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이효석과 평창
작가의 고향을 찾아가는 문학기행은 삶을 추억하며 미래를 준비하는 여행이다.
‘메밀꽃 필 무렵’의 단편소설로 유명한 작가 가산(可山) 이효석(李孝石)의 고향 평창군 봉평으로 떠나는 날 아침은 부산하게 짐을 싸는 장꾼처럼 수선을 떨어야 했다. 때는 8월 중순이 막 지나고 하순으로 접어든 때, 바야흐로 메밀꽃이 필 무렵이다.
메밀꽃이 어디 강원도 평창의 봉평땅에서 만 피는 것이 아닐 진데, 사람들은 메밀하면 평창을 기억하게 하는 상징의 꽃이 되었다. 메밀꽃이 피기 시작하면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 일대는 '이효석문학제'로 축제판이다.
금년은 유별나게 법석거린다. 그의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이기 때문이다. 들리는 음식점마다 이 기간은 예약이 어렵다며 손사래를 친다. 우리 문학이 이렇게 상권을 잡아 본적이 있었던가. 봉평은 이효석의 작품으로 살아가고 있는 분위기다. 문학제니 뭐니 형식적인 행사도 필요하지만 직접 작품의 무대를 답사하는 일이 더욱 중요할 것이다.
비록 허생원과 조선달이 걸었던 달밤의 봉평에서 대화까지 80리 달빛길이 아니라도, 소설의 무대가 되었던 마을을 찾는 의미는 대낮이라고 하더라도 서정과 낭만이 어우러진 꿈길 같은 것이리라.
봉평으로 가는 길은 중부고속도로 호법 분기점에서 영동고속도로를 달리다가 이천, 여주, 원주, 새말을 거쳐 영동1호 터널을 지난다. 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 갑자기 나타나는 산속의 논과 밭들이 산재되어 있고 마을이 보인다. 장평IC다. 이곳으로 진입하여 오른쪽으로 270도 회전하여 봉평으로 가는 길로 접어들면 일단 목적지에 다 온 것이나 다름없다.
이 길을 따라 가는 길 왼쪽으로는 ‘메밀 꽃 필 무렵’에 나오는 허생원이 물에 빠져‘동이’에게 업혀 건넜을 개울물이 흐른다. 흥정천이다. 홍정천에서 흘러 내려온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을 가진 이 여울물은 맑고 감미롭게 산굽이를 휘감아 돌아간다.
봉산서재가는 길
장평인터체인지에서 봉평쪽으로 1KM지점의 도로 오른쪽에 ‘판관대’가 있다. 이곳은 신사임당이 이율곡선생을 회임(懷妊)한 곳이라 전해진다. 평창군의 연혁에 따르면 신사임당은 중종 31년(1536년) 강릉 친정에서 흑룡이 방에 드는 꿈을 꾸고 이곳 판관대(判官岱) 자리에 있던 백옥포리 집에 당도하였다. 때마침 한양에 가 있던 율곡의 아버지 이원수(李元秀)공이 와 있었다. 그날 밤 율곡을 잉태하게 된다.
봉산서재(蓬山書齋)는 신사임당이 이율곡선생을 이 마을에서 잉태한 것을 기념하여 창건한 사당이다.
1896년 고종에게 상소를 올려 판관대를 중심으로 한 사방 5리를 서재위토(書齋位土)로 하사(下賜) 받기위해 상소를 올린 사람은 이 마을에서 살던 유학자 홍재홍이다. 그러나 당시 국정이 혼미하여 번번히 무효가 된다. 1906년에 강릉도부에 허가서를 내서 허가를 받고 주민일동으로 건축하여 오늘에 이른다. 서재에는 율곡 이이선생과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선생의 영전이 있다.
차에서 잠시 내려 봉산서재에 올라 조선의 대학자인 이율곡선생의 출생 비밀을 간직한 곳을 둘러보는 일도 의미 있는 일이 되리라.
봉산서재 아래에 이런 저런 기념비를 바라본다. 이런 기록들이 골골마다 있는 우리나라는 문화민족임이 분명하다. 잠시 험한 산길을 휘감아 돌아 아득한 산길을 걸어서 강릉 오죽헌으로 돌아가던 신사임당의 이별의 아픈 마음을 상상한다. 사람살이는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겠지만 이별의 슬픔은 당연히 그때가 더 크리라.
전화가 있나 메일이 있나 그저 걸어서 며칠씩 가야 하는 길이다. 한 번의 이별은 한 달이고 일 년이고 기다리며 애간장을 타게 만든다.
이곳에서 봉평까지 약 5KM의 들과 산들은 흥정천을 왼쪽에 두고 돌고 돌아간다.
평창동계올림픽의 유치 실패 후에도 이곳저곳에 홍보용으로 세워둔 아치형의 구조물들이 그대로 방치되어 있어서 마음을 아리게 한다. 그러나 강원도민과 평창군민들의 성원은 대단했다. 이런 저런 실패와 수마 속에서도 메밀밭에서는 소금을 뿌린 듯한 메밀꽃들이 붉은 대궁을 살포시 내보이며 소담스럽게 하얀 꽃송이를 흔들고 있다. 그러나 9월의 메밀꽃축제에 맞추기 위한 메밀밭에는 이제야 새싹이 올라오고 있는 중이다. 이런 실패에 그래도 희망은 이효석이 이 고장 출신이라는 것이다.
사람에게 가장 좋은 신체리듬을 가져다준다고 하는 해발700M의 평창도, 이효석의 고향이 아니라면, 주변에 산재해 있는 스키장이 그저 유희적인 놀이터에 불과하다.
이런 이유로 별로 돈이 되는 일이 아닌데도 평창사람들은 부지런히 메밀꽃을 피운다. 이런 순박한 사람들이 있기에 자연과 건강, 문학이 어우러진 환상적인 공간으로 평창은 자리매김하고 있다.
평창군지를 인용하면 평창은 고구려 당시에는 욱우현, 신라 경덕왕(AD757년) 때에는 백오현이라 하였다가 고려우왕(1387) 평창군으로 승격하였다. 잠시 평창현으로 강등되기도 하였으나 조선 태조원년(1392년)에 이르러 확실하게 평창군으로 자리를 잡았다. 1895년 8도제가 폐지되고 충주부 평창군에 속하였지만, 1896년 13도제가 실시되면서 강원도 평창군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사방의 꽃들이 떨어지고 시들어 갈때 피어나는 메밀꽃, 그 꽃밭들을 돌고 돌아 우리는 아직은 아침의 기운이 남아 있는 작은 산읍을 향해서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허원생과 동이, 조선달이 가던 달빛 내리 깔리는 산길은 아니지만 그 언저리 어디쯤을 달리고 있는 것이다. 사운거리는 꽃들을 보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승용차의 창밖을 그냥 보는 것만으로도 족하다. 어떤 이는 추억을 더듬으며 아름답고 잘나가던 시절들을 곰씹을 것이고 누구는 가난하고 슬픈 추억들을 회상하게 되리라. 그러나 추억은 거의 모든 것들이 아름다움으로 남게 된다는 것을 평창의 메밀꽃들을 보면서 다시 생각하게 된다.
달밤에 산길을 걸으면서 허생원이 고백했던 자신의 비밀스런 사랑이야기도 그 분위기가 만들어 낸 추억이고 길을 가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고백이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길을 간다고 하는 것은 당시의 장돌뱅이들에게는 징역같은 고단한 일상이었다. 허생원이 몇 십년간 숨겨온 자신만의 은밀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추억을 털어 놓을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은 그 절묘한 분위기였을 것이다. 달빛 깔린 산길을 가면서 만나는 메밀꽃들을 보면 자신의 지나온 이야기들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허생원은 이런 연유로 메밀꽃이 핀 어느 해 여름의 진한 사랑의 추억을 이야기 할 수 있었다.
늦여름에 찾아 온 이곳 평창, 지나치는 논과 밭 사이로 난 길들, 퇴락한 민가를 바라다보면서 욕심을 삭제해야 아름다운 모습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았다. 평창은 강원도의 남부에 속하는 산악지역으로 동쪽은 강릉시, 정선군, 서쪽은 횡성군, 남쪽은 영월군, 북쪽은 홍천군이 인접해 있다. 표고 700M이상이 전체 군 면적의 60%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산간 고냉지로서, 겨울이 길고 눈이 많이 내린다. 이런 지역적 특성으로 용평 리조트와 인근의 휘닉스파크가 겨울이면 사람들의 성황을 이루고 있는 곳이다.
이효석 생가
이효석의 고향인 봉평면은 지리적으로 태기산이 남북으로 뻗어있는 동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쪽은 대화면이고 서쪽은 횡성군 둔내면과 북으로는 홍천군 서석면과 내면을 경계를 이루고 있는 고장이다. 봉평면은 본래 강릉군 지역으로서 태기산(泰岐山 1215M)과 의풍포(義豊浦)의 머리글자를 따서 기풍면(岐豊面)이라 했다. 양사언(揚士彦)의 호(號)인 봉래(蓬萊)의 봉자(蓬字)와 평촌리(坪村里)의 평자(坪字)를 따서 봉평면(蓬坪面)으로 칭하기도 했다. 그러나 철종 8년에 다시 기풍면으로 변경하였다가 고종 14년(1877년)에 봉평면으로 개칭되었다.
봉평면을 흐르고 있는 흥정천은 흥정산에서 발원하여 사계절 언제나 맑은 물이 흐르는 아름다운 주변경관과 냉수성 어류인 열목어와 송어등이 다량으로 서식하고 있다. 기암괴석과 울창한 숲 속으로 조화롭게 이루어진 흥정계곡은 최근에 ‘허브나라’라는 아름다운 공원이 만들어져 허브향기를 뿜어내고 있다.
봉평에서 승용차로 15분 거리에 있는 ‘허브나라’는 계곡 쪽 태기산 자락에 은밀하게 감추어져 있다. 페퍼민트, 라벤더, 로즈마리, 데이지, 케모마일, 스위트배질, 박하 향기라도 맡으면서 산기슭에서 가끔 열리는 ‘별빛무대’ 무대에서 열리는 음악회에 참석하는 일도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 만발한 꽃들 사이로 꽃이 지고 있다. 꽃이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면, 꽃의 아름다움도 없을 것이다. 이제 다가올 가을은 겨울이 기다리고 있어서 더욱 처연한 이별의 그리움으로 이별을 할 수 있는 것인지 모른다. 늦여름의 추억을 만들기 위해서 사람들은 꽃향기에 취해있지만 진정한 추억은 가슴으로 담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문학기행을 하면서 알게 되었다.
평창땅은 옛날부터 메밀을 많이 심어왔다. 메밀은 가녀린 대공을 가진 연약한 작물이지만 꽃을 피울 때는 밭들이 모두 하얀 꽃들로 변해서 이 땅을 살아왔던 백성들의 숨결이 들리는 듯하고,가을 한때 순백의 눈 세상으로 혼동시키기도 한다.
우리 일행은 이런 시기를 일정으로 잡은 것이고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의 가장 극적인 장면을 음미할 수 있음에 감사했다.
진짜 메밀꽃 필 무렵에 봉평에 가는 것이다. 해마다 이효석문학제가 열리고 있는 봉평은 큰 축제분위기다. 많은 장사꾼들로 인해 장터가 형성된다. 섶다리도 만들어 지곤 했다. 사람들은 조심하면서 여울을 건너게 될 것이다. 큰 돌배나무 서있는 가산공원으로 이어지는 골목길은 인산인해를 이룰 것이다. 봉평 탐방 벌써 다섯번째다. 그러나 봉평 장날의 방문은 처음이다.
오늘은 봉평 장날이다. 봉평은 5일장이다. 2일.7일에 맞추어 장이 선다. 그런데 봉평 장날은 날이 더워서 인지 무싯날보다 한산하다.
‘메밀꽃 필 무렵’이라는 70년전 단편소설이 강원도 산간지방에 있는 이름 없었던 마을을 전국적으로 유명한 마을을 만들어 놓았다는 사실에 문학의 위력을 실감한다.
가산(可山) 이효석(李孝石 1907~1942)은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 창동리 남안동 681번지에서 아버지 이시후와 어머니 강경홍 사이에 태어났다. 창동리 마을은 조선시대부터 창고가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그의 봉평에 관한 많은 추억들은 평창공립보통학교를 6년 동안 다니면서 만들어 졌을 것이다.
1920년 평창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이효석은 조선의 수재들만 입학한다는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영어영문학과에 입학하여 대학재학중에 단편소설 ‘도시의 유령’을 발표하여 문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
1931년 함경북도 경원출신 이경원과 결혼하고 일본인 은사인 쿠사부카 조오지의 소개로 조선총독부 도서과에 취직하나 잠시 근무하다가 주변의 눈총으로 그만둔다. 이 무렵 단편소설 '노령근해'를 발표하지만 작품성이 떨어지는 작품으로 평가 받고 있다.
유진오, 이무영, 채만식, 조벽암, 박화성, 유치진등과 함께 '동반가 작가계열'에 속하기도 하였다. 동반자 작가는 러시아 공산주의 혁명 당시 공산주의 운동에는 직접참가 하지 않으면서 혁명운동에 동조하던 작가를 가리키는 용어이다.
우리나라의 동반자 작가 활동은 계급주의 문학운동이 왕성하게 일어난 1920년대 말부터 계급주의 문학이 일제로부터 탄압을 받으며 해체되기 시작하는 30년 대 초반까지 이루어졌다.
팔월의 습기 먹은 공기 알갱이들이 메밀꽃에 싱그러움을 더 해주는 오후, 개울건너 창동리에 있는 기와지붕으로 바뀐 이효석 생가 앞마당을 서성거린다. 소설‘메밀꽃 필 무렵’에 나오는 주인공들을 기억해 본다.
허구지만 작품에서 허생원의 짧지만 애틋한 사랑을 만들어 낼 줄 알았던 것은 이효석 본인의 마음을 드러낸 일면이라고 여겨진다. 그는 평창보통학교를 다니면서 보았을 흥정천가의 어떤 물레방앗간을 은밀한 사랑의 장소를 만들었다. 당시에 육체적인 사랑을 하기에 물레방앗간보다 더 좋은 장소는 없었을 터이다. 소설속의 물레방앗간이 절묘하게 개울 건너에 그대로 조성되어 있다. 물레방아는 물레와 방아의 합성어로 물레가 돌아 방아를 찧는 것이다. 디딜방아는 사람의 힘을 이용하고, 물레방아는 물의 힘을 이용하여 방아를 돌린다. 물레방아는 굴대에 달린 2개의 축에 의해 2개의 방아를 동시에 움직일 수 있어 사람의 힘을 들이지 않고 디딜방아보다 몇 배의 힘을 발휘할 수 있다.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날 새벽에 떠나 봉평에 도착하니 아침이다. 메밀국수와 메밀전병으로 아침 식사를 하였고 점심은 메밀싹을 넣은 비빔밥을 먹었다.
가을을 준비하는 늙은 농부들의 얼굴들이 내 아버지 어머니의 모습으로 다가오던 들녘, 산골농부들의 가을준비는 치열한 것이다. 여름의 노동이 없으면 가을 수확의 결실도 없듯이 무더위가 없다면 가을의 서늘한 바람도 매력없는 계절이 되어 가을 여행도 시시하게 될 지 모른다. 이제 사람들은 가을을 기다리고 있다. 어느새 구월이 가까이서 미소지으며 살랑이는 미풍으로 속삭이고 있다.
이효석의 생가로 가는 길은 흥정천 다리를 건너 물레방앗간을 지나 비포장 길을 15분쯤 걸어가면 보인다. 초등학교 운동장 크기의 밭뙈기 전부에 메일을 심었지만 아직은 새싹에 불과하다. 9월에 시작되는 이효석문학제에는 이곳은 온통 메밀 꽃으로 만발하게 될 것이다. 메밀꽃이 축제의 꽃으로 활용되고 있는 것은 세계에 유례가 없는 일이다. 메밀은 우리의 선조들 중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심고 추수하여 먹어야 했던 음식이었다. 지금에야 별미로 인정을 받고 있지만 옛날에는 부자들은 먹지 않았던 것이 메밀이다.
곡식으로 별로 인정을 받지도 못하고 천덕꾸러기 마냥 산비탈 밭이나 화전밭에 심어 가난한 농부의 양식이 되기도 했다. 결국 메밀꽃은 가난한 농부들에게는 꽃이 아니라 곡식이 되어야 하는 과정에서 보이는 어떤 든든한 존재였지, 도회지적 유희의 꽃들이 아니었다. 메밀꽃이 아름답다고 할 때 마다 나는 가난했던 소작쟁이들을 생각하면서 생가주변의 메밀꽃을 바라보곤 했다.
메밀은 고맙게도 이 땅의 서러운 소작 농부들이 지주의 논과 밭에 심을 수 없는 화전(火田)에 씨를 뿌려도 살아서 싹을 피우고 꽃을 피웠다. 이 메밀꽃이 떨어지고 생기는 알갱이를 털어서 가루를 내어 묵과 국수로 연명하게 하는 고마운 구황(救荒)음식이 되어주었다.
이효석생가는 퇴락하였으나 반듯하게 서서 듬성듬성 방문하는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다. 생가를 방문하러 온 사람들은 이효석선생의 발자취를 찾으려 하지만 그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은 단아하고 호젓하게 서있는 생가이외엔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생가 옆에 잘 지어진 황토집은 생가에서 이효석선생을 기념하는 것이 아닌 이 나라를 먹자 문화로 만든 음식점이라고 생각되어 외면한다.
한국문인협회에서 제작한 '가산 이효석 생가'팻말 앞에서 기념사진 촬영을 하고 마당 앞에 있는 약 1000평쯤 되는 넓은 관상용 메밀밭을 바라본다. 단순한 메밀밭이 아니다. 축제를 위해 심어진 것이다. 그러나 이 땅 민중들의 애환들이 꽃으로 부활하는 듯 새싹처럼 가녀린 잎들이 바람에 흔들린다.
이효석은 간혹 밤길에 봉평면 소재지인 창동리에서 남안골까지 개울 건너 약 20분쯤을 걸어서 지금의 이 생가로 돌아오곤 하였으리라.
이 생각을 하면서 이효석문학관을 관람하면서 '메밀꽃 필 무렵‘의 한 대목을 슬쩍 읽어본다.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 들리며 콩 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 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우리나라에 이만한 작품을 쓸 수 있는 작가가 얼마나 될 것인가.
이 향토적이며 낭만적인 표현력을 만들어 낼 수 있었던 요인은 작가 자신이 산골의 밤길을 홀로 걸어보지 않고는 도무지 어려운 창작이라고 여겨진다.
이효석은 유년시절에 밤길을 걷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생가와 평창읍까지는 100리 산길, 비록 하숙을 하였다고 하지만 주말이면 산길의 풀섶을 헤치고 도랑을 건너 집으로 가곤 하였을 터인데, 이때의 경험들이 “짐승같은 달의 숨소리”같은 언어를 만들어 낼 수 있었으리라. 이런 서정적인 서술들은 달밤에 산길을 가지 않은 사람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는 구월 초의 어느 날 쯤에 달빛에 의지해 산길을 가면서 고향주변의 산비탈에 있는 밭에 산재(散在)에 있었던 흐드러지게 핀 메밀꽃들을 보게 되었을 것이다. 산길을 가던 사람들 중의 한 부류였던 허구의 인물이며 장돌뱅이들인 허생원과 동이, 조선달 이라는 사람들을 등장시켜서 아름답고 가슴 아린 이야기를 만들어 내었다.
문학도 일종의 경험이라고 말한 사람은 ‘릴케’이지만 이효석 자신이 달빛에 의지하여 산길을 걸어본 경험이 없었다면, 결코 메밀꽃이 피어나고 있는 산마을의 분위기를 이토록 섬세하고 아름답게 그리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이효석의 문학세계를 한마디로 요약할 수는 없지만 도덕과 윤리적 관계, 인간의 역사보다는 애욕과 자연이 함께하는 인간의 문제를 다룬 작품세계를 표방하였던 심미주의 세계관을 가진 작가다. 특히‘메밀꽃 필 무렵’은 한국 현대 단편소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의 백미로 평가받고 있다. 인간의 원초적 본성인 애욕적인 사랑을 시적이며 건강하고 아름다운 작품으로 승화했다.
전에는 물레방아터에서 이효석 문학관으로 오르는 길을 택했다. 이 길은 숲길이라 운치가 있지만 이번에는 승용차로 문학관까지 오른다.
평창군에서 2002년에 개관한 이효석 문학관은 규모와 시설에서도 외국의 어느 유명한 작가의 문학관에도 뒤지지 않게 생가가 내려 다 보이는 아늑한 곳에 앉아 있다.
문학전시실, 문학교실, 학예연구실로 구성되어진 문학관은 건축양식도 거만하지 않고 우리네 기와집과 서구풍이 혼합되어 보인다. 몇 몇 사람들이 유품과 초간본 책, 이효석 선생의 작품이 발표된 잡지와 신문을 아주 자세하게 관심을 갖고 관람하는 것에 작가의 한 사람으로 자긍심이 들기도 한다.
이중에서도 특히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것은 아무래도 그의 대표작인 '메밀꽃 필 무렵'에 관한 부분이다. 늙은 허생원은 냇물을 건너다가 발을 헛디뎌 넘어지는 바람에 물에 빠지고, 동이의 등에 업힌다. 동이가 왼손잡이며 그의 어머니 친정이 봉평이라는 것을 듣는 순간 동이가 자신의 아들이라는 확신한다. 그들은 동이의 어머니가 살고 있는 제천방향으로 함께 걸어간다.
이 부분에서 허생원의 사랑의 추억을 동정 할 수 있는 사람은, 삶과 사랑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 1942년 5월 25일 불과 서른여섯이라는 나이에 결핵성뇌막염이라는 병명으로 사망한 이효석 선생은, 평창군 진부면 논골 이라는 곳에 안장되었다가,1998년 영동고속도로 확장공사로 묘소가 파주로 이장되었다.
그의 묘소가 고향마을에 자리잡지 못하고 멀리 파주로 이장되어야 했는지 그 의문을 풀지 못하고 문학관을 내려와 흥정천의 다리를 건너 충주집과 그 언저리에 있는 가산공원의 동상 주변을 서성거렸다. 생가와 묘소가 함께 있으면 그 보다 더 좋은 문학기행은 없다.
가장 좋은 예는 미당 서정주다. 그의 생가 건너편에 묘소가 누워있고 생가 옆에 문학관이 앉아 있다. 오히려 이효석묘소는 생가 근처에 있던 것을 불행하게도 멀리 파주로 이장을 했으니 답답하다.
거목이 되어 있는 늙은 돌배나무는 몇 년 전 봄에 찾아 왔을 때 가슴이 울렁거리도록 하얗고 처연하게 피었었다.
이번 방문은 팔월도 하순 동네 사람들이 떨어진 돌배를 줍고 있다.
봉평에 있는 가산(이효석) 공원
가산공원에 있는 이 돌배나무 몇 그루는 습기를 먹은 삽상한 바람에 가을이 오는 것을 기다리듯 움츠리고 그 자리에 서 있다. 충주집 팻말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고 세트장처럼 지어진 집은 무너지고 있다.
봉평을 떠나려는 데 늦여름 더위가 대단하고 햇살은 따갑고 눈부시다.
비록 달빛은 없었지만 짙게 푸르른 팔월의 바람은 메밀꽃을 흔들며 마지막인사를 하게 만들고 있다. 코끝을 스치는 허브향기가 맑은 향기로 머리를 적신다.
흥정계곡에 숨어 있는 ‘허브나라’에서 허브향기를 마시고 수량 많은 계곡의 개울을 따라 내려오면 기분은 맑고 상쾌해진다. 이제 산 월정사를 찾아 길을 나선다. 오대산으로 가기 위해 장펴IC로 진입하여 영동고속도로를 달린다.
이내 진부에 닿는다. 진부는 이효석 선생의 부친이 당시 면장을 하고 있었던 이효석의 제2의 고향 같은 곳이다.
묘소도 파주로 이관하기 전에 이곳에 자리 잡았던 곳이 아닌가. 이곳에서 오대산 가는 길은 편안하고 아름답다.
고냉지 채소와 이국적인 분위기의 농촌모습이 나그네의 낭만적인 심기를 건드리는 곳이다. 백두대간의 산등성이들이 목화구름 아래로 넘실거린다.
백두대간은 아름답고 박력있게 금강산, 설악산을 넘어 대관령을 스치며 오대산을 만든다. 그리고 태백산, 소백산을 품는다. 오대산은 차령산맥의 시작이다. 치악산과 손잡고 충청남북도를 통과해서 서해의 대천 앞 성주산에서 차령산맥은 끝난다.
백두대간이 차령산맥으로 분산되는 꼭지점인 차령산맥의 발원지인 오대산은 영동고속도로 장평IC로 진입하여 진부IC로 다시 나오면 지척이다. 오대산은 비로봉(1563m)이 주봉이다. 산이 높고 깊기에 여러 고을로 나눠지게 되니 강릉시와 홍천군, 평창군이 경계를 이룬다. 비로봉과 호령봉, 상왕봉, 동대봉, 두로봉의 해발 1400M가 넘는 다섯 봉우리가 있어 오대산이라고 불린다. 동쪽으로 갈라진 노인봉 아래로는 소금강이 아름답게 몽실 거린다.
원래 오대산은 중국 산서성에 있는 청량산의 다른 이름이다. 이 산은 자장율사가 당나라 유학때 공부했던 산이다. 그가 신라에 귀국하여 전국을 순례할 때, 백두대간의 가운데 있는 산의 형세를 보고 중국 오대산과 흡사하여 오대산이라 하였다. 오대산은 한라산, 금강산, 지리산과 함께 우리나라 명산중의 하나다. 신라 선덕여왕 때의 자장율사 이래로 천년 넘게 문수보살이 1만의 권속을 거느리고 살고 있는 곳으로 알려져 왔으며,월정사와 상원사라는 사찰이 오롯이 자리 잡고 있는 산이 아닌가.
월정사에서 상원사로 가는 숲길 언저리에 있는 '영감사'에는 조선왕조실록등 귀중한 사서를 보관하던 '오대산사고지'가 있다. 상원사 가는 길이 바빠서 이곳을 그냥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아쉽다. 월정사 입구의 전나무 숲길은 걸어서 올라가야 제격이다. 그러나 승용차를 가지고 온 사람들은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거꾸로 숲길을 갔다 와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숲길을 가다가 잠시 나무사이로 비집고 들어간 개울에서 발을 담그고 흐르는 물소리를 듣게 되면 세상사 시름을 잊게 되리라. 팔월이지만 가을바람이 서늘하고 하늘은 맑고 청아하며 푸르다. 이 행복감을 어찌 할 것인가.
오대산 상원사에서 월정사로 내려오는 길고 길었던 비포장 어둔 길에서 이효석의 짧았던 생을 생각했다.36세에 요절한 이효석이 남긴 사랑 이야기인 “메밀꽃 필 무렵”의 한 대목이 떠올랐다.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소설가 이효석의 궤적을 밟으며 설레는 가슴을 누르며 낭만의 추억을 남기고 떠난다. 어둠이 내리고 있다.
식민지의 궁핍하던 시대에 멋쟁이로 살려고 발버둥 쳤던 한 사내가 아직도 내 가슴에 살아서 떠나지 않는다.이효석, 이 고장이 낳은 위대한 작가, 메밀꽃이 존재하는 한 그는 영원히 살아 있을 것이다. 아니 우리 민족이 존재하는 한 언어의 감칠맛 있는 작품인 '메밀꽃필무렵' 표현들이 살아서 옛 우리 조상들의 사랑을 노래할 것이다.
이효석의 고향, 평창군 진부와 봉평이 시나브로 어둠속으로 멀어지고 있다. 간혹 그의 생애와 작품들이 내 가슴에 살아 꿈틀거리면 언제고 다시 봉평을 찾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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