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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의 향기/한국 현대詩 100년

애송시 100편-100년 동안의 詩心

by 골든모티브 2008. 6. 15.

100년 동안의 詩心… 당신의 눈과 귀를 밝힌다

 

어느 가슴엔들 시가 꽃피지 않으랴(전2권) 김소월 등 지음|정끝별·문태준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가 발표된 지 100년이 된다. 한국시인협회는 이 작품을 우리 현대시의 효시로 삼고 있다. 한국 현대시 100주년을 기념하여 조선일보는 시인 100명이 추천하는 현대시 100편을 연재하는 기획을 꾸몄다. 정끝별·문태준 두 젊은 시인이 시편에 대한 자상하고 감칠맛 나는 논평을 붙였다. 독자들의 열렬한 반응을 일으킨 이 연재 기획이 이번에 두 권의 책으로 되어 나왔다.

    〈해에게서 소년에게〉는 끝까지 읽어내기가 버거운 괴상한 문서다. 이 치졸한 괴문서에서 출발한 우리 시가 이 책에 수록된 시편들을 빚어냈다는 것은 기적이다. 전쟁의 폐허를 딛고 일어선 경제적 성취를 두고 외국인들은 '한강의 기적'이라 했다. 우리말을 몰라서 그렇지 우리말을 안다면 최남선에서 출발한 현대시의 성취를 두고 '팔도강산의 기적'이라고 말하리라. 최남선 이전에 고려가요가 있었고 황진이의 시조가 있었다 해서 사정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 ▲“술술 읽히는 마력”을 지닌 조병화 시인은〈오산 인터체인지〉에서“자, 그럼”이란 단호한 표현 속에 작별의 서글픔을 숨겨 놓았다. / 일러스트=잠산
  • 팔도강산의 기적을 이룬 원동력은 시인들의 지극한 민족어 사랑이다. 민족어 사랑은 또 겨레 사랑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옛 식민지 권력은 실패할 수밖에 없는 민족어 말살정책을 꾀하기도 했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의 생각과 문제를 섬세하고 유연하게 표현할 수 있게 됐는데, 그것은 시인을 위시해서 모든 지식인들의 창조적인 문화실천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긍정적 노력의 한편으로 욕설과 특수집단의 비속어가 범람하면서 민족어 훼손과 사회의 전반적 비속화에 기여하고 있다.

    그러한 시점에서 당대 기적의 열매를 음미하고 완상하는 것은 단순한 예술 향수의 문제가 아니고 민족어 순화와 사회의 품격 향상에 기여한다.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이란 대목이 정현종 시편에 보이지만, 여기 수록된 시편들은 모두 저마다의 방식으로 민족어의 기적을 구현하고 있다. '모든 시편이 기적'인 것이다. 두 시인의 해설적 논평은 이들의 기적됨을 때로는 깜찍하게 때로는 능청스럽게 알려주고 있다.

    길 눈이 어두운 사람이 있고 사람 눈이 어두운 사람도 있다. 그래서 길을 못 찾고 사람에게 번번이 실망한다. 마찬가지로 글 눈이 어두운 사람이 있다. 이들은 좋은 글과 서툰 글을 분간하지 못한다. 귀가 어두워 말귀를 못 알아듣고 소리를 분간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대개 적정한 훈련을 못 받았거나 자기훈련을 제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눈을 밝히고 귀를 밝히면 이 세상은 아름다운 기적으로 충만해 있다.

    눈과 귀를 밝히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훈련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자기훈련이 가능한 것은 아니다. 적절한 계도가 필요하다. 이 책은 글 눈을 밝히는데 유효 적절한 도움말을 주고 있다. 시에 대한 글 눈이 밝아지면 자연히 산문에 대한 글 눈도 밝아진다. 또 글 눈이 밝아지면 스스로 좋은 글을 쓰게 된다. 공을 많이 들이는데도 도무지 신통한 글을 못 쓰는 것은 좋은 글을 많이 읽어보지 않고 서툰 글을 흉내 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책은 글 눈을 밝혀주면서 좋은 글을 알아보고 좋은 글을 쓸 수 있게 하는 길라잡이 책이기도 하다.

    우리 시를 일반 독자에게 다가가게 하는 해설적인 책은 많이 나와 있다. 그러나 이 책은 현역과 젊은 시인들의 시편을 다수 수록하고 있어 단연 독보적이다. 이 책의 큰 미덕이기도 하다. 또 작자의 전기적 사실에 매이지 않고 직접 작품 안으로 들어간다는 점에서도 빼어나 있다. 붓글씨를 써보아야 글씨를 볼 줄 안다. 시를 꼭 써야 시를 아는 것은 아니지만 써본 사람의 눈이 확실한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도 시인들이 쓴 이 책의 미덕이 다시 돋보인다.

    시는 언어의 축약된 핵이다. 그래서 "집약적인 사상은 시로 변한다"고 한 작가도 있다. 논어에 '시를 공부하지 않으면 제대로 말할 준비를 갖추지 못 한다'는 대목이 보인다. 공자가 아들에게 한 말인데 '시를 알지 못하면 말을 안다고 할 수 없다'는 뜻이다. 어느 문화에서나 시는 말의 요체요 알맹이이다. 우리말 공부를 위해서도 시 읽기는 필수의 과정이다. 비약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우리의 정치 언어가 막말과 욕설의 언어가 되는 것은 시를 등한히 하는 세태와 연관이 있다. 출사(出仕)를 위해서도 시를 공부한 조선조의 사대부들은 막말이나 상욕을 하지 않았다.

    좋은 시는 잘 외어진다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또 시를 암송하는 것은 글쓰기에도 도움이 된다. 그런데 어떤 시를 외는 것이 좋을까? 이 물음에 대해서도 이 책은 좋은 대답이 된다. 함형수가 쓴 〈해바라기의 비명〉에서 이성부의 〈봄〉이나 황인숙의 〈칼로 사과를 먹다〉에 이르기까지 모든 수록작품이 풋풋하고 싱싱해서 외기 좋다. 저절로 외어질 것이다. 많은 시를 외다 보면 진정 개성적인 작품과 규격화된 작품의 차이를 깨닫게 된다. 시 공부 되고 글쓰기 공부 되고 기억술에도 도움이 된다.

    '100명의 시인이 뽑은 100편의 시편' 말고도 좋은 시인과 시편이 많다. 독자들로 하여금 그런 시인과 시편을 찾아내게 하는 계기를 이 책은 마련해 줄 것이다. 좋은 영화를 보고 나면 또 다른 영화가 보고 싶어진다. 이것이 예술의 매력이다. 필자로서는 오장환, 이한직의 시편이 빠진 것이 아쉽게 생각되었다. 그런 시인을 각자 다섯 명만 찾아내어도 큰 공부가 될 것이다. 책상머리에 놓고 두고두고 음미할 책이다.

    끝으로 한 가지. 백석의 〈남신의주 유동 박씨봉방〉 시편은 8·15 후의 소작(所作)이다. 8·15 이전의 백석 시편엔 구두점이 붙어있지 않으나 이후의 시에는 구두점이 붙어 있다. 이러한 내재적 근거 말고도 모든 정황증거가 이후 소작임을 가리키고 있다.


    유종호 시인·문학평론가 /조선일보,2008.6.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