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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과 소설의 향기/문학기행 기사

조지훈 문학관과 호은 종택 - 영양

by 골든모티브 2008. 2. 25.

조지훈시인과 영양군

 

지조가 사라지고 있다. 지조를 지키다가는 시대의 낙오자가 된다고 야단이다. 이런 판에 초지일관 지조를 지키며 살다가 떠나간 이의 삶의 궤적을 찾아 나서는 일은 시대의 흐름을 역행하는 일인지 모른다. 국제화는 급기야 변질과 변절조차 용인되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세상사가 답답하고 한심하다.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겠다며 사람들은 이런 변화를 따라가느라 도통 제정신이 아니다. 변화로 얻어진 물질의 풍성함이 사람들을 사뭇 행복하게 만드는 듯 보이지만 지조를 잃은 이들이 평안을 얻기는 힘들 것이다.

어쩌면 이런 현실이기에 지조를 끝까지 지키며 떠나간 이가 그립고 귀하다. 지조있는 선비처럼 살다가 떠나간 문인들의 상징인 조지훈시인의 고향 경북 영양군을 찾아 새벽길 떠난다. 서울과 수도권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오전 6시를 넘지 않아야 안심이다. 자칫 멈칫거리다가는 낭패다. 어둠이 가시지 않은 중부고속도로를 달린다. 조지훈시인의 고향인 영양군 일월면에 있는 주실마을을 찾고 싶었던 것은 오래전이다.
늘 가슴속에 은밀하게 숨겨놓은 옛 사랑의 추억을 더듬거리듯이 간혹 그의 시 ‘완화삼’을 읊조리며 때가 되면 홀연히 떠나겠다고 속으로 별러 온지 어언 10년이 넘었다.

 

차운 산 바위 우에 하늘은 멀어
산새가 구슬피 울음 운다.

구름 흘러가는

물길은 칠백 리

나그네 긴 소매 꽃잎에 젖어

술 익는 강마을의 저녁노을이여,

이 밤 자면 저 마을에

꽃은 지리라

다정하고 한 많음도 병인 양하여

달빛 아래 고요히 흔들리며 가노니

 조지훈시인의 시 ‘완화삼’ 전문

 

조지훈 시인(1920~1968), 이 이름을 듣는 순간 중년의 사람들은 그의 시 ‘승무’와 ‘완화삼’을 연상한다. 
‘완화삼’은 조지훈 시인이 박목월시인을 위해서 쓴 시다. 답례로 박목월 시인이 조지훈시인을 위해 쓴 시가 그 유명한 ‘나그네’다.
꽃피고 구름 흘러가는 물길 칠백 리가 아니라 늦겨울의 삭풍을 가르며 중앙고속도로를 달려 소백산맥을 넘는다. 정확하게 말하면 소백산맥을 넘은 것이 아니라 죽령터널 속을 달려서 지나친다. 충북 단양군과 경북 풍기군의 큰 고갯길 죽령은 이제 역사속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아직 국내 도로 터널로는 가장 긴 죽령터널(4.6km)을 빠져 나가면 신기한 듯 시야가 확 트인다. 경상북도 풍기 땅이다. 옛사람들은 지역의 경계를 이렇듯 큰 산맥과 강을 경계로 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본보기가 바로 이런 곳이다. 소백산맥이 휘돌아 가는 모습이 차창을 통해서 보인다.  조지훈 시인의 생가 ‘주실마을’을 찾아가는 길은 두 길이다. 한 곳은 중앙고속도로 서안동IC를 나와 영덕방향으로 계속 달리다가 진보를 거쳐 영양읍으로 진입하는 방법이다. 다른 한 곳은 풍기나 영주IC에서 봉화를 경유하여 청량산을 휘돌아 31번 국도를 이용하여 도달하는 방법이다. 이 두 방법 중 어느 것이 옳다 할 수 없을 정도로 비슷비슷한 시간이 걸리며 장단점이 있다. 영양군이 아직도 교통이 수월하지 않다고 하는 것을 안동에서 영양까지 가는 국도가 2차선이 증명한다. 안동댐과 임하댐의 담수를 보면서 가는 풍광이 좋지만 2차선 국도는 늘 추월차량들의 돌출행동들이 불안하기 그지없다.

 

청록파 시인이기도 한 박목월시인을 위해서 쓴 시 ‘완화삼’의 싯구가 다시 생각난다. “차운산 바위위에 /하늘은 멀어/ 산새가 구슬피 /울음 운다/ 구름 흘러가는/ 길은 칠백리” 서울에서 340KM를 달려왔다. 칠백리가 아니라 족히 800리가 넘는다.

 영양군청이 있는 영양읍은 산들에 에워 쌓인 분지형태에 다소곳이 숨어 있는 도시다. 오롯한 읍 길을 승용차로 몇 번 오고 가면 금세 왔던 길을 또 오게 될 정도로 작은 소읍이 영양읍이다.  ‘영양군민회관’은 사뭇 위용을 자랑하듯 읍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웅장하게 서 있다. 영양군민회관내에 있는 영양문화원의 이정인 사무국장에게 조지훈 시인에 관해 묻는다. 그러나 그는 “조지훈시인에 관해서는 고려대학교 민족문제연구소에 자료가 많습니다. 이곳에서는 자료도 별로 없거니와 잘 알지 못합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분이 고맙게 제공한 ’영양문화‘에도 조지훈시인에 관한 자료가 보이지 않는다. 등잔 밑이 어두운 법이다. 영양군은 삼국시대 때는 줄 곧 고구려 땅이었다.  신라초(고운), 신라말(영양),고려초에 영해부에 속했다가 1179년 영양현이 된다. 조선 초인 1413년 다시 영해부로 되었다가1683년에 영양현으로 복현되고 갑오경장 직후에 영양군이 된다. 점심을 먹기 위해 식당을 찾는다. 산채정식을 잘한다고 하는 ‘삼양식당’을 들어선다. 다리를 절고 있는 주인 할머니는 이미 40년 넘게 식당을 운영한 분인데 식당에는 점심식사 전이라 찾는 이가 없다. 주방을 들여다보니 너저분하고 안내한 방은 온기가 없고 차다. 그러나 산채정식은 일품이었다. 하지만 손님을 초대하기는 식당분위기가 너무 칙칙하다.

문학기행을 다니다 보면 그 고장에서 가장 맛나고 좋은 분위기의 음식점을  묻곤 한다. 맛과 분위기가 가장 좋은 곳을 찾는 것은 먼 길을 떠나온 사람들의 한결같은 마음일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영양군에는 이런 곳이 없다. 향후에 영양군이 문향의 고향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제대로 된 음식점이 꼭 생겨야 한다. 먹는 일도 기행중에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급히 일월면 주곡마을을 향해 떠난다. 음식점의 분위기와 맛도 그 고장의 자랑이기 때문이다. 차량의 이동이 한적한 도로(지방도918번)을 약 10분쯤 달리면 일월면 주곡리 주실마을에 닿는다. 동리에 예사롭지 않은 기운이 돋는가 싶었는데 역시 그랬다. 마을의 숲이 마을을 보호하고 있었고 숲속에 조지훈의 시비가 정갈하게 서서 반긴다.
주실마을 숲속에 있는 조지훈 시인의 시비를 읽는다. 주변의 풍경은 한 폭의 수묵화다.
                               

주실마을 숲속에 있는 조지훈 시인의 시비


1982년 시비건립당시 약 500명의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참석을 하였다는 시비는 한눈에 보아도 품위 있고 멋이 있다. 최근에 자연석을 마구잡이로 깎아서 성의 없이 난립되고 있는 시비를 보다가 이 시비를 보니 마음이 푸근해 지고 피곤이 가신다.  25년 전에 이 시비를 시인의 생가 마을 앞에 세울 줄 알았던 사람들의 안목에 고개가 숙여진다. 그런데 시비에는 특이하게도 조지훈의 대표시가 아닌 ‘빛을 찾아가는 사람들’이 세로 행으로  새겨져 있다. 느티나무가 주종을 이루고 있는 이 숲은 마을을 수호하듯 800리 길을 달려온 나그네를 위해 바람 한 점 없게 만든다. 바람도 없고 하늘은 높고 푸르른 날 드디어 조지훈 시인의 고향마을에 왔다. 숲을 나와 이내 ‘주실마을’로 들어선다.  마을은 고색창연한 기와집 일색이다.
조지훈선생의 생가인 ‘호은종택’은 문이 굳게 닫혀있다. 답사 날에 하필 열쇠를 가지고 있는 집 관리자 조동길씨는 서울에 가셨단다. 담 너머로 기웃거리면서 무심하게 사진 촬영만 한다. 주실마을 경로당에 들러 협조를 부탁해도 ‘호은종택’의 문은 열수가 없다.


 
조지훈시인 생가 호은종택


한양조씨 주실마을의 작은종택인 옥천종택을 관리하시는 조석걸(72)씨에게도 호은종택의  열쇠를 맡기지 않았다. 아직 개관을 하지 않고 있지만 찾아오는 이들을 위해 임시로 문을 열고 있는 조지훈문학관을 찾는다. 개관을 앞두고 있는 ‘지훈문학관’은 얼핏 보기에도 근사하다. 영양군에서 30억원을 들여 지은 문학관으로 이 지역의 기념비적인 건축물이 될 듯 보인다.

조지훈시인의 고향마을에 문학관을 지은 것에 감동을 받아 피곤이 확 풀린다.  영양군 문화관광과 양희씨가 전담 직원으로 파견되어 근무중이다. “지훈선생님 문학관을 방문해 주셔서 고맙습니더” 그녀는 매우 친절하게 문학관을 설명해 준다. 따듯한 차 대접을 받는다.

청록집(조지훈 박목월 박두진)의 영인본을 선물로 필자에게 주면서 문학관을 안내한다.
조지훈 선생의 고향인 일월면 주곡리 주실마을 생가인근의 대지 약 850평에 건평 약160평규모로 30억원을 들여 완공하고, 곧 개관을 앞두고 있다. 전시실 4개와 시청각실 그리고 청록파 시절 활동 등을 연대순으로 정리해 놓고 육필원고를 깔끔하게 전시하고 있다. 한옥으로 ㅁ자 형태의 전시공간이 특이하다.

양희씨의 전화로 영양군청의 임정평 계장이 문학관으로 직접 필자를 찾아와서 반긴다. 임정평 계장은 영양문인협회 홍보실장이라는 명함을 건넨다. 그는 ‘영양의 자연풍경’의 시화엽서를 내게 선물로 주며 영양 설명을 자세히 한다. “영양은 문향의  고향이라 예” “좀 오지가 흠인데 이곳 주실마을은 전통한옥이 잘 보존되어 있어 예” “그러나 이문열소설가 고향인 ‘두들마을’이 더 볼만 하지 예” 임계장은 금년 5월18일 ‘2007년 지훈 예술제’를 개최한다면서 꼭 다시 한 번 방문해 달라고 부탁을 한다. 공무원들이 변하고 있다. 특히 지방자치제 이후 문화관광과의 공무원들의 친절은 때론 감동을 주기도 한다. 임계장도 근무를 하다말고 전화를 받고 급히 달려온 것이다. 군청에서 지훈문학관까지는 승용차로 10분 이상 걸리는 길이다. 고맙고 감사하다.


조지훈 문학관


주실마을 탐방을 나선다. 봄빛이 완연하다. 이 마을은 현재 60가구에 약 200명의 주민이 산다. 조지훈 생가는 동네 중심부의 맨 앞집이다. 대문 오른쪽에 호은종택(壺隱宗宅)이라고 새겨진 비석이 서 있다. 조지훈 시인은 이 종택에서 태어났다. 호은(壺隱)은 주실 조씨(趙氏)들의 시조이며, 1629년(인조7년) 이 마을에 처음 터를 잡은 이의 호다.  호은 조전(趙佺)의 둘째 아들 조정형(趙廷珩)이 건축하였다. 기묘사화 때 조광조의 죽음과 더불어 가문이 멸문을 당할 때 그의 후손들은 전국의 각지로 피신을 했다.  이 후손중의 한 사람인 호은공이 이곳에 터를 잡았다. 호은(壺隱)이란 “호리병을 가지고 은둔 한다‘라는 뜻인데 아마도 사화(士禍)에 살아남기를 갈구하는 특이한 호다. 옥천종택을 관리하는 조석걸(72세)씨가 370년을 내려온 집안의 가훈을 이야기를 한다. “우리집안은 삼불차(三不借)를 했어 첫째는 재불차(財不借), 재물을 빌리지 않는 것이고, 둘째는 인불차 (人不借), 즉 사람을 빌리지 않지, 세 번째는 문불차(文不借)야, 글을 빌리지 않는 것이야” 370년간 이 전통이 그대로 지켜온 것은 기적 같은 일이다. 이 마을에서만 박사가 14명이 배출되었다. 박사도 보통 흔한 박사가 아니라 대부분 한국 인문학의 대들보 같은 이들이다.

예를 들면 조동일(국문학) 조동걸(역사학) 조동원(금석학)박사이며 조지훈(동탁)시인과 서로 지척에서 태어났다.
 

주실 마을

주실 마을 호은종택의 문전옥답 논 50마지기(약 1만평)는 370년 호은공 때부터 지금까지 장자에게 계승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놀라운 일이다. 조선후기를 거쳐 일제식민지와 이승만 정권에 있었던 토지분배에서도 용케 살아남아 오늘까지 종가집의 토지로 살아남아 있다. 나는 호은종택 앞  논둑길을 걸으면서 조지훈 시인을 생각했다. 바람도 없고 하늘은 높고 푸르다. 가슴이 울렁일 정도로 설렌다. 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았지만, 청록집에 수록된 조지훈의 시 ‘낙화’를 낭송하면서 산 밑 ‘지훈시공원’으로 향한다.



지훈시공원


                     

‘주실마을’은 축복의 마을이다. 조상을 잘 만나야 한다는 것을 다시 실감한다. 산골짜기의 지형지물을 그대로 활용하여 조성한 ‘지훈시공원’에는 약 20여개의 시비가 건립되어있다. 자연석을 깎아 만든 이 시비들에는 주옥같은 지훈시가 새겨져 있어 이 시를 읽고 음미하다 보면 시간가는 줄을 모른다. 이 공원을 탐방하다보면 동네사람들과 일박을 하면서 늙은 마을의 역사와 인물들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진다. 마을 전체가 박물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고택이 즐비하다.   대표시중의 하나인 ‘역사앞에서’를 읽으니 조지훈시인의 지조가 느껴진다. 조지훈시인(1920~1968)은 6세부터 9세까지 조부 조인석으로부터 한문을 배우기 시작한다. 선비적인 가풍의 영향으로 이 마을에 있는  ‘월록서당’에서 한학을 배우고 혜화전문을 졸업하였지만 그의 학문은 거의 독학이다.

 



주실마을 지훈시공원에 있는 ‘역사앞에서’ 시비


1939년도에 ‘고풍의상(古風衣裳)’ ‘승무(僧舞)’, 1940년 ‘봉황수(鳳凰愁)’로 문장지에 정지용시인의 추천을 받아 문단에 등단한다. 그는 역사와 민족, 민속적인 주제를 가지고 지조있는 정서를 노래한 시풍으로  선비적인 시인이 되었다.  박두진(1916~1998), 박목월(1916~1978)과 함께 1946년 동인시집인 청록집(靑鹿集)을 발행하였다.
이 동인 시집 한권의 위력은 대단했다. 오죽하면  이들을 청록파라 하지 않는가. 조지훈시인의 첫 시집은 풀잎단장(1952)이다. 이어 시의원리(1953),조지훈시집(1956)을 발행하면서 왕성한 저작 활동을 한다.

이승만의 자유당정권의 부정부패에 환멸을 느낀 조지훈시인은 시집 ‘역사앞에(1959)’와  ‘지조론’을1960년 3월호 ’새벽지‘에 게재하면서 독재정권에 대항한다.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소 소장을 역임하며 한국민족운동사, 신라가요연구논고, 한국문화사서설 등의 저서가 있지만 그는 역시 시인이다. 일제하에 친일하지 않은 몇 안 되는 문인중의 한분이며 특히18세의 나이에 한용운시인을 찾아가 독대한 일화는 유명하다.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되어 경찰서에서 심한 신문을 받고 오대산 월정사에 숨어살면서 일제 말에 글로 친일하지 않았다. 조지훈 시인의 인생을 더듬거리면서 주실마을에서 가장 전망이 좋은 옥천고택을 탐방한다. 옥천종택은  호은공의 증손자인 한양조씨(趙氏) 옥천(玉川) 조덕린(趙德隣, 1658~1737)의 종택(宗宅)이다. 조덕린은 숙종 17년(1671)에 문과에 급제하고 교리(校理)와 동부승지(同副承旨)를 지냈지만 노론을 자극하는 글을 써서 제주도 유배중 강진에서 세상을 떠난다.


옥천종택

 

‘주실마을’에는 우물이 단 하나밖에 없다. 370년 동안 옥천종택 오른쪽 담장 밑에 있는 우물을 이용하였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었는지 궁금하여 옥천종택에 살고 계시는 조석걸씨에게 묻는다. “주실마을은 풍수지리학적으로 배 모양의 땅입니더, 우물을 파거나 지하수를 파면 배에 구멍이 뚫려 배가 침몰 한다고 했어” 더 무엇을 물을 수 있겠는가? 풍수지리에 누구도 이유를 달지 못하고 수백 년 불편을 감수한 한양조씨 집성촌 마을에 고개가 숙여진다. 대문 오른쪽에 있는 창주정사의 돌계단을 오른다.  창주정사는 임산서당이라고 하는데 전망이 좋고 옥천 조덕린 선생을 기리기 위해서 지은 집이다. 만곡정사는 주실 입구 왼쪽 개울가에 있다. 멀리서 보면 한 폭의 그림이다.


글 | 김경식 (시인)

 http://www.iloveletter.or.kr/?_page=33 사색의 향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