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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과 소설의 향기/문학기행 기사

김유정 문학촌과 춘천

by 골든모티브 2008. 2. 25.

김유정과 춘천


 단풍이 든 가을날이나 봄꽃이 피기 시작하는 시기에 여행을 떠나는 일은 가슴 설레는 일이다. 마음을 비우고 허허로이 자연을 벗삼는 여행도 좋지만  테마를 만들어 떠나는 여행에 비할 바는 아닌 듯 하다. 특히 작품 속의 배경이 되었던 마을의 골목길, 산길, 들길, 강둑길을 따라 거닐면서 작가의 글을 읽고 등장인물의 이름들을 들먹이는 여행은 잊을 수 없는 추억을 남긴다.  불현듯 자신도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면, 비로소 참다운 문학기행의 진수를 맛 본 결과다. 그러나 문학기행의 일반적인 의미는 작가가 어떤 연유로 그 작품을 쓰게 되었으며, 주변의 역사와 지정학적인 위치를 확인시켜 주는데 있다.

이런 면에서 강원도 춘천시 신동면 증리에 있는 김유정생가를 찾아 떠나는 문학기행의 의미는 남다르다. 1930년대를 찬란하게 빛내고 스물아홉에 요절한 소설가 김유정(1908~1937)의 작품들은 부와 가난, 절망과 병마가 뒤섞여 이루어낸 명작이다. 1899년 경인선의 개통이후 처음으로 역명(驛名)이 사람의 이름으로 개명한 역이 있다.  

강원도 춘천시 신동면에 위치한 ‘김유정역’이다. 2004년 12월1일부터 이 마을 출신 소설가 김유정의 이름을 따 신남역이 김유정역으로 바뀌었다. 역명(驛名)을 사람이름으로 바꾸는 일은 쉽지 않다. 우리나라에서는 선례가 없는 일이기 때문에 더욱 힘든 일이다. 그럼에도 많은 난관을 극복하고 지역적 이기주의를 극복하였다. 이는 김유정 문학의 순수성 때문일 것이다. 「나의 고향은 저 강원도 산골이다. 춘천에서 한 이십여리 가량을 산을 끼고 꼬불꼬불 돌아 들어가면 내닫는 조그마한 마을이다. 앞 뒤 좌우에 굵직굵직한 산들이 빽 둘러섰고 그 속에 묻힌 아늑한 마을이다. 그 산에 묻힌 모양이 마치 움푹한 떡시루 같다 하야 동명을 실레라 부른다.」

1936년 조광(朝光)지 5월호에 게재된 <오월의 산골짜기>에 직접 자신의 고향을 서술한 부분의 일부다. 그의 고향마을과 생가를 찾는 기행은 문학적인 영감을 얻는 일이기도 하거니와 자연과 문화 및 역사가 어우러진 춘천을 탐방하는 기회도 제공한다. 春川은 이름만큼이나 자연적이다. 봄과 강이라는 이름이 시사하듯 물이 많고 산자수명하다. 춘천을 배경으로 한 문학작품은 윤대녕의 소설 ‘소는 여관으로 들어 온다 가끔’이 있다. 이 이 소설은 청평사, 소양호를 비롯한 춘천주변의 안개를 잘 묘사하였다. 또한 강원대 교수이기도 한 전상국의 소설 ‘동행’이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춘천이 문학기행의 장소로 자리매김 할 수 있는 것은 소설가 김유정이 있기 때문이다. 그의 문학과 삶의 궤적을 찾아가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김유정문학촌을 탐방하여야 한다. 강촌역과 남춘천역 사이에 있는 ‘김유정역’에서 약 200M 떨어진 위치에 김유정의 생가를 복원한 곳이 있다. 그곳에는 소설 속에 등장하는 실제 지명과 등장인물로 하여 이 땅에 살다 떠나간 가난한 농민들의 실상을 들여다 볼 수 있다. 한 때는 천석지주의 아들이기도 하였으나, 가난뱅이로 고향에 돌아와 소작하던 사람들과 더불어 살면서 쓴 소설들은, 작가가 살았던 1930년대의 농촌정서를 실존적으로 대변한다.  병마와 가난에 시름하면서도 우리말을 탁월하게 변모시킨 작가의 생애와 작품세계를 동시에 만날 수 있는 것은 행운이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http://cafe.daum.net/dj881206   가들마을 이야기 사진 발췌

 

김유정 생가는 조카 김영수씨와 금병의숙의 제자들에 의해 고증되어 복원하였다. 비록 초가집이지만 옥천의 정지용 생가에 비할 수 없이 크고 웅장하며, 강진의 김영랑 생가와 흡사하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복원된 생가 옆에는 김유정기념관이 있는데 그의 유품이 전시되고 있고 작가의 학적부와 호적부등이 작가의 실존을 엿볼 수 있게 한다. 특이한 것은 생가에서 마주 보이는 금병산자락과 인근의 마을을 배경으로 하고 등장인물도 고향 사람이다. 한국 문단사에서 이런 마을이 흔치 않다. 김유정의 농촌 소설 속에 등장인물과 배경은 거의 생가를 중심으로 한 인근마을과 자연을 배경으로 한다. 그러므로 춘천의 지정학적인 위치와 역사를 인식해야 김유정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춘천은 상고시대때 맥국(貊國)의 도읍지라고 하지만 문헌학 정보는 정확하지 않고, 단지 서기 737년 신라 선덕여왕때 군주를 두어 통치한 우수주(牛首州)라 하였다. 고려 때는 광해주(光海州)였다. 서기 1413년 조선 3대 태종때 춘천이란 이름이 처음으로 사용하게 된다. 이후 1887년 고종에 의해  현 강원 도청 자리에 이궁(離宮)을 지어 한양이 위태로울 때 피난처로 정하기도 했다. 1894년 원주에 있던 감영(監營)을 춘천으로 옮겨와 관찰사로 개칭하였다.  1910년 한일합방 후 강원도의 도청 소재지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6.25때는 도시가 폭격에 의하여 완전히 폐허화 되었으며, 춘천댐과 소양강댐의 완공으로 삼면이 아름다운 인공호수를 가진 지금은 인구 25만명의 관광 및 지식산업의 메카로 발전하고 있다. 북한강 유역의 중류에 자리 잡고 있으며 북한강과 소양강이 만나는 분지형태의 지형이 춘천이다.  역사유적 및 이 지역 문화축제도 다채롭다.

소양강댐 수문근처에 있는 선착장에서 배로 10분이면 닿을 수 있는 청평사는 고려 광종 24년(871년) 영현선사가 창건 하였다. 오봉산 계곡의 수려함 속에 구성폭포가 내 뿜는 소리를 들으면서 고려의 정원터를 돌아보면 세월의 흐름을 잊을 수 있다. 오봉산을 주산으로 한 춘천은 산과 호수가 어우러진 낭만의 도시답게 공지천은 이를 더욱 우아하게 만드는 곳이다. 축제도 많아졌다. 국제마임축제, 인형극제, 애니타운 페스티벌, 막국수 축제, 국제 연극제등은 춘천이 자랑하는 축제다. 의암호를 거쳐 화천가는 국도를 따라 가면서 바라 본 춘천시 전경은 가히 환상적이다. 필자가 몇 년전 찾아 나섰던 스위스의 루체른 호반이 아름다웠지만, 춘천의 호반도 이에 못지않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이 길을 따라 파군재 삼거리를 지나 동화사쪽 방향으로 좌회전하면 우뚝 솟은 왕산 아래 고가들이 서 있고 그 위를 거슬러 올라가면 고려의 충신 신숭겸의 묘역이 예사롭지 않게 누워있다.  태조왕건의 묘터로 점지하기도 했을 정도의 명당자리라는 것을 묘역에서 춘천 쪽을 바라보면서 알게 되었다. 아름드리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신숭겸 능에서 의암호 너머로 춘천시내가  보인다. 신숭겸능은 필자가 지금껏 어느 곳에서 볼 수 없었던 장엄한 묘역이었다. 남양주시에 있는 동구능에 있는 태조 이성계의 묘역보다 더 크고 위엄이 있는 모습이었으나 봉근은 평범하게 앉아있다. 봉분이 3개 있는데 이는 금으로 두상을 만들어 도굴을 막기 위한 방편이라 한다.

한말 의병장 유인석(1842~1915)의 고향이기도 한 춘천은, 이제 한류의 중심이 되어 일본여자들이 제일 많이 찾는 장소가 되었다. 일본을 배척한 의병장의 고향이지만 세상의 변화에는 도리가 없다. 이들을 겨냥한 것은 아니지만 오래전부터 춘천시내는 명동을 중심으로 한 먹거리가 많았다. 특히 닭갈비와 막국수는 춘천의 명물이다. 배우 배용준의 인기로 인해 명동에는 유난히 일본여자 관광객들이 많아 이곳의 상권은 호황을 누리고 있다. 40대 이후 세대에게 춘천은 ‘호반의 도시’라 하여 청량리역에서 기차를 타고 대성리역, 청평역, 가평역, 강촌역을 이어 달려가는 낭만이 피어나던 장소다. 70년대에는 통기타를 둘러메고 청량리역에서 서성거리다 보면 장발머리도 깎이고 미풍양속을 해친다고 하여 기타를 압수당하는 수모를 당했다. 암울한 유신치하에서  대학생 및 청년들이 기억하는 춘천은 서울에서 낭만을 찾아 하루만에 다녀올 수 있는 파라다이스같은 도시였다. 그 시절 주말의 경춘선 완행열차는 초만원을 이루었다. 단선이라 급행열차는 다닐 수 없었고 어떤 간이역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완행열차는 소박하면서도 질박한 간이역에 잠시 머무르다가 떠나곤 하였다. 기차가 마석역을 지나 산과 들, 여울을 지나면 대성리역에 도착하였다. 이때부터 북한강을 거슬러 기차는 달렸고 ‘강촌역’에 잠시 머물다 떠나곤 하였다. 역에서 내린 젊은이들이 북한강에 가설된 강촌다리를 건너던 모습이 지금도 삼삼하게 아른거린다. 그들은 지금 어디에 무엇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 모두가 중년 이상의 나이가 되었을 사람들이 불현듯 그리워지기도 한다. 이쯤에서 춘천의 명물 남이섬을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다. 한류열풍을 춘천의 남이섬과 춘천시내에서 발견하는 것은 이제 이상한 일이 아니다. 문화관광부 장관이 배우 최지우와 함께 일본의 고이즈미 총리를 방문했을 때 일이다. 그는 한국의 문화관광부장관과는 의례적인 악수만 나누고 최지우에게 남이섬에 대해서 물었다.

“겨울연가의 무대 남이섬에 꼭 가보고 싶습니다.. 전나무숲의 그 벤치는 아직도 그 자리에 있습니까?” 남이섬의 주인은 (주)남이섬이라는 회사의 소유다. 그러나 14만평의 섬에는 그 곳을  다녀간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의 추억이 아직도 머물고 있다. 당시에도 물론 많은 사람들은 남이섬에 가기 위해 가평역에 내렸다. 그러나 최근에는 텔레비전에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배용준 최지우 주연의 <겨울연가>로 인해 일본에서 온 여성 관광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다. 그곳에 조선초의 명장 남이장군이 잠들어 있음을 아는 사람은 흔치않다.  조선 태종의 넷째딸 정선공주의 아들로 무과에 급제하여 이시애난(1467년)을 평정하고 여진족을 토벌한 공로로 불과 26세에 병조판서에 오른 인물이다. 그러나 그 역시 독재자 세조의 총애를 입은 것이 화근이 되어 예종 때 역모사건에 연루되어 처형되었다. 그가 묻힌 섬이라 하여 남이섬이다. 지금은 연인들의 데이트 장소가 되었으니 세월이 무상하다.  25년전 기차안에서 가수 송창식의‘고래잡이’를 통기타 반주에 맞추어 부르기도 하였고, 지금은 고인이 된 김정호의 ‘날이 갈수록’을 구슬프게 부르기도 하였다. 시대는 우울하였지만 가슴에는 울먹이는 아름다움이 존재하였다.  

경춘가도는 이제 빈틈없이 유흥가로 변모하고 있다. 초라한 간이역은 화려한 유럽의 성처럼 웅장하고 화려한 러브호텔과 건물들에 가려 그 옛날의 추억을 회상하기도 어렵게 되었다. 변하지 않은 것은 오직 북한강이다. 금강산 부근에서 발원하여 철원군 일부와 화천의 골짜기들을 굽이 돌아 춘천댐과 의암호수를 지나서 북한강이  침묵으로 흐를 뿐이다.  가수 정태춘은 이런 북한강을 시적 분위기가 있는 가사에 곡을 붙여 <북한강에서>를 작곡하였다. 경춘가도를 달리다가 북한강을 바라보며 이 노래를 읊조리는 것은 여행의 묘미를 더한다.

‘저 어둔 밤 하늘에 가득덮인 먹구름이
밤새 당신 머릴 짓누르고 간 아침

나는 여기 멀리 해가 뜨는 새벽강에
홀로 나와 그 찬물에 얼굴을 씻고 

서울이라는 아주 낮선 이름과
또 당신 이름과 그 텅빈 거릴 생각하오

강가에는 안개가 안개가 가득 피어나오.’

 

변하지 않는 것은 오직 하늘이라 하였던가? 그러나 산과 강은 그래도 늘 그 자리에서 지나간 추억을 상기 시킨다. 춘천이라는 말을 그대로 풀이하면 봄과 하천이다. 사계절 중에서 봄과 강을 가지고 이름을 만든 춘천이란 지명은 특이하다. 필자는 25년 전부터 문학기행을 하고 있다.  필자가 간혹 당황스러웠던 부분은 고향 사람들이 작가에 관해 너무 무지하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제 지방자치제가 정착되면서 자기 고장에서 태어난 작가를 선양하는 일을 관이 직접 주도하면서 상황이 바뀌고 있다. 멀지않은 곳으로 북한강이 흐르고 금병산은 높고 넉넉하여 작가로 하여금 문학적인 상상력을 잉태하게 한 곳임을 실제 그곳을 답사하고 알았다. 또한 광산도 있었고, 서울에서 온 배들이 실래마을 근처에 정박하여 떠도는 사람들이 있었을 터이다.

이런 자연환경에서 김유정(1908~1937)은 강원도 춘성군 신동면 실래마을에서 8남매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 김춘식(1873~1917)은 향리에서는 참봉이라 불렀다. 어머니는 청송심씨(1870~1915)이며 춘천이 고향이다. 김유정은 청풍김씨 24세손인데 그의 고조 김기순이 실레마을에 처음으로 터전을 잡았다. 당시 막내들의 애환은 부모님이 늘 유년시절에 세상을 떠나시게 되는데 김유정이 그랬다. 8살 때 어머님과 10살이 되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인근에서 갑부로 통하던 그의 집안은 장남의 낭비벽으로 졸지에 가난뱅이 신세가 되었다. 가난과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으로 인해 그는 고독한 유년시절을 보내게 되었다.  휘문고보 4학년때 명창 박록주를 짝사랑한 것과 줄기찬 연애편지 구원도 이러한 어머니의 사랑을 잊지 못한 데 기인된 듯 하다.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너무나 커서 그가 사랑한 여성 박록주를 병적으로 사랑했다. 어쩌면  이런 사랑이 문학적으로 승화하여 그로 하여금 고통을 잊게 하는 카타르시스를 낳았는지 모른다. 형 김유근을 따라 서울로 이사한  유정은 12세 때인 1920년 재동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한다. 1929년 휘문고보를 졸업하고 연희전문 문과에 입학하였으나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인해 학업을 포기 하였다. 그 해 고향으로 돌아와 늑막염을 앓고 난 후, 1930년 전국 각지를 방랑하면서 여행을 하였다. 1931년 고향으로 돌아온 김유정은 금병의숙을 세워 농촌계몽운동을 추진한다. 그러나 역마살은 그를 고향에 두지 않았다.

 1933년 서울에서 셋방살이를 하면서 문학작품을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하였다.  <소낙비><산골 나그네>를 쓰고 1935년 조선일보신춘문예에 이 때 쓴 <소낙비>가 당선 되었다.  1936년 <노다지>가 조선중앙일보에 신춘문예에 가작으로 입선 되었다. 1937년 29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할 때까지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기력을 다해서 작품 활동을 했고 문단사에 그의 이름을 올려놓았다. 김유정의 소설31편에는 한자가 거의 없다. 식민지 시절의 농촌이 안고 있는 구조적인 모순을 희극적인  해학미로 구조화하여 쓰는 방식의 독특한 세계를 구축하였다. 웃음과 해학은 비참하고 고달픈 현실적인 문제 속에서도 분노감이나 눈물을 흘리는 방법을 자제하는 방법이다. 이는 상처를 예방하고 힘을 기르면서 미래를 예비하는 방안이 될 수 있다.

작가가 없는 도시는 얼마나 삭막한가?  춘천은 자연과 문학이 공존할 수 있는 토대를 김유정으로 하여 확보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고향마을의 지명과 토속어를 가지고  쓴 소설에는 우리 민중들의 언어가 오롯이 녹아 있다. 자신이 나고 자란 마을과 사람들이 등장하는 리얼리즘 문학을 강구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산골에서 나고 자라면서도 서울을 경험하였기 때문에 가능하였을 터이다. 자신의 고향을 떠나본 사람이 오히려 자신이 나고 자란 고향마을이 귀한 곳인지를 알고 있기에 허구의 소설 속에서도 지명과 토착어를 사용하여 썼다. 그의 청년시절 짝사랑은 지독하였다고 전한다. 당대 명창 송만갑에게 사사한 박록주(1905~1979)는 그보다 3살이나 연상이었으며 이미 전국적인 명창 반열에 올라  애숭이 김유정에게 마음을 줄 리 만무였다. 그러나 김유정은 이런 것에 아랑곳 없이 구애작전을 벌였고 사랑의 연정과 질투로 인해 가슴은 터질 것만 같았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고향 춘천 실래마을을 찾아 산과 들을 쏘다니면서 작품을 착상 하였을 것이다. 필자가 찾아간 금병산은 단풍이 들어 아름다웠다. 이 산 아랫마을이 그가 태어나고 자란 실래 마을이다. 그의 생가는 잘 복원되었는데 정갈한 정원과 단아한 정자가 조화를 이루고 있다. 연못에 비친 햇살이 눈부시다.  생가는 고증을 거쳐 완성된 집이다. 시월이 가고 있었다. 날씨는 눈물이 날 정도로 맑고 아름다웠다. 삽상한 바람이 살갗을 스칠 때마다 가녀린 작가의 고독과 슬픔을 이해할 수 있었다. 문학관내 작은 연못 가운데 있는 정자에서 금병산(해발 652M)을 바라본다. 정상에서 왼쪽으로 내려오는 등성이 부근이 ‘동백꽃’의 무대다. 색이 노랗다. 학술명과 표준어로는 생강나무라고 하는데 강원도 및 일부 충청도에서는 동백꽃이라 부른다. 노란 꽃잎이 산수유처럼 보이기 때문에 구별하기가 어렵다. 필자도 이른 봄에 피는 이 생강나무와 남도의 산수유를 구별하지 못하다가 최근에 전남 구례의 산수유축제 때 확실히 알게 되었을 정도다. 동네사람들을 계몽하기 위해 김유정이 세운 금병의숙 앞을 서성인다. 문학비에 그늘을 만들어 주고 있는 느티나무를 쓰다듬으면서 김유정 소설집을 펴 본다.  소설 동백꽃의 배경이 된 마을의 고샅을 두루 살핀다.  ‘동백꽃’을 언덕 위에 있는 신동초등학교의 교정에서 읽는다. 이 학교는 김유정의 사후에 개교한 학교다.

 “닭 죽은 건 염려마라. 내 안 이를테니”그리고 뭣에 떠다 밀렸는지 나의 어깨를 짚은 채 그대로 픽 쓰러진다. 그 바람에 나의 몸둥이도 겹쳐서 쓰러지며 한창 피어 퍼드러진 노란 동백꽃 속으로 푹 파묻혀버렸다. 알싸한 그리고 향깃한 그 내움새에 나는 땅이 꺼지듯이 왼정신이 고만 아찔하였다.

1936년 조광 5월호에 발표한 소설(동백꽃)은 향토색 짙은 농촌의 목가적인 사춘기의 남녀 사랑을 그리고 있다. 문학관 가까운 곳에 단편소설<봄봄>에서 봉필영감의 집터가 팔작지붕의 개량형 기와집으로 지어져 있고 깔끔하게 단장해서 누군가가 살고 있다.

<봄봄>에서 배참봉댁 마름으로 나오는 김봉필은 실레마을에서 욕필이로 통했던 실존인물이라 한다. 그는 욕을 잘해 이 마을에서 인심을 잃고 살았다. 김유정이 주막에서 술 마시고 금병산의 백두고개를 넘어 김봉필의 집을 기웃 거리다가 이 소설을 착상 하였다고 한다. 가난한 1930년대 농촌풍경을 그대로 옮겨다 놓은 듯하다. 데릴사위를 세워 노동력을 보충하려고 했던 가련한 농민들의 실상과 그 곳에서 벌어지는 일상의 언어들이 가져오는 순박한 언어들이 가슴을 아리게 한다. 김유정 소설 속에는 아리랑이 많다.

소설 <만무방>의 웅칠이 입을 통해서 소작쟁이의 서럽고 가난한 삶을 재현하면서 신세타령을 한 아리랑 가사를 지어 삽입하였다.


봉의산은 춘천의 주산이며 신연강은 지금의 의암호 부근을 가리킨다. 이렇듯 그는 고유 지명을 그대로 사용하여 아리랑 가사를 작사하여 소설속에 삽입하기도 하였다. 이런 것은 고향과 민중에 관한 애정이 없이는 불가능 한 일이다. 춘천이 낳은 소설가, 무지개처럼 나타났다가 무지개처럼 사라진 김유정을 이 지역 사람들은 많이 사랑하고 있다. 이미 1968년 그 어려운 시기에 <김유정문인비 건립추진위원회>를 만들어 춘천시 칠송동의 부근 경춘구도로 의암 호수변에 문학비를 세워 그의 업적을 기렸다. 매년 추모제와 김유정의 밤을 개최하고 선양사업에 최선을 다하는 춘천시민의 역량은 드디어 국내 최초로 철도역의 이름을 바꾸는 쾌거를 이룩한 것이다. 러시아에는 톨스토이역이 있다. 1910년 10월28이 가족들 몰래 가출하여 무조건 기차를 탄 톨스토이는 라잔 우랄 철도의 작은 간이역 아스타보역에서 쓸쓸하게 숨졌다. 그의 유언은 “ 진리를 나는 영원히 사랑한다...”였다. 지금은 이 역 이름이 <톨스토이역>이 되었다.  영국의 에딘버러시에는 시인이며 소설가인 스콧의 소설명을 딴 ‘웨이벌리’역이 있다. 소설가 스콧(1771~1832)을 기념하기 위해서다.  스콧이 말년에 병을 치유하기 위해 이탈리아로 갈 때, 영국 정부는 그에게 군함을 내 주었다. ‘인도와 셰익스피어를 바꾸지 않겠다’는 영국인들로서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자기 민족문학을 존중하지 않는 민족은 뿌리 없는 나무와 같다. 말라 죽는 나무처럼 민족도 사라진다. 그런데 휘문고보 때 단짝친구 소설가 안회남(1909~)에게 마지막 보낸 편지의 한 구절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닭과 뱀을  사먹고 병석에서 일어나고 싶다”.

당시 돈 백원을 마련하기 위해 안회남과 상의하던 이 편지의 구절이 가슴을 아리게 한다.

한 줌의 재가 되어 한강에 뿌려진 김유정의 최후는 바람에 날아가는 구름이었다. 그러나 문학의 단비는 자신의 고향 실레마을을 넘어 춘천시 전역에 내렸다. 작금에는 천박한 문화가 말초신경을 자극하며 사람들의 심성을 황폐화 시키고 있다.  현실적인 삶이 비정하고 삭막하여 살아가는 일이 고단해 질 때 길을 떠나보자. 떠나기 전 이 땅을 살았던 농민들의 삶을 해학적으로 그린 작품을 읽고 경춘선을 타고 김유정역에 내려 보자. 수필가 피천득의 <인연>이란 수필의 시작과 끝은 춘천이다. 교과서에 게재 되었던 인연의 첫 구절이 생각난다

 “지난 사월 춘천에 가려 하다가 못 가고 말았다.”

  <인연>의 마지막은 이렇게 맺는다.

“오는 주말에는 춘천에 갔다 오려 한다. 소양강 가을 경치가 아름다울 것이다.”

사랑하던 아사코와 인연을 시대별로 나누어 쓴 피천득의 이 수필은 지금도 감동을 주지 않는가?  이제 그런 감동과 첫사랑 같은 상큼한 설레임을 가슴에 새기며 길을 떠나자. 살갑게 다가오는 은밀한 그리움이  당신의 마음을 사로잡게 될 것이다.


글 | 김경식 (시인)

http://www.iloveletter.or.kr/?_page=33 사색의 향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