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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의 향기/한국 현대詩 100년

김소월에서 이장욱까지 100년의 詩心을 만나다

by 골든모티브 2008. 6. 27.

김소월에서 이장욱까지 100년의 詩心을 만나다

 


어느 가슴엔들 시가 꽃피지 않으랴(전 2권)
김소월 지음·정끝별·문태준 엮음·민음사· 2008

백년의 압축이다. 그 백년 장엄하다. 청맹과니로 살아온 장삼이사의 눈을 밝히고 귀를 열어주는 100년 동안의 시심(詩心)이 하나의 압축 파일로 우리에게 도착했다.

육당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로부터 발원한 현대시 100년의 역사가 굽이굽이 돌아온 흔적들, 그 안에서 명멸했던 시인의 삶과 상상세계, 그이들이 모국어로 가 닿고자 했던 생명-우주의 비밀이 여기에 집약되어 있다. 무진장(無盡藏)한 콘텐츠가 뿜어내는 섬광이 번쩍인다. “해야, 고운 해야. 해야 솟아라. 꿈이 아니래도 너를 만나면, 꽃도 새도 짐승도 한자리에 앉아, 워어이 워어이 모두 불러 한자리 앉아, 앳되고 고운 날을 누려 보리라”(박두진, ‘해’)라고 속에서 치미는 그 뜨거움과 벅참을 어쩔 수 없이 밖으로 밀어내며 노래할 때 화자(話者)의 리듬은 청자(聽者)인 우리 내면으로 직격하며 들어온다. 슬픔과 어둠과 절망에서 솟구친 이 리듬은 우리 안에 들어오며 기쁨과 빛과 희망으로 전환한다. ‘앳되고 고운 날’의 누림이 필경 불러올 ‘생생지락(生生之樂)’과 ‘시시지락(詩詩之樂)’을 꿈꾸는 일은 욕심이 아니다. 욕심이 아니므로 그것은 죄가 되지 않는다.

시가 무엇이냐? 시는 삶의 볼품없음과 꾀죄죄함에서 벗어나보려는 우아한 문화적 몸짓일까? 그 언어적 스침과 고임은 삶의 덧없음에 대한 보상 행위의 산물일까? 시가 먹고사는 일에서 화급을 다투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주린 자가 끼니를 위해 하는, 육즙을 짜내고 뼈가 휘는 노동에 견준다면 시 쓰기는 한가로운 생산에 지나지 않으며, 질병으로 신음하는 자의 아픔에 견준다면 시를 토해내는 고통은 저 혼자 뀌는 물방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터다. 어쨌든 “삶 자체에 견주면, 시라는 것은 하찮은 물건”(고종석)이다. 이 하찮은 물건이 그토록 시름과 주림에 겨워 헐떡이는 우리에게 따뜻한 위안과 구원의 손길을 내밀라고는, 기대를 갖지 않은 이것이 기어코 시름을 덜고 쓰러진 우리를 일으켜 세울 줄은 아무도 몰랐다.

“풀이 눕는다 /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김수영, ‘풀’) 지천으로 널린 풀에게서 생명의 역동성을 끌어낼 줄 아는 이가 바로 시인이다. 천하를 이롭게 하는 공익을 더하고 세우는 일에 아무 보탬이 되지 않고 그저 빈둥거리기만 하는 백수로 여겼던 자들이 저 흔하디 흔한 풀에서 바람과 희롱하며 울고 웃는 감정의 연금술을 찾아낸 것이다. 놀랍지 않은가, “느리지만 처음 있던 곳으로 되돌리는 이 불굴의 힘을 풀은 갖고 있다. 풀은 이변을 꿈꾸지 않는다. 제 몸이 무너지면 그 무너진 자리에서 스스로 제 몸을 일으켜 세운다.”

시인은 익숙한 것의 기억과 인상을 새롭게 만든다. 같은 체험을 하고도 다른 체험으로 드러내는 게 시인이다. 그리하여 “이 다른 체험 속에서 우리는 사물의 은폐된 후경(後景), 그 숨겨진 진실”(문광훈)을 보는 것이다. 이성부가 봄을 두고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라고 쓸 때, 혹은 김광규가 이젠 늙어갈 일만 남은 중년 사내들의 허전한 심중을 “치솟는 물가를 걱정하며 / 즐겁게 세상을 개탄하고 / 익숙하게 목소리를 낮추어 / 떠도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고 노래할 때, 이 익숙한 것들은 돌연 낯설어진다. 익숙한 것의 낯섦 앞에서 소스라치게 놀라다가 그것이 우리가 놓쳐버린 것임을 깨닫고 안심한다. 시인은 우리가 너무나 익숙해서 놓쳐버린 것, 흘려버린 것들을 끌어다가 새롭게 갱신해서 다시 보여준다.

다시 보여줄 때 그 익숙한 것들은 숨은 진실을 드러내고 그 진실은 우리 안에서 삶을 갱신하고 조형하는 동력이 된다. 정지용의 ‘향수’에서 연마다 후렴구로 되풀이되는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라는 구절은 송곳이 되어 여린 마음의 한쪽을 후빈다.

그것은 20세기 한국인이 고향을 잃고 이곳저곳을 떠돌며 살아야 했던 저간의 곡절을 환기시키고, “넓은 벌 동쪽 끝으로 /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 얼룩빼기 황소가 /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으로 돌아가기를 희구하게 만든다. 우리는 함부로 쏘아올린 화살이었다.

만주의 너른 땅으로, 블라디보스토크의 동토로, 중앙아시아의 무연고 허허벌판으로, 일본의 탄광촌으로, 저 멀리 하와이의 사탕수수밭으로. 그건 내 탓도 네 탓도 아니었다. 우리 의지가 거부할 수 없는 거대한 힘이 우리를 저 바깥으로 떠밀었던 것이다. 너무 멀리 갔기에 원심력에 붙들려 본디 있던 곳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눈을 감은 사람도 부지기수다. ‘향수’는 고향을 잃은 자가 앓는 마음의 질병이다. 그것은 치유할 길 없는 불치의 병이다. 20세기 한국인이 집단으로 앓은 전염병이다.

아주 소수의 사람만이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사철 발 벗은 아내’가 있는 고향으로 귀환하는 기획에 성공했다. 그런 비극의 보편화가 있었기에 ‘향수’가 일러바치는 내가 없는 고향의 풍물들은 더 애절하게 가슴에 와 닿는다.

100명의 시인이 지난 100년간 시에서 100편을 골라내고, 정끝별과 문태준 두 시인이 그 시에 일일이 해설을 붙였다. 이 시들과 함께 같은 시대를 살았다는 것은 우리가 누린 지복(至福)이다. 이 시를 읽으며 마음의 눌리고 맺힌 데를 펴고 풀 수 있었고, 주눅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누구도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는 없다. 시에서는 그것이 가능하다. 언제라도 마음만 먹으면 ‘해질 녘 울음이 타는 가을강’에 두 번 세 번 거푸 발을 담글 수 있다.

“마음도 한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 /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
가을 햇볕으로나 동무 삼아 따라가면, /
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 나고나. //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
해질 녘 울음이 타는 가을강을 보것네. //
저것 봐, 저것 봐. / 네보담도 내보담도 /
그 기쁜 첫사랑 산골 물소리가 사라지고 /
그 다음 사랑 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 /
이제는 미칠 하나로 바다에 다 와 가는, /
소리 죽은 가을강을 처음 보것네.”(박재삼, ‘울음이 타는 가을강’)

이 시편을 읽으며 세월의 더께에 눌려 희미해진 첫사랑의 설렘과 기쁨이 늦가을 해질 녘 붉은 햇빛을 뒤채며 흐르는 강물에 고양되어 다시 타오르는 경험은 나만 했던 것일까. 아닐 것이다. 이 시들과 함께 살았기 때문에 우리가 통과해온 그 비바람 치는 나날의 고된 삶의 누적이 아무 뜻이 없는 게 아님을 증명할 수 있었다.

이장욱이 “한 잔의 소주를 마시고 내리는 눈 속을 걸어 / 가장 어이없는 겨울에 당도하고 싶어”라고 쓸 때, 어이없는 겨울은 그 어이없음으로 유일무이하게 눈부신 겨울로 바뀌고, 최승자가 “내가 살아 있다는 것 / 그것은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노래할 때, 농담에 지나지 않을 이 삶을 수식하기 위해 호명된 곰팡이, 오줌 자국, 죽은 시체와 동위(同位)에 놓일 정도로 뜻없는 그것의 하찮음 때문에 돌연 삶은 의미의 지평으로 솟는다. 김소월에서 이장욱까지 100명의 시인을 호명해서 한자리에 모았다. 이런 선집이 없던 것은 아니지만 이 선집이 기왕의 것을 제치고 으뜸으로 나설 수 있는 것은 정끝별·문태준 두 시인의 신실한 시 읽기와 권신아·잠신 두 일러스트레이터의 빼어난 그림이 만나 일으킨 예술 장르 간의 화학작용 때문이다.

시와 그림은 본디 두 개가 한 쌍으로 나왔다고 믿을 만큼 상호 연관의 빛을 상대에게 던지며 상호 조응한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들어갈 시인과 들어가지 말았어야 할 시인이 서로 자리를 바꾸었다는 점이다.

아주 짜게 걸러내도 오장환·김관식·구자운·김구용·박정만·김남주·이제하·이수익·이승훈·채호기·이수명·유홍준·권혁웅·김행숙은 마땅히 들어가야 할 시인이다.

<장석주 시인·문학평론가>
2008 07/01   뉴스메이커 78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