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삶, 삶의 균열에서 나온 영혼의 위안 -
생텍쥐페리가 비행기 사고를 당해 병실에 누워있을 때의 이야기다. 막 의식을 회복한 그는 아내에게 커피 한 잔을 부탁했다. 커피를 탄 아내는 아직 마실 수는 없다며 커피 잔을 남편의 코끝에 대주었다. 생텍쥐페리는 커피향을 음미하고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다시 잠들었다고 한다.
85세의 노인은 나흘 밤낮의 사투 끝에 뼈만 남은 물고기를 끌고온 뒤 피로를 못 이겨 잠이 들었다. 소년은 노인의 가슴에 귀를 대보고, 상처난 그의 두 손을 보고 울기 시작했다. 소년은 울음을 터뜨렸고, 문밖을 나와 내내 울었으며, 테라스에 가서 커피 한 깡통을 달라며 말할 때도 울먹였다. “뜨겁게 해서, 밀크와 설탕을 듬뿍 넣어주세요.” 이건 ‘노인과 바다’의 마지막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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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김상민기자 |
나는 그다지 커피를 즐기는 편이 아니고, 더구나 커피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한다. 그래도 누군가 “차 뭘로 드릴까요?” 하고 호의를 베풀면 나는 예외 없이 커피를 찾는다. 나의 커피에는 생텍쥐페리가 맡았던 향기가 배어있고, 노인을 생각하는 소년의 마음이 배어있다.
매화꽃 졌다 하신 편지를 받자옵고 개나리 한창이란 대답을 보내었소 둘이 다 봄이란 말은 차마 쓰기 어려워서 -이은상, ‘개나리’
매화는 겨울 끝에 피는 꽃이니 매화가 졌다 함은 봄이 왔다는 말이고, 개나리는 봄의 처음에 피는 꽃이니 개나리가 피었다 함도 봄이 왔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냥 아무렇게나 누구나 다 쓰는 말로 “봄이 왔소!”라고 말할 수가 없다.
너무 특별하고 너무나도 소중하면 그런 법이다. 사랑하는 마음이 지극하면, 그냥 심상하게 “사랑한다!”라고 말할 수 없어 자기 마음을 담아 전할 표현을 고심한다. 먼 길을 떠나는 사람에게 “잘 가!” 한마디로 끝내지 못하는 것도 마찬가지. 그래서 장미꽃을 품에 안겨주고, 밤새 고심하여 시를 지어주며 전송한다. 표현의 수준이나 효과의 득실, 그리고 상징이니 은유니 하는 방법은 그 다음 문제다.
815년 6월 백거이(白居易 772~846)는 멀리 강주(江州)의 외직으로 좌천되었다. 이듬해 백낙천은 심양강에의 포구에서 배 위에서 들려오는 애절한 비파 소리를 들었다. 비파 연주의 주인공은 상인의 아내였다. 그녀는 장안의 기녀 출신으로 젊은 시절을 화려하게 보냈지만, 늙어서는 장사꾼에게 몸을 의탁한 초라한 신세가 되고 말았다. 백낙천은 곡절 많은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는 비감한 마음을 이기지 못해 88행이나 되는 긴 노래 ‘비파행(琵琶行)’을 지어주었다. 여기에 이런 구절이 있다.
스르렁 두어 마디 줄 고르는 소리에 轉軸揆絃三兩聲 곡조도 이루기 전 정 먼저 일어나네 未成曲調先有情
백거이와 같은 해에 태어난 유우석(劉禹錫 772~842)도 벗에게 보낸 시에서 이렇게 말했다.
마시기 전 마음이 먼저 취하고 未飮心先醉 바람결에 그리움 짙어만 가네 臨風思倍多
그 사람을 만난다는 사실만으로 가슴이 설레고, 거기에 닿기도 전에 마음이 들뜨는 일이 있다. 웃지 않으려고 맘먹으면 어떤 코미디에도 웃지 않을 수 있지만, 어떤 경우에는 심상한 대중가요 가사에도 깊이 공명하기도 한다. 사랑은 사랑할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에게 찾아오고, 감동도 미리 가슴을 달궈놓은 사람에게서만 일어나는 법이다. 술에 대취하는 날은 예외없이 마음이 먼저 취했던 날이다. 안 취하려 맘먹으면 몸도 술을 받지 않고 마셔도 아니 취한다. 곡절 많은 여인이 비파를 타기 위해 스르렁 스르렁 줄 고르는 소리만으로도 백거이의 마음은 이미 들썩거렸고, 벗에 대한 그리움이 일자 술에 앞서 마음이 먼저 취한다. 설렘, 그것은 미리 취하는 마음인 것이다.
심노숭(沈魯崇, 1762~1837)은 서른한 살 되는 해 아내를 잃었다. 아내는 새로 짓는 집 주변에 많은 꽃과 나무를 심고 싶어했다. 심노숭은 아내를 새집 가까이 묻고, 아내의 생전 바람을 생각하며 그 주변에 많은 나무를 심기 시작했다. 죽은 뒤 무궁한 세월을 아내와 함께 즐기고 싶었던 까닭이다. 이를 보던 사람들이 안쓰러워 한마디했다. “살아갈 생각은 안 하고 사후의 계책만 세우는구려. 죽으면 알지 못하는데 뭘 계획한단 말이오.” 이에 심노숭은 발끈하여 쏘아붙였다. “죽으면 알지 못한다니 그게 대체 말이 되오!”(신산종수기·新山種樹記)
이후에도 심노숭은 아내를 그리며 수십 편의 감동적인 시문(詩文)을 지었으니, 그건 저승의 아내에게 닿으려는 간절한 마음의 소산이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하지 않는가.
문학이란 생의를 느끼게 해주는 커피향이고, 우유와 설탕이 듬뿍 든 머그잔 커피이다. 커피가 없어도 사는 데 아무 지장 없지만, 살랑거리는 그 향이 삶의 의욕을 불러일으키고 머그잔 하나가 삶을 생동하게 한다.
문학이 그렇지 않은가? 이 문학은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가? 봄을 두고도 봄이라고 ‘차마 말하지 못하는 마음’,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나거나 가슴이 두근거리는 ‘미리 취하는 마음, 즉 설렘’, 그리고 누군가에게 ‘간절하게 닿으려는 마음’에서 잉태된다.
사람이면 누구나 지니고 있는 마음에서 잉태된 문학은 천지간의 고운 언어의 옷을 입고 세상에 나타나 세상 사람들 사이를 소통시킨다. 실로 문학이 있어 나와 너, 산 자와 죽은 자, 먼 데 사람과 여기 사람이 마음을 나눌 수 있는 것이다.
유득공은 이덕무의 ‘청비록’에 붙인 서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옛적부터 시를 짓는 사람과 시를 말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시를 짓는 사람은 여항의 아녀자들이라도 안 될 것이 없지만, 시를 말함에 있어서는 슬기롭고 통달하여 감식력이 있는 사람이 아니면 되지 않는 것이다.” 시인을 깎아내리려 함이 아니라 시를 알기 어려움을 말한 것이다. 천리마(千里馬)는 언제나 있지만 그 자질을 알아보는 자는 늘 있는 것이 아니라는 한유의 말처럼, 세상에 좋은 시가 없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된 감식안을 지닌 평자가 드물 뿐이다. 이덕무는 ‘청비록’의 첫머리에 당나라의 승려 실휴(貫休)의 시를 실었다.
하늘과 땅 사이 말은 기운이 있어 乾坤有淸氣 흩어져 시인 비장에 스며드네 散入詩人脾 천 사람 억만 사람 많은 중에도 千人萬人中 한두 사람 정도가 알 수 있을까 一人兩人知
세상에 만나기 어려운 게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다. 오죽하면 공자도 “하늘도 원망 않고 남도 탓하지 않는다. 나를 알아주는 이는 오직 하늘뿐이로다!”라고 탄식하지 않았던가. 제(齊)나라를 열국의 패자(覇者)로 만들어 천하를 호령했던 관중(管仲)도 포숙아를 만나지 못했다면 무명 필부로 스러져갔을 것이다. 시인이 천지간의 맑은 기운을 받고 양공(良工)의 고심으로 서너 줄 시를 지어내고, 세상에 이 시를 말하는 사람들이 많아도, 실상 제대로 아는 사람은 한둘 겨우 있다는 말이다. 시도 무식한 인간을 만나면 평생 쌀겨 가마니나 지고 다니다가 죽어가는 천리마의 운명에 처하기 십상이다. 어찌보면 시에 관한 숱한 정보들은 그 시의 안방에는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울 밖을 배회하며 집안을 기웃거리는 객들의 웅성거림일지도 모른다. 거기에 다시 현학적인 말로 덧칠을 하니, 시는 늘 우리 삶과 겉돌게 마련이고, 문학을 이야기하는 교실은 난수표를 해독하는 고문 시간이 된다.
그러니 남에게 문학을 말하는 것은 참으로 위태로운 일이 된다.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나설 수 있는 것은, 이야기의 주제가 문학이 아니라 그 ‘문학이 태어나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문학작품은 때로 대단하고 위대하지만, 그것이 잉태되고 탄생하는 지점은 누구에게나 있는 소박한 것이다. 누구에게나 문학의 풍경이 있고, 또 모든 사람들은 스스로 의식하든 못하든 문학을 동경하며, 때로 문학에서 삶의 상처를 치유하고 희망을 얻는다.
오랜 세월 문자의 벽이, 입시를 위한 학교 교육이, 폐쇄적이고 권위적인 문단이라는 조직이, 자기 권위의 유지를 위해 특수한 훈련을 받은 전문가만이 문학을 다룰 수 있다는 거짓 관념이 문학을 우리 삶에서 소외시켰을 뿐이다. 앞으로 얼마간 나는 문학의 갈래, 사조, 기법, 사상 같은 영역이 아니라,
문학이 우리네 삶의 어떤 지점에서 태어나고 그것이 보통 사람들을 어떻게 달래줄 수 있는가를 이야기할 것이다. 흔히 문학의 위기를 말하지만, 유사 이래 지금처럼 문학작품이 많이 나오고 많이 읽힌 시대는 없었다. (이 문제는 나중에 거론하기로 하자.)
유럽과 남미를 오가는 야간 우편 비행기의 조종사인 파비앵은 밤에 내려다보이는 풍경을 좋아했다. 야간에는 지상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지상이 될 때가 있다. 어둠속에서 별이 반짝였다. 외딴집이다. 식탁에 팔꿈치를 괴고 있는 농부들은 등불이 그 검소한 식탁만을 비춘다고 생각할 뿐, 그 불빛이 80㎞ 떨어진 곳의 사람에게도 전해진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문학이란 외딴집 농가의 식탁을 비추는 작은 등불과도 같다.
어느 누가 처음부터 세상을 환히 비출 글을 쓰려고 마음먹는가? 그저 상처받은 자기 영혼을 위안하거나, 술값이나 벌어보자는 심산이거나, 아니면 넘치는 흥분을 주체할 길 없어서 붓을 들 뿐이다.
윤동주는 정말 나뭇잎이 바람에 떨리는 소리를 예민하게 느끼며,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라고 썼을 뿐이다. 아마도 윤동주는 자기가 들었던 나뭇잎 떨리는 소리를 이후 대다수의 한국 사람들이 함께 들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윤동주의 ‘서시’와 생텍쥐페리처럼 ‘야간비행’을 누구나 쓸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한밤중에 풀벌레 울음소리에 잠을 이루지 못하거나, 가족과 함께 맛있는 저녁을 먹으려고 식탁에 불을 밝히는 것이야 우리네가 항용 겪는 일상이 아닌가!
문학작품의 근원을 거슬러 찾아가면 신비롭게 높은 산이 아니라 집 근처 아무데나 있는 야트막한 야산이 서있고, 천재나 위인이 아니라 고뇌하고 번민하는 평범한 사람이 있을 뿐이다. 기적의 노예가 되고 싶은 사람이 신을 떠벌리듯, 울 안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이 그 집을 신비화하는 것이다.
“병이 들면 풀밭으로 가서 풀을 뜯는 소는 人間보다 靈해서 열 걸음 안에 제 병을 낫게 할 藥이 있는 줄을 안다고 首陽山의 어느 오래된 절에서 七十이 넘은 노장은 이런 이야기를 하며 치맛자락의 山나물을 추었다.” -백석, ‘절간의 소이야기’
약은 먼 데 있지 않다. 뒷산에서 얻은 병의 약이 히말라야 설산에 있을 리 만무하다. “不平則鳴”이라고 했다. 문학은 삶, 삶의 균열에서 나온다. 처방의 수준에 따라 효과의 차이야 있겠지만,
문학작품은 최소한 자기가 태어난 지점의 아픔 정도는 달래줄 수 있다.
나는 이런 식으로 문학과 우리의 삶이 가까워지기를 바란다. 이 연재의 목표다.
▲ 이승수|한양대 강사
경기도 광주에서 1964년에 태어났다. 문학과 역사와 지리가 만나는 지점을 탐색하고, 옛날과 오늘 사이에 대화의 다리를 놓는 것이 직업이다. 문학은 보통 사람들의 삶에서 태어나는 만큼, 문학 연구자의 소임 중 하나는 문학을 그 삶의 자리에 돌려주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간 ‘거문고 줄 꽂아놓고’, ‘조선의 지식인들과 함께 문명의 연행길을 가다’, ‘산사에도 그리움이 있었네’, ‘옥같은 너를 어이 묻으랴’ 등의 책을 냈다. 현재 한양대 국문과에서 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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