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이어령이 말하는 '만해 詩의 정신']
"문학과 삶의 경계 허문 만해… 그 포용의 사상 되살려야"
고은 시인은 만해축전과 인연이 깊다. 축전 대회장을 오랫동안 맡았고, 올해는 축전의 부대행사인 현대시 100주년 기념행사의 기조연설도 한다. 이어령 전 장관은 최근 '어느 무신론자의 기도'라는 첫 시집을 발표하며 만해가 먼저 걸었던 시의 길을 따르고 있다. 시를 통해 만난 만해는 어떤 인물이었나.
▲고은=만해는 풀에 비유한다면 평생 누워본 적이 없는 풀 같은 삶을 사신 분이다. 시인으로서는 김소월에 버금가고 스님으로는 마곡사 주지를 지낸 고승 송만공(宋滿空:1871~1946)의 경지를 한 몸에 지녔으며, 동시에 독립운동가로도 큰 활약을 했다. 65년을 사신 분이, 다른 사람이라면 100년 넘게 살아도 못할 업적을 유산으로 남겼다.
▲이어령=만해는 문학을 통해 일찌감치 포용의 세계를 선보인 분이다. 요즘 '크로스 오버'니 '통섭'이니 하는 용어들이 많이 쓰이고 있는데, 만해야말로 문학과 문학의 경계, 문학과 사상의 경계, 문학과 삶의 경계를 일찌감치 허물었다. 시 '님의 침묵'에 '날카로운 키스'라는 표현이 있다. 또 시집에 수록된 '군말'을 보면, '길 잃은 양', '장미' '마시니'(이탈리아 정치가 마치니를 지칭)란 표현이 나온다. 불승(佛僧)이면서 연꽃이 아닌 장미를 노래하고, 기독교적 메타포를 사용한 시인이 만해다.
- ▲ 올해 열리는 만해축전에서 유심작품상 대상을 받는 고은 시인(왼쪽)과 만해대상 문학 부문을 수상하는 문학평론가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이 만해의 포용사상을 오늘에 잇는 방안에 대한 토론을 벌였다.
▲이=경계를 허물고 하나되는 만해 사상의 핵심이 바로 '님'이라는 어휘에 있다. 그런데 한국인에게 '님'은 거의 유전자 속에 자리잡은 속성과 같은데도 정작 우리는 그걸 모르고 있다. 실제로 '님'자가 우리 말에 얼마나 많이 쓰이나 보라. 하느님처럼 거룩한 것에서부터 자연의 무생물인 해와 달에게 모두 쓸 수 있는 표현이 바로 '님'이다.
▲고=우리말의 '님'은 누군가를 섬기는, 우리의 훌륭한 문화적 전통이 반영돼 있는 말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환경'이란 말을 좋지 않은 용어라고 생각한다. 그 말 속에는 나와 인간은 중심이고 자연은 주변이라는 생각, 나와 남을 주체와 객체로 나눠버리는 대결적인 사고방식이 깔려 있다.
▲이='님의 침묵'은 의미라는 측면에서 볼 때 굴원(屈原)이 쓴 시 '이소'(離騷)에서 비롯된 동양적 정서의 연군가(戀君歌)인데, 수사학적으로는 패러독스이고, 철학적으로는 형이상학이다. 동양문학을 한 사람이나 서양문학을 한 사람이나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만해의 문학이다.
―시단에서는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가 발표된 1908년을 기점으로 해서 올해를 현대시 100주년으로 본다. 그러나 현실은 시 문학에 대한 무관심을 극복하는 것이 새로운 과제로 떠올라 있다.
▲이=현대시는 이미 과거의 형태를 벗고 새로운 모습으로 변신 중이다. 광고 카피를 시로 보지 않을 이유가 뭔가. 바쁜 시대이다 보니 긴 드라마보다는 짧은 것을 선호하고 산문보다는 시적으로 압축된 글이 사랑받는다. 21세기의 시는 형태를 바꿔 새롭게 탄생할 것이다.
▲고=그간 광고에 출연해 달라는 제안이 있었지만 모두 거절했다. 그런데 얼마 전 내 시의 문장을 광고에 활용하고 싶다는 제안이 들어왔길래 허락하며 실은 놀랐다. 시장의 논리와 문학의 논리는 불화하는 줄 알았는데, 시가 광고와 만나는 것이 새롭더라. 전에 일본에 갔을 때 어느 자리에서 "나는 이 세상에 취하러 왔다"고 했더니 그 말이 그대로 광고 카피로 쓰이더라.
―만해대상은 올해 문학과 학술은 물론, 평화, 포교 분야에서 시상하고, 수상자도 특정 종교라든가 문학 장르에 구애받지 않는다. 우리 현실을 돌이켜볼 때 이런 포용의 세계가 더욱 아쉽다.
▲이=하고 싶은 말이 있다. 요즘 10대들을 이용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에게 왜 어른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대신 말하게 하는가. 청소년 시기에는 그들에게 요구되는 덕목을 키우는 데 힘써야 한다. 아이들은 아이들답게 키워야 한다.
▲고은=그러나 1950~60년대에도 청소년들을 권력에 활용한 적이 있다. 그걸 뼈아프게 반성하며 오늘의 현실을 진단해야 한다.
▲이=톨레랑스(tolerance·포용)를 흔히 정신적인 세계로만 보는데, 실은 우리는 매일 먹는 행위를 통해 몸으로 톨레랑스를 하고 있다. 짐승의 피를 주사로 맞으면 거부반응으로 죽는데, 입으로 먹으면 영양이 된다. 정신적으로도 남의 생각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죽을 것인가, 제대로 먹어 영양으로 삼을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철 늦은 이념투쟁을 계속하면 알레르기가 생긴다.
▲고=내 생각은 조금 다른데…. 지금의 갈등을 정부와 시민사회나 지도층이 해결할 게 아니라 그냥 놔뒀으면 한다. 나는 역사적 진행을 천시(天時)나 천운(天運)같은 것으로 파악하고 싶다. 전략적으로 개입하거나 해석하려 들지 말고 그냥 놔 두고 보자. 내게는 이 모든 것이 하나의 긴 과정으로 보인다.
만해축전 10주년
만해사상실천선양회와 강원도·인제군·조선일보사가 1999년부터 해마다 백담사 만해마을에서 주최해 온 만해축전이 올해로 10년째를 맞았다. 올 축전은 특히 현대시 100주년을 기념하는 다양한 여름 문화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시단에서는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가 발표된 1908년을 한국 현대시의 출발점으로 본다.
'한국현대시 100년의 반성과 전망' 등을 주제로 한 국제학술심포지엄이 12일 오후 개최되고, 12일 저녁엔 김남조·고은·신달자 시인들이 직접 자작시를 낭송하는 '현대시 100주년 기념 문학의 밤', '만해시인학교' 등이 열린다. 또 '국제문학심포지엄' 등 문학·학술행사와 전시회가 열린다. 축전의 하이라이트인 만해대상 시상식이 12일 오후 5시에 시작되고, 유심작품상 시상식은 하루 앞서 11일 오후 6시에 열린다. /조선일보, : 2008.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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