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의 향기/詩와 시인

내 시의 본적지는 한국전쟁 폐허-고은

by 골든모티브 2008. 9. 4.

[고은 시인 인터뷰] “내 시의 본적지는 한국전쟁 폐허”


 -등단 50년입니다. 50년 시 세계를 무어라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고은 시인의 서재에는 글 쓰는 자리가 세 곳이다. 책으로 옹벽을 쌓은 앉은뱅이 책상에서 『만인보』가 나왔다. 시인의 인생에서 만난 민초들의 삶을 지난 20년간 하나하나 시로 옮긴 역작. 올해 말이나 내년 초쯤 30권 완간될 예정이다.

“과거란 광속(光速)입니다. 후딱 가버린 것이지요. 하지만 그 과거를 만들어가는 현재들은 벅찬 풍운을 담고 있습니다. 한국 현대시 100년 속의 50년을 쉽사리 결산할 수 없는 이유도 거기에 있지 않을까요. 내 시인생활 50년은 나만의 시간이 아니라 많은 시인들의 삶과 죽음에 닿아있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그동안을 돌이켜볼 때 나는 시를 쓴 것이 아니라 시가 씌어진 것을 깨닫게 됩니다. 나는 나 혼자가 아니지요. 김소월·윤동주를 합친 것이 50년이고 거기에 이상을 더하면 내 나이입니다.”

-‘고아(孤兒)의 시인’이며,

‘시의 고향은 폐허’라 하셨습니다.

“내 운명 안에는 한국전쟁이라는 숙주(宿主)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전쟁의 수많은 죽음과 존재의 극한들은 살아남은 소년의 심상에 일찌감치 폐허를 만들어주었지요. 그 폐허가 곧 내 시의 본적지입니다. 폐허란 이전의 유산도 전통의 혈친도 끝난 곳이지요. 그래서 나는 시대의 고아였습니다. 실지로 내 문학은 이전의 문학이 개입되지 않는 절대빈곤으로부터 자생되었습니다. 호메로스도, 도연명도 모르고 내 시는 태어났으니까요. 지금도 내 시적 내면의 오지에는 그 폐허가 남아있습니다. 문학이란, 특히 시란 본질적으로 어떤 폐허의 영점, 어떤 암실의 백지에서 현상되는 것이지요.”

-선생님의 시세계는 꾸준히 변화해왔습니다.

어느 시기에 가장 애정을 갖고 계신지요.

“나는 복수(複數)로서의 시인입니다. 고은은 고은들입니다. 누구는 나의 60년대 시, 누구는 나의 70년대 90년대의 시를 편드는데, 나는 내 시에 관한한 직무유기상태입니다. 요컨대 나는 나를 규정할 수 없습니다. 또 누가 나를 설명하고 단정한다 해도 그것은 내 시의 부분적 체험일 뿐입니다. 허무시-참여시-화엄적 통섭의 시, 이런 단계론도 편법이 아닌가 합니다.”

-시를 어떻게 만나고 이해하는 것이 가장 시적일까요.

“시의 언어는 고도의 추상언어이기도 하고 산과 물과 바람 속의 언어이기도 합니다. 보르헤스 같은 사람은 그 도서관의 삶에도 불구하고 도서관 밖의 우주를 더 꿈꾸었지요. 시는 시를 쓰고 읽는 게 아니라 시를 살아야합니다. 시를 산다는 것은 만인에게 부여된 천부적인 힘을 묻어두지 않는다는 뜻일 것입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 시로 태어나고 죽을 때 시로 마감합니다. 시의 해석에서 시의 삶으로!”

-그럼에도 시와는 동떨어져 살아가게 되는 게 현대인들의 일상입니다.

“때로는 시를 잊어버리고 있어야 합니다. 20세기 초까지 시는 너무 오랜 황금기를 누렸습니다. 시가 세상의 변두리에 밀려나가 있을 때야말로 시가 성찰의 장소에 이르렀다는 의미일지 모르지요. 시는 소수자의 것이기도 하고 만인만원의 것이기도 합니다. 현대의 속도주의 기계주의 편의주의들은 인간에게 근원상실을 초래합니다. 시는 바로 그 근원의 물질이지요. 시는 활자나 낭독의 형식을 떠나 사람들의 가슴 속의 씨줄날줄로 교차되고 있는 것입니다.”

-시는 문학의 하위장르가 아니라고 하셨는데요.

“시는 인류가 언어를 사용하기 이전부터 있어온 자기표현의 행위입니다. 그리고 언어와 함께 시가 모든 문학형식을 다 아울러 감당해왔습니다. 근대 이후 시는 자신의 장르에 스스로 편입되었습니다. 이제 시의 새로운 출발은 시 이외의 문학장르와 병렬되기보다 그것들을 초월하기를 나는 바랍니다. 시는 예술만이 아닌 예술이고 문학만이 아닌 문학입니다. 내가 니체를 좋아하는 것은 그가 시와 철학의 경계 따위를 본능적으로 벗어났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시는 종교가 아닌 종교의 선사(先史)이기도 합니다. 시는 한 형식 한 장르로 사육될 수 없습니다.”

-요즘 젊은 시인들이 다른 언어로 번역됐을 때에도 통하는,

보편성을 갖는 시 쓰기에 대해 고민을 많이 합니다.

“시는 ‘누가 좋아할 것이다,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를 전제한 작위를 거부합니다. 너는 너의 시를 쓰고 나는 나의 시를 쓰면 됩니다. 보편성이 먼저 있고 시가 거기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시가 먼저 있고 거기서 보편성도 특수성도 엉겨납니다. 이게 보편성의 자연이지요. 서구 보편성에 대한 회의 없이 주어진 보편성에만 내 문학이 볼모가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나는 최근 새로운 보편성을 지향하자고 몇 나라에 가서 강조하기 일쑤입니다. 보편성으로서의 제국주의라는 것도, 그것의 타율성이라는 것도 한번쯤 고려해야합니다.”

-시를 쓰는 게 아니라 ‘시가 온다’고 하셨습니다.

“비둘기 같이, 빛의 광선처럼 시가 와요. 신명처럼 시가 오고 꿈에도 시가 나옵니다. 긴 건 잘 잊어버리고 짧은 건 꿈 깬 뒤 씁니다. 어떨 땐 꿈에서 깨면 잊겠지 싶어 밤에 적기도 합니다. 그런데 요즘엔 시가 아니라 그림이 자꾸 와요. 저리 가라고, 저리 가라고, 이러다가 시가 안 나오겠구나 싶어 나중엔 떠오르는 걸 거부했습니다. 내 천직은 시인입니다.”

-그림전은 어떻게 준비하셨는지요

(그는 4일부터 한국국제교류재단 문화센터에서 ‘동사를 그리다’전을 한다).

“6년 전인가 프랑스 외무성 초청으로 파리에 갔을 때 말라르메와 발레리의 드로잉 특별전을 본 적이 있는데 그때 시인과 신인상파 화가들의 밀착, 시인 자신의 회화 재능, 그리고 시의 음악성 못지 않은 시의 회화성에 대한 강한 인상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나는 어린 시절 외삼촌의 책을 통해 반 고흐를 너무 일찍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고흐 아니면 무(無)다’라는 글씨를 책상 위에 붙여놓은 화가지망 소년이 되었지요. 중학교 미술부에 들어가 교내전 1등상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전쟁 발발로 화가의 꿈은 사라졌습니다. 1950년 6월 어느 날 이래 58년 만에 화필을 들어본 것이 이번 전시작업입니다. 다만 나는 무엇이나 연습 따위가 질색입니다. 바로 붓을 들어 시가 나오고 그림이 나옵니다. 나는 후천성만을 믿지 않습니다.”

 -‘문학사상’에 연재중인 일기 ‘바람의 기록’을 보니 천경자 화백과 절친한 사이셨더군요.

혹 그림 그리시는 데 영향을 받으셨나요.

“아닙니다. 나는 누구의 영향을 싫어합니다. 저녁낙조와 아침이슬 그리고 태풍을 내 스승으로 삼고 있기는 하나 나는 근본적으로 무사승(舞師僧)입니다. 그동안 박고석론·변종화론·천경자론을 쓴 적이 있고 이중섭 평전을 썼습니다. 천경자 화백과 박경리 여사와는 50년대 말 자주 만났지요. 내가 천경자의 그림 모델이 된 적도 있어요.”

-일기가 재미있습니다. 돈 1200원 꾸고 1만원 빌려주고 하는 소상한 일상에,

성욕까지도 언급됩니다. 일기를 쓰실 때에도 후에 공개될 걸 염두에 두신 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1970년대부터 시작해 지금도 계속 일기를 쓰고 있습니다. 그 이전에 쓴 것은 없어졌고 감옥에 갔을 때 말고는 거의 하루도 거르는 일이 없습니다. 일기는 누구를 보여주기 위해서도, 누구 몰래인 것도 아닙니다. 삶의 자동서술일 뿐입니다. 언젠가 토마스 만이 자신의 일기를 몇 10년 뒤가 아니면 공개하지 말라는 유언을 했는데 나는 그런 유언을 유치하다고 생각합니다. 역사에도 거시적인 정치사 중심의 서술이 있고 아날학파의 미시사 생활사 서술도 있습니다. 나에게서 일기란 소걸음과 말달리기의 소묘일 뿐입니다. 70년대 풍경을 좀 세상에 보여주고 싶은 의미였는데 잡지사에서는 무기한 연재를 원합니다.”

-부인 이상화 교수와는 시 인생의 절반인 25년을 함께하셨습니다.

“내 아내는 신령스럽습니다. 아내는 영문학에서의 유토피아 전공입니다. 유토피아 문학론 저서들도 냈습니다. 그런데 내 유토피아야말로 아내입니다. 아직껏 내가 세속적이지 않다면 그것도 아내라는 헌법 때문이지요. 내 혼의 동행이 곧 아내 이상화입니다. 지금 자신의 학문을 포기하다시피 하며 내 시의 영어 공역자이자 내 국제관련 업무를 도맡아 하고 있습니다.”

폭염이 쏟아지던 올 여름, 고은 시인은 경기도 평택에 있는 조각가 구성호의 작업장에서 그림을 그렸다. 폭염과 인근 비행장의 전투기와 폭격기 소음이 되려 맹렬한 붓질을 재촉했단다. [고은문학50년 행사위원회 제공.]

-‘창작과 비평’ 가을호에 실린 이장욱 시인과의 대담에서 “2007년 브리태니커 연감에 한국인으로는 셋이 나왔더라고. 이명박 대통령하고, 비하고, 나하고.”란 부분을 읽으며 한바탕 웃었습니다. 대중문화도 평소 눈여겨보시는지요.

“21세기가 20세기와 다른 것은 지식인만의 시대가 아니라는 엄연한 사실이겠지요. 지난 시기 어느 정부에서 ‘신지식인’이란 사회모범을 만들어 내고자 한 적이 있는데, 그것도 20세기적인 사고 잔재에 지나지 않습니다. 현세기는 그런 시대가 아닙니다. 지식인보다 더 사회적 우월성을 행사하는 것이 대중문화로서의 스포츠와 연예활동가입니다. 다만 이런 대중과 시장으로 치달리는 맹목주의의 인간군상은 장차 문화의 커다란 공동으로 될 것입니다. 대중과 시장, 이것처럼 무서운 괴수는 없습니다. 욕망의 무한확대가 거기서 자행되니까요.”

-그 대담에서 이명박 대통령과는 “그 사람은 공적으로 술을 못하고 나는 공적으로 사적으로 술을 잘하는 차이가 있겠지”라 하셨습니다. 술을 못하는 사람은 시도 못 쓸까요?

“내가 술꾼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에게 술을 마시라고 강요할 까닭은 없습니다. 술 없이도 취할 수 있는 경지가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동안 세계시사, 동양시사에서 시와 술은 전통적인 상호텍스트였습니다. 그렇다고 현대시인 모두에게 ‘너 술 없이 시 없다’고 위협하는 것은 시의 새로운 존재형식에도 맞지 않습니다. 사실인즉 술 한 방울 없는 시의 진공, 시의 순백 그것이야말로 시가 술이 아니라 이슬이라는 것을 일깨웁니다. 그러나 이백과 정철의 권주시! 참 후련하지요.”

-촛불이 한국 사회에 큰 파문을 던져준 듯합니다. ‘촛불’을 어떻게 평가하시는지요.

“촛불은 세 가지로 의미부여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왜 촛불인가의 사회문화적 원인이 파묻혀버렸는데 그것을 확인해야합니다. 생활민주주의 축제의 주체는 이데올로기나 남성정치학이 아니라 여중생과 유모차 또는 핵가족의 시민적 자화상인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로 이번 촛불이야말로 프랑스대혁명의 파리보다 더 고조된 예술적 경지입니다. 이것이 당장의 정치변동에의 효과를 떠나 그 자체로 한국의 명예로운 풍경이었습니다. 셋째로 촛불을 죽이는 정치는 정치 자체의 죽음을 불러올 것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앞으로 촛불과 정치, 촛불과 문학이 하나의 창조적 상호가치를 낳기 바랍니다. 촛불은 꺼진 게 아닙니다. 촛불의 백만 눈동자는 빛나고 있습니다.”

-이명박 정부에 하고픈 말씀이 있다면.

“나는 이 정부의 선진이라는 정치구호를 수상하게 여깁니다. 선진은 문화의 풍성에서 찾아야하는 것이지 시장근본주의와 개발본위주의론 실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지금 선진국 사회는 도리어 그 이전단계의 지역사회보다 훨씬 암담합니다. 미국은 밤중에 걸어갈 수 있는 곳은 몇 군데 안되는 거의 다 통금시대일 뿐입니다. 영국도 미국의 총대신 칼의 도시입니다. 선진은 하나의 문명종말이기도 하지요.”

-올 초로 예정됐던 만인보 완간이 늦어지고 있습니다.

완간되면 시로 4000여 명의 삶을 노래하시는 셈인데요.

“신작 시집을 먼저 내고 싶어서 만인보 원고정리를 미루었습니다. 전시회 뒤 바로 정리작업에 들어갈 것입니다. 연말이나 내년 초에는 만인보 쓰기의 막이 내려집니다. 20년이 넘는 세월입니다.”

-저술이 방대합니다. 위고나 괴테에 견줄만하지 않을까요.

“외국 시인이나 비평가들의 덕담에 내가 파리에 가면 너는 한국의 위고다, 내가 라틴 아메리카에 가면 너는 한국의 네루다다, 내가 독일에 가면 너는 괴테와 방불하다 따위의 덕담을 듣고 있습니다. 나는 편지로는 그들을 도저히 따라갈 수 없습니다. 나에게는 서간전집이 없습니다.”

-노벨 문학상 후보로 벌써 몇 년째 거론되어왔습니다. 마냥 마음을 비울 수는 없을 듯합니다.

“나에게는 어느 만큼 평상심이 있습니다.”

-현생에선 언제까지 시를 쓰실지, 내생에선 또 어떠실지를 마지막으로 여쭙고 싶습니다.

“나의 언어는 모국어이자 우주어입니다. 그리고 내 언어는 집이 아니고 세계이고 길입니다. 하이데거를 거스르는 것이 내 언어입니다. 생애의 끝에 이제까지 없었던 시가 있을 것입니다.” 중앙일보,2008.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