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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의 향기/詩와 시인

박목월,박두진,조지훈의 청록집

by 골든모티브 2009. 1. 25.

[시인공화국 풍경들] <42>

 

朴木月 趙芝薰 朴斗鎭의 '靑鹿集'

 

박목월(1916~1978) 조지훈(1920~1968) 박두진(1916~1998) 세 사람은 모두 1939년 '문장(文章)'지의 추천으로 문단에 나왔다. 이 문예지의 시 추천자로서 이들을 문학적으로 보살핀 이는 정지용이었다.

 

 

1939년은 독일군의 폴란드 침공과 여기 맞선 영국 프랑스의 대독(對獨) 선전포고로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해다. 중국 산시성(山西省) 펑타이[豊台)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이 베이징(北京) 교외의 루거우차오(蘆溝橋)를 점령하면서 중일전쟁이 시작된 것은 그보다 두 해 전이고, 독일군의 소련 침공과 일본군의 진주만 기습으로 전쟁이 북반구 전역으로 확대된 것은 그보다 두 해 뒤다.

그러니, 이 세 시인의 공동 시집 '청록집(靑鹿集)'(1946)에 묶인 시들은 식민지 말기의 전시 체제와 해방 뒤의 정치적 격랑 속에서 쓰여진 것이다.

놀랍게도, 이 시집에는 그 역사적 격동의 수레바퀴 자국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화자들의 '생활'조차 거의 보이지 않는다. '청록집'의 사회적 진공(眞空)상태는, 이 시집보다 한 달 늦게 간행된 오장환의 '병든 서울'이 정치적 자의식으로 충만돼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더욱 또렷하다.

이 점을 지적하는 것은 이 시집의 저자들이 정치적으로 백치에 가까웠음을 드러내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와 반대로, 어떤 역사적 격랑 속에서도(경우에 따라서는 그 격랑이 거셀수록) 인간에게는 사적 정서를 향유할 권리가 있고, 그 권리를 심미적으로 행사하도록 돕는 것이 문학적 욕망의 한 가닥임을 드러내기 위해서다.

눈앞의 역사에 눈감고 자연이나 민족전통이나 관념 속으로 퇴각함으로써, 현실의 땅거죽에 발을 딛는 대신 부러 붕 뜬 상태로 그 시절을 견뎌냄으로써, '청록집'의 저자들은 정치적 이성의 사나운 발톱으로부터 문학을 보전할 수 있었고, 소박하나마 그럭저럭 읽힐 만한 시들은 몇 편씩 남길 수 있었다.

이것은 그 시대에 쓰여진 정치적 선전시들의 다수가, 대동아 공영권을 찬양했든 임박한 프롤레타리아혁명을 구가했든, 정치적 이유에서만이 아니라 문학적 이유에서도 이미 오래 전에 잊혀져버린 사실과 대조적이다.

비정치적 체질 때문이었든(꼿꼿한 선비의 이미지가 짙었던 조지훈은 뒷날 넓은 의미의 정치에 자신을 연루시키기도 했다) 미학적 안목 때문이었든 보신(保身)의 욕망 때문이었든, '청록집'의 저자들은 슬기로운 선택을 한 셈이다.

'청록집'에는 39편의 시가 묶였다. 저자 대표로는 가장 연장(年長)인 박두진을 내세웠고, '박목월 편' '조지훈 편' '박두진' 편의 순서로 작품을 배열했다.

박목월의 시가 15편으로 가장 많고, 조지훈과 박두진의 시가 각각 12편씩이다. 그러나 박목월의 시가 대체로 소품이어서 차지하고 있는 면수(面數)도 제일 적다. 시집 제목은 푸른빛의 이미지로 봄 정취를 그린 박목월의 시 '청노루'에서 따왔다. 그러나 사슴은 조지훈과 박두진의 시에도 제 몸뚱이를 들이민다.

예컨대 "바라보는 자하산(紫霞山)/ 열두 봉우리// 싸리나무 새순 뜯는/ 사슴도 운다"(조지훈의 '피리를 불면')라거나 "다람쥐며 산토끼며,/ 사슴도 와 놀고 하나,/ 아침에 뛰놀던 어린 사슴이/ 저녁에 이리에게 무찔림도 보곤 한다"(박두진의 '연륜') 같은 시행들이 그렇다.

조지훈이 작고한 해(1968년)에 다시 출간된 '청록집'의 서문에서 박목월은 "청록집이라는 이름은 사슴이 세 사람의 작품에 비교적 빈번하게 나타나는 공통된 이미지이기도 하였지만, 푸른 사슴처럼 날렵하고 청신한 신인(新人)이라는 자부가 앞서 있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이 공동 시집의 출간 이후 이들 세 시인은 자연스럽게 청록파라고 불리게 됐는데, 서정주는 이 공동 저자들의 자연지향적 공통점에 주목해 이들을 자연파라고 부르기도 했다.

시 애호가가 아니더라도 '청록집'의 몇몇 작품들은 귀에 익을 것이다. "송홧가루 날리는/ 외딴 봉우리"로 시작하는 '윤사월'과 "강나루 건너서/ 밀밭길을"로 시작하는 '나그네'(이상 박목월),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로 시작하는 조지훈의 '승무', 또 "북망(北邙)이래도 금잔디 기름진데 동그만 무덤들 외롭지 않어이"로 시작하는 '묘지송(墓地頌)'과 "산새도 날아와/ 우짖지 않고"로 시작하는 '도봉'(이상 박두진) 같은 작품들이 중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려 상급학교 입시를 위한 주입교육의 대상이 됐으니 말이다.

'자연 지향'을 공유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청록집'에서 드러나는 이 세 시인의 문학적 육질은 사뭇 다르다. 박목월이 두드러진 외형률을 형식적 근간으로 삼았던 데 비해, 조지훈과 박두진은, 특히 박두진은 상대적으로 개방적인 리듬을 선호했다.

박목월의 문학공간이 온통 시골 서정으로 채워졌던 데 비해(지나는 길에 지적하자면, 그의 시에서는 경상도 방언의 사용이 두드러진다) 조지훈은 민족문화의 과거에도 눈길을 건네?복고 취향을 드러냈고, 박두진은 어떤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정신의 거처로서 자연을 노래했다. '박목월 편'에서 종교의 냄새가 나지 않는 데 비해, '조지훈 편'은 불교의 빛깔을 다소 띠고 있고 '박두진 편'은 사뭇 기독교적이다.

'연륜'이라는 같은 제목을 단 박목월과 박두진의 시를 견줘보면, 이들의 문학세계의 이질성을 손쉽게 확인할 수 있다. 박목월의 화자에게 연륜은 "목이 가는 소년"이 "슬픔의 씨를 뿌려 놓고 가버린 가시내"를 힘겹게 잊는 과정이 "질 고운 나무"에 투사된 "핏빛 연륜"이다. 반면에 박두진의 화자인 나무에게 연륜은 "내가 이 땅에 뿌리를 박고,/ 하늘을 바라보며 서 있는 날까지는,/ 내 스스로 더욱/ 빛내야 할 나의 세기(世紀)"와 관련돼 있다. 다시 말해 박목월의 연륜은 정서(의 처리)와 관련돼 있고, 박두진의 연륜은 정신(의 단련과 성장)과 관련돼 있다. 박두진이 자주 노래하는 산이나 숲이나 묘지는 그 정신의 거처로서 그럴싸하다.

세 시인 가운데 그 작품에서 화자의 존재감이, 그 삶이 그나마 느껴지는 이는 박두진이다. 그 반대편에 박목월이 있다. '박목월 편'에는 화자의 삶이, 일상이 아예 보이지 않는다.

아니 제 일상을 무화(無化)하는 것이 박목월 화자의 삶의 자세라고도 볼 수 있겠다. 화사하기로는 조지훈이 가장 앞선다. '승무'나 '율객(律客)'은 전형적인 예인(藝人)의 시다. 거기선 자유당 정권 말기에 '지조론(志操論)'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킨 '선비 조지훈' '지사 조지훈'을 쉽게 떠올릴 수 없다. 하늘하늘한 예인과 꼿꼿한 지사를 동시에 보듬고 있었다는 점에서 조지훈은 희귀한 정신이었다.

'목월에게'라는 부제를 단 조지훈의 '완화삼(玩花衫)'과 "술 익는 강마을의 저녁노을이여--지훈"이라는 제사(題詞)를 단 박목월의 '나그네'는 일종의 켤레를 이루고 있다. 조지훈이 박목월에게 보낸 '완화삼'에 박목월이 역시 시로써 화답한 것이 '나그네'다.

두 시 모두 나그네의 풍류를 그리고 있지만, "이 밤 자면 저 마을에/ 꽃은 지리라" 같은 시행에서 보듯 '완화삼' 쪽이 한결 을씨년스럽다. '완화삼'의 여섯째 행 "술 익는 강마을의 저녁노을이여"는 '나그네'의 넷째 연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로 되살아났다. 조지훈은 이에 대해서 "압운(押韻)이 없는 현대시에도 이렇게 절실한 심운(心韻)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고 정겹게 언급한 바 있다.

말이 나온 김에, 이와 비슷한 '심운'의 예가 오장환과 서정주 사이에도 있었음을 기록해두기로 하자. 오장환은 1941년 '정주(廷柱)에게 주는 시'라는 부제를 단 '귀촉도(歸蜀途)'를 종합월간지 '춘추'에 발표한 바 있다. 이 작품은 "파촉(巴蜀)으로 가는 길은/ 서역 삼만 리"로 시작한다.

이 시행은 두 해 뒤 서정주가 같은 잡지에 발표한 '귀촉도'의 첫 연 "눈물 아롱아롱/ 피리 불고 가신 님의 밟으신 길은/ 진달래 꽃비 오는 서역(西域) 삼만리(三萬里)/ 흰 옷깃 여며 여며 가옵신 님의/ 다시 오진 못하는 파촉 삼만리"와 맵시 있는 맥놀이를 만들어내고 있다.

청록파의 세 시인은, 48세라는 비교적 이른 나이에 생을 마감한 조지훈을 포함해, 모두 복 받은 삶을 살았다. 그들은 대학에 자리잡고 대가(大家)의 위의당당함으로 후진을 길렀고, 제자들(의 제자들)의 깊은 존경을 받고 있다. 그러나 그 존경은 이들의 시보다는 인격에 돌려지는 것이 더 마땅할 것 같다./한국일보,2005.1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