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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의 향기/詩와 시인

시인들이 마지막으로 남긴 애절한 절명시

by 골든모티브 2009. 1. 4.

시인들이 마지막으로 남긴 애절한 절명시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오는 7일로 18주기가 돌아오는 요절시인 기형도는 생전에 죽음을 예견한 듯한 시를 몇 편 남겼다. 위에 인용한 '빈집'이라는 시도 그 중 하나다.

지난 2월 2일 세상을 떠난 오규원 시인은 타계하기 열흘 전 병실을 찾아온 제자 손바닥에 시를 썼다. 4행밖에 안 되는 짧은 시였지만 시에는 자신의 죽음을 예견한 듯한 초월적인 미학이 담겨 있었다.

"한적한 오후다 / 불타는 오후다 / 더 잃을 것이 없는 오후다 / 나는 나무 속에서 자본다 ."

오규원 시인 타계 후 시인들이 죽음을 앞두고 남긴 시들이 관심을 끌고 있다.

시인들이 세상을 떠나기 전 남긴 시를 흔히 절명시(絶命詩)라고 한다. 절명시는 원래 조선시대 선비들이 죽기 전 마지막으로 남긴 시를 의미했다. 단종복위를 꿈꾸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성삼문과 1911년 한일합방에 반대하며 자결한 매천 황현의 절명시가 유명하다.

"둥둥둥 북소리 사람의 목숨을 재촉하고 / 고개 돌려 보니 해는 서산으로 지는데 / 황천가는 곳 주막 하나 없으니 / 오늘 밤은 누구 집에서 잘 것인가"로 끝나는 성삼문의 절명시는 서울대 논술모의고사 문제로 나올 만큼 널리 알려진 작품이다.

2004년 세상을 떠난 '꽃'의 시인 김춘수는 죽기 얼마 전 '달개비꽃'이라는 작품을 남겼다.

"울고 가는 저 기러기는 알리라 / 하늘 위에 하늘이 있다 / 울지 않는 저 콩새는 알리라 / 누가 보냈을까 / 한밤에 숨어서 앙금앙금 눈 뜨는."

하늘 위에는 또 다른 하늘이 있다는 말로 시인은 사후 세상에 대한 은유를 한 것이다. 만년에도 뜨거운 창작열을 불태웠던 거장의 투명하고 순수했던 세계관과 죽음에 대한 관조가 빛나는 시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로 시작하는 시 '낙화'로 유명한 이형기 시인은 2005년 세상을 뜨기 전 '길'이라는 제목의 의미심장한 절명시를 남겼다.

"빈 들판이다 / 들판 가운데 길이 나 있다 / 가물가물 한 가닥 / 누군가 혼자 가고 있다 / 아 소실점! / 어느새 길도 그도 없다 / 없는 그 저쪽은 낭떠러지 / 신의 함정 / 그리고 더 이상은 아무도 모르는 / 길이 나 있다 빈 들판에 / 그래도 또 누군가 가고 있다 / 역시혼자다 ."

뇌졸중으로 쓰러져 투병중이던 이형기 시인은 문학계간지에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죽는 그 순간부터 영원히 늙지도 않고 따라서 또 죽지도 않는다는 이야기가 된다"는 산문을 남기기도 했다.

평범한 일상에서 깨끗한 정신의 미학을 길어 올렸던 임영조 시인도 2003년 암으로 세상을 뜨기 전에 쓴 '화려한 오독'이라는 시에다 '절명시'라는 표현을 그대로 썼다.

"장마 걷힌 칠월 땡볕에 / 지렁이가 슬슬 세상을 잰다 / 시멘트 길을 온몸으로 긴 자국 / 행서도 아니고 예서도 아닌 / 초서체로 갈겨쓴 일대기 같다 / 한평생 초야에 숨어 굴린 화두를 / 최후로 남긴 한 행 절명시 같다 ."

시인들이 남긴 절명시는 하나같이 명시들이다. 죽음을 앞둔 시인들의 감성이 극적으로 담겨 있기 때문이다.

문학평론가이자 시인인 정끝별 씨는 '천 개의 혀를 가진 시의 언어'라는 책에서 절명시에 대해 "시인의 언어는 자신의 운명을 담는 성배와도 같다. 육신의 사라짐으로 인해 그들의 언어는 더욱 아름다워지는 것이고 그 언어로 인해 그들의 죽음은 빛을 발한다. 시인의 죽음과 시인의 언어는 서로를 반향하면서 서로의 의미를 증폭시켜준다"고 평한다.

절명시는 죽음으로 완성된 시이기 때문에 더욱 애절하고 아름답다. 그들의 죽음이 시를 빛나게 하고, 시가 다시 그들의 이름을 빛나게 하는 것이다. /매일경제,2007.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