위에 오른 만큼 정통성에 대해서는 극히 민감함. 그것은 효종의 장남이었던 현종에게도 공통되는 문제. 1차 예송논쟁에서는 서인이 승리하지만 2차 예송논쟁에서는 남인이 승리하여 남인의 발언권이 강화.

 

 

6) 탁남VS청남(남인이 분당됨):

2차 예송논쟁에서 승리한 남인. 그 후로도 서인 쪽에 불리한 스캔들이 거듭되어 터지면서 서인을 몰아내고 완전히 정권을 장악. 서인의 처벌문제(특히 서인의 우두머리인 송시열을 죽이느냐, 봐 줄거냐)를 둘러싸고 온건파인 청남과 강경파인 탁남으로 갈라짐. 청남은 허적이, 탁남은 윤휴와 허목이 우두머리. 이 싸움에서는 온건파인 청남이 승리. 덕분에 송시열은 죽음을 면함.

  


7) 노론VS소론(서인이 분당됨):

1680년에 숙종은 장인인 김석주의 도움을 받아 남인에 대한 기습공격을 가함. 이 사건을 경신환국이라고 부르는데, 청남의 허적, 탁남의 윤증이 처형당함으로서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남인은 하루 아침에 실권에서 물러남. 서인은 송시열을 비롯한 원로들의 주도하에 숙종의 브레인이었던 김석주와 손을 잡고 정국을 주도. 당시 김석주의(왕권강화를 위했다고는 하나) 역모날조사건과 공작정치,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놈은 모두 <사문난적>이다"는 식으로 남인들에 대한 보복을 정당화하는 송시열의 독단성에 반발하여 서인 온건파였던 윤증을 중심으로 당파가 쪼개짐. 이것이 소론으로서,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기존서인들은 노론으로 불림.(하지만 당시 소론의 힘은 약했고 남인은 식물인간 상태였기에 노론은 완벽하게 정권을 장악함.)

 

 

8) 노론VS남인:

남인계의 후궁이었던 장옥정이 숙종의 아이를 임신하자 크게 기뻐한 숙종은 그 아이(훗날의 경종)를 원자로 책봉하고, 자신의 후계자로 삼으려 함. 이에 노론 쪽에서는 서인계의 인현왕후 민씨가 아직 젊어서 아이를 낳을 수 있으니 서두르지 말라고 집요하게 태클을 걸었고, 숙종은 이를 무시하고 장옥정의 아들을 원자로 책봉하고 장옥정을 장희빈으로 봉함. 이 때 노론의 우두머리인 송시열은 숙종의 행동이 그릇되었다는 논지의 상소를 올렸는데, 이 상소로 인해 "한 나라의 원로라는 놈이 끝난 일을 가지고 불씨를 지핀다"고 노한 숙종은 남인들을 기습적으로 등용, 송시열을 탄핵케 하여 제주도로 귀양보냈다가 사약을 내려 처형하고, 그 후속조치로 노론계 대신들을 몰아냈으며, 노론계 왕비였던 인현왕후를 쫓아내고 장희빈을 왕후에 봉함. 이 사건을 기사환국이라고 합니다. 이 때 남인들의 노론에 대한 보복은 경신환국 못지 않게 잔혹하게 이루어짐(이로서 남인이 다시 정국 장악)

5년 후, 서인계에서 일어난 폐비민씨 복위운동을 남인들이 탄압하는 데에 태클을 건 숙종은 남인들을 조정 요직에서 모두 쫓아내거나 몰아내고 그 자리에 소론의 중심인물들인 박세채, 남구만 등을 등용. 그리고 왕비 장씨를 희빈으로 강등하고 인현왕후 민씨를 다시 복위시킴. 이 사건을 갑술환국이라고 함.(남인 쇠퇴)

  


9) 노론VS소론:

노론과 소론은 인현왕후 저주혐의로 심판대에 오른 장희빈의 처벌문제를 둘러싸고 대립. 노론은 장희빈을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고 소론은 장희빈의 아들인 세자의 입장을 고려해서 장희빈을 살려줘야 된다고 주장했는데, 결국 노론이 승리하여 장희빈은 사약을 받음.

숙종이 죽은 후 왕위에 오른(1721년) 장희빈의 아들.경종에 대해 노론은 경종의 이복동생인 연잉군(훗날 영조)를 후계자로 책봉하도록 압력을 넣고, 자신들이 지지한 연잉군에게 실권을 주어 경종을 허수아비로 만들려고 했습니다. 이에 소론이 노론을 [불충한 무리] 로 탄핵하고 경종이 소론의 편을 들어 노론인사 일부를 축출함으로서 정국 주도권이 소론 쪽으로 기웁니다. 이를 신유옥사라고  합니다. 1722년 소론은 공작정치를 벌여 목호룡의 고변사건을 일으켜 노론을 정계에서 완전히 축출하고,  노론의 우두머리 4명을 처형합니다. 그러나 경종이 재위 4년만에 죽고(1724년 사망) 연잉군이 왕위에 오름으로서 정국은 다시 노론이 장악하게 됩니다.

 

 

10) 영조의 탕평책:

영조는 붕당정치를 억제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탕평책을 시행하여 노론, 소론, 남인들을 고루 등용하는 움직임을 보였으나 영조의 지지기반이 노론에 있었기에 시작부터 한계가 있었다고 봅니다. 특히 소론 강경파가 일으킨 이인좌의 난(1728)은 소론의 입지를 약화시키고, 난의 된서리를 정면으로 받은 영남 지방(경상도)선비들은 과거 응시를 금지당했습니다. 그리고 1755년에는 나주괘서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벼슬길이 끊긴 소론 강경파가 일으킨 역적모의사건이었는데, 이 사건도 소론을 난감하게 했죠.

  


11) 벽파VS시파(사도세자 사건):

영조의 의향을 받들어 사도세자를 처형해야 한다는 벽파(노론 강경파)와 사도세자를 살려줘야 한다는 시파(노론 온건파, 소론, 특히 남인)의 대립입니다. 결국 벽파의 입장이 우세하여 사도세자는 죽음을 당합니다.(사실 사도세자의 처형 당시에 벽파와 시파라는 개념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가 왕이 된 이후에 생긴 단어로서, 정조의 대對 사도세자 정책에 찬동하는 사람을 (시류에 편승하는 부류라는 비앙조에서) 시파라고 불렀고, 정조의 사도세자 정책에 반대하는 사람을 벽파라고 부름. 


정조의 탕평정책과 개혁정책이 좌절되고, 정조가 의문사한 이후 노론 벽파가 재집권하여 시파를 대청소하면서 조선의 멸망에 이르기까지 노론이 권력을 장악.(세도정치의 시작이며, 붕당정치는 여기서 사실상 종막을 맞이한다고 봐도 무관함. 반대당이 없어지고 노론이 벼슬자리를 독차지)

[출처] 조선시대 사색당파의 전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