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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과 소설의 향기/문학이태어난자리

[문학이 태어나는 자리](8)탄생 - 어떤 생명의 탄생이가슴 아리지 않고경건

by 골든모티브 2008. 3. 8.

[문학이 태어나는 자리](8)

 

탄생-어떤 생명의 탄생이 가슴 아리지 않고 경건하지 않으랴


“축하합니다, 딸입니다! 아기도 산모도 모두 건강합니다.”

분만실 앞 간호사의 말에, 나는 제대로 인사도 못하고 우물거리다가 밖으로 나왔다. 하늘을 보았는데 자꾸 눈물이 어렸다. 눈물이 흘러 고개를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때 시 한 구절이 기러기 무리가 되어 먼 하늘을 가로질러갔다.

<일러스트 | 김상민기자>

한송이 국화꽃을 피우기위해 / 봄부터 솥작새는 / 그렇게 울어나보다. (서정주, ‘국화옆에서’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좋다’고 으레 떠들어댄 시이지만, 솔직히 그런 말들은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그런데 그 멋쩍기만 하던 몇 마디가 첫딸이 태어난 순간 말을 하며 내게 다가온 것이다. 나는 그때 모든 존재는 무수한 곡절을 거쳐 숱한 사연을 안고 태어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세상에 깊은 내력 없는 존재는 없다. 지금 살아 숨쉬는 생명은 예외 없이 지구의 세월만큼 견뎌온 존재들인 것이다. ‘국화옆에서’는 탄생의 비의를 건드린 시이다. 국화를 누님에 비유한 이 시의 세 번째 연은 그렇게 어색할 수 없다. 내 기준에서 이 몇 줄은 떼어버리는 게 옳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나 다시 한 아이가 태어났다. 또 눈물이 났다. 우리 삶이란 강물처럼 이어 흐르고 산맥처럼 이어 달리건만, 앞 물이 뒤의 물을 보지 못하고 저 산과 이 산이 만나지 못하듯 하나의 접점을 공유하지 못함을 생각했다. 어느 무덥던 여름날 옥상에 누워 별빛을 보며 그 별과 나 사이 수백만 광년의 세월 때문에 가슴이 시렸듯, 나를 만든 인연과 이 아이가 만들어갈 인연이 서로 닿지 못하는 것이 서러웠다. 나는 눈물 한 방울을 떨구며, 아주 낮은 마음으로 이 아이가 만들어갈 인연을 위해 기도했다. 새 아이를 맞이하는 기쁨에는 아주 깊은 슬픔이 내재되어 있었다. 나는 눈물로 두 아이를 맞이한 셈이다.

그러고 보니 죽음을 보내는 것은 쉬운 일이다. 장례식의 공식적인 표정은 애도이다. 하지만 그건 겉으로 드러나는 명분일 뿐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상가의 분위기는 북적거리고 때로는 흥겹기까지 했다. 풍악을 울렸고 놀이를 베풀었다.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불렀다. 조선시대에는 이러한 풍조가 만연하여 논란이 일었을 정도이다. 죽음을 대하는 문학의 입장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으니, 죽음에 대한 헌사를 빼고 나면 문학사의 흐름이 이어지지 않을 정도이다. 거기에는 알지 못할 묘한 홀가분함이 있다.

하지만 삶을 맞이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탄생을 위한 공식적인 태도는 축하이다. 하지만 실제 그 분위기는 언제나 차분하고 고요하다. 누구라도 함부로 말하지 않고 노래하지 못한다. 거기에는 오랜 기다림과 견디기 힘든 진통이 있다. 피가 흐른다. 새로 태어난 생명의 곁에는 죽음이 도사리고 있다. 그것을 피해간다고 해도 죽음을 떠안고 살아가는 것은 그의 숙명이다. 생명의 탄생에 엄숙함과 비장함이 감도는 것은 이 때문일까? 허만하는 ‘창조하는 정신은 언제나 / 피를 흘린다’(‘創자에 대하여’) 했고, 유하는 ‘글을 쓰는 매순간 내 몸은 / 여성이 된다 으아아아아’(‘Becoming Woman’)라고 했는데, 이는 모두 출산의 아픔에 근원을 두고 있는 은유이다.

지바고의 가족은 볼셰비키 혁명의 태풍을 피해 우랄 지역으로 몸을 피했다. 그해 겨울 아내 또냐가 임신을 했다. 지바고는 일기를 썼다. 아이를 낳을 때 모든 여성들은 버림받고 난 외로움으로 고독감에 잠긴다. 여성은 혼자서 아이를 낳고, 실존의 한 모퉁이에 요람을 놓기 위해 조용하고 안전한 장소로 옮기고, 말없이 홀로 아기를 키운다. 모든 어머니는 성모 마리아이기 때문이다. 그의 일기는 이렇게 이어진다.

주는 마리아의 영광이었다. 모든 여성에게 있어서 신은 그 자식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 모든 여성은 위인의 어머니인 것이다 - 훗날 그들을 실망시키는 때가 있더라도 그것이 여성의 죄는 아니다. - 오재국 옮김

새 생명을 낳을 때는 필연적으로 세상으로부터 절연된 고독감이 수반된다. 진통 끝에 아이를 낳고, 안전한 곳으로 옮기고, 말없이 돌본다. 새 생명을 낳기 위해서는 여성이 될 수밖에 없다. 모든 어머니는 모두 위대하다. 그가 낳은 자식이 바로 신이기 때문이다.

새 생명을 맞이하는 의례는 침묵의 기도이다. 가시적인 물상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눈을 감는다. 적막이 흐른다. 마지막 꽃잎 하나가 피려고 마지막 떨고 있는 고비에는, 바람도 햇볕도 숨을 죽이고, 기다리는 나도 눈을 감는다.(이호우, ‘개화(開花)’) 깊은 산간 마을의 눈 오는 아침에 나이 어린 아내가 첫아들을 낳았다. 캄캄한 부엌에서는 늙은 홀시아버지가 미역국을 끓인다. 그 마을 외딴 집에서도 산국을 끓인다. 태어난 아이의 외가일 것이다. 뜰의 배나무에서 무심히 짖는 까치 소리는, 외려 아무도 말하지 않는 산촌의 적막한 분위기를 더해준다. 백석은 1936년 아이가 태어난 평안도 깊은 산촌의 풍경을 시로 빚어내며, 그 제목을 ‘적경(寂境)’이라고 했다. 탄생 앞에서는 숨을 죽이는 법이다.

소리가 없어 적막한 것이 아니다. 깊은 산중의 그윽함은 간헐적인 뻐꾸기 울음소리로 더 깊어진다. 새 생명의 탄생에는 대지를 헤치고 나오는 기세와 알을 깨는 소리가 있다. 이 기세와 소리는 생명을 기다리는 경건한 침묵 속에서만 감지할 수 있다. 임부의 배에 귀를 기울이면 서서히 크게 들려오는 태아의 심장박동소리처럼. 이 소리는 그 밖의 세상 모두를 적막하게 한다.

봄비 고와 방울도 지지 않으니, 밤중에도 소리가 아니 들렸네. 눈 녹아 남쪽 시내 불어났거니, 풀싹들이 얼마간 돋아났으리. 春雨細不滴, 夜中微有聲. 雪盡南溪漲, 草芽多少生 - 정몽주, ‘춘흥(春興)’

겨울나무의 혼은 오히려 건조하다. 오리나무 흑갈색 둥치에 시린 귀를 붙이면 물관 속을 흐르는 은빛 물소리가 엷게 깔리는 눈송이 같은 순도로 희박하게 들린다. …… 거꾸로 흐르는 물소리의 설레임. - 허만하, ‘육십령재에서 눈을 만나다’


너무 고와서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는 봄비를 정몽주는 밤새 들었고, 눈 쌓인 육십령재의 오리나무 흑갈색 둥치에서 허만하는 수직으로 흐르는 물소리를 들었다. 그건 간절하게 기다리고 침묵으로 기도하는 사람만이 들을 수 있는, 생명이 태어나는 소리인 것이다. 스무 살의 양치기 청년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스테파네트 아가씨와 산중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행운을 얻었다. 그때 그는 온갖 정령들이 자유롭게 노닐고, 나뭇가지나 풀잎이 조금씩 자라는 소리를 들었다. 별똥별이 머리 위를 스쳐갈 때는 천국으로 들어가는 영혼의 소리가 들려왔다. (알퐁스 도데, ‘별’) 이 소리는 모든 생명을 사랑할 때만이 들을 수 있는 것이다.

곰과 범이 사람이 되고 싶다고 했을 때, 환웅은 한 타래 쑥과 마늘 스무 개를 주며 100일 동안 빛을 보지 말라고 했다. 곰은 삼칠일 동안 그 금기를 지키어 여인으로 다시 태어났다. 곰은 어둠 속에서 견디고 기다린 끝에 사람의 몸을 얻은 것이다. 어떤 생명의 탄생이 그렇지 아니하랴? 유화부인이 방에 있자 햇빛이 따라와 비추었다. 몸을 피하니 또 따라와 비추었다. 그 뒤로 유화부인은 태기가 있어 주몽을 낳았다. 세상 어떤 목숨이 태양의 정령으로 잉태되지 않는 것이 있을까? 두 편의 이야기는 위대한 인물의 탄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생명의 탄생은 가슴 아린 곡절을 지니며 신성치 아니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하는 것이다.

3월이다. 남도에는 벌써 매화가 피고 동백꽃이 벌었다. 이제 온 산하에 거뭇거뭇 새 생명이 피어오르고, 새들은 짝을 찾는 노래를 부를 것이다. 벽에 허리를 받치고 다부지게 앉아 손에 물을 묻혀가며 느리게 느리게 왼새끼를 꼰다. 말을 하는 것은 금기이다. 금줄을 만드는 것이다. 참숯과 청솔가지는 마련되어 있다. 내가 발 딛고 사는 이 땅의 둘레에 그 금줄을 칠 것이다. 내가 태어났을 때 부모님이 삼칠일 문에 금줄을 쳐 나쁜 기운의 침입을 막았듯이, 또 곰이 삼칠일 어둠 속에서 쑥과 마늘을 씹으며 간절하게 기도했던 마음으로. 어떤 것도 이 땅에 새로 태어나는 생명들을 범할 수는 없다.

탄생을 말하려니, 나도 모르게 마음이 들뜬다. 창가 화분의 작은 선인장 꽃이 예사롭지 않다. 윤동주는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했는데, 나는 오늘 거기에 이렇게 화답한다.

금줄을 치는 마음으로 / 모든 태어나는 것을 기다리노라.

〈 이승수 | 한양대 강사 〉

경향신문,2008.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