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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과 소설의 향기/문학기행 기사

봉산산방

by 골든모티브 2011. 4. 5.

미당 서정주의 집 봉산산방

 

장석남 시인과 미리 가 본 서울 남현동 ‘서정주의 집’

 

하늘이 하고나 고요하시니 난초는 궁금해 꽃피는 거라 / 난초

 

우리들의 무슨 설움 무슨 기쁨 때문에 / 강물은 또 풀리는가 

기러기 같이 / 서리 묻은 섣달의 기러기같이
하늘의 얼음장 가슴으로 깨치며 / 내 한평생을 울고 가려했더니
무어라 강물은 다시 풀리어 / 이 햇빛 이 물결을 내게 주는가 - 풀리는 한강가에서

   

 

미당(未堂) 서정주(1915∼2000) 시인의 서울 남현동 집이 옛 모습 그대로 단장을 마치고 4일 일반에 개방된다. 시인이 세상을 떠난 후 돌보는 이 없어 사실상 폐가처럼 방치된 지 11년 만이다.
 
 한민족의 원형적 심상에 관심이 많았던 미당은 단군신화에서 ‘쑥(蓬)’과 ‘마늘(蒜)’을 따와 ‘봉산산방(蓬蒜山房)’이라 이름 붙인 집에서 31년을 살았다. 1970년부터 타계하던 해까지다. 75년 『질마재 신화』부터 『떠돌이의 시』『팔할이 바람』 등 후반기 대표 시집을 이 곳에서 썼다. 치매를 예방한다며 세계 높은 산들의 이름과 높이를 아침마다 외우기도 했다. ‘봉산산방’은 문단의 사랑방이요 살아 있는 문학사였던 셈이다.

 1일 장석남(46) 시인과 함께 ‘미당 서정주의 집’을 미리 찾았다. 장씨는 ‘가을 저녁의 말’로 지난해 미당문학상을 받았다. 언어에 대한 감각이나 어법에서 가장 미당적인 시인으로 평가를 받는다. 친일시 등 미당의 일부 과오에도 대시인으로서 업적은 존중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집은 산뜻했다. 나무 문틀 등 살릴 수 있는 부분은 최대한 살렸다. 새로 갈아 끼운 창문틀은 최대한 옛 맛이 나도록 신경 썼다. 생전 시인이 쓰던 붓·벼루 등 문구류와 각종 시집, 즐겨 입던 양복과 한복·두루마기 등 유품 100여 점이 전시됐다. 2층 서재에서 부인 방옥숙 여사에게 부탁할 일이 있을 때 불었던 스위스제 뿔나팔, ‘미당’이라는 호(號)를 지어준 중앙고보 선배 배상기의 양어머니 최 상궁으로부터 선물 받은 호박(琥珀)염주 등 사연 깊은 유품도 있다. 생활인 서정주의 인간적 체취를 느낄 수 있는 기념관이자 문학관이다.

여권·돋보기 등 미당 유품들.



 정원은 과거와 많이 달라졌다. 나무와 돌이 빽빽하게 차 있던 옛 정원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대신 새로 심은 소나무와 후박나무, 모란·라일락·철쭉·대나무·감나무 등속이 생 흙내를 풍기며 싱그럽게 서 있었다. 나무들의 물관은 봄기운 가득한 생명수를 부지런히 빨아올리고 있을 터였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면 미당이 직접 그린 집의 평면도가 들어온다. 물론 전시품목이다. 손수 지은 집에 대한 미당의 애정이 느껴진다. 한쪽 벽 나무 패널에는 미당의 사진을 배경으로, 집에 관한 시 ‘관악산 봉산산방’의 전문을 보여주는 영상물이 흘러나왔다.

‘미당 서정주의 집’에 전시된 미당 흉상.

 미당은 집에 대한 산문도 썼다. 93년 산문집 『미당산문』에 실린 ‘봉산산방의 의미’에는 8만원도 안 되는 대학교수 월급을 절약해 ‘백 몇 십 그루쯤의 나무’와 ‘열 트럭쯤의 바윗돌들을’ 몇 년 간에 걸쳐 사 모은 후 70평 넓이의 마당에 심고 배치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정원 가꾸기는 가벼운 호사취미가 아니었던 것이다.

 시적 상상력의 영역에서 집은 하나의 자족적인 세계를 이룬다. 공간을 쪼개 쓰기에 바쁜 대도시의 빠듯한 집이 아니라 마당에서 생명이 자라고 생동하는 대지의 기운을 생생히 느낄 수 있는 자연 속의 집을 상상해보라. 거센 폭풍우나 거대한 눈보라가 몰아치는 벌판에서 집은 인간적인 것을 지키는 보루이기도 하다.

 장씨는 “시인들에게는 공간을 미학적으로 꾸미려는 본능이 있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그런 점에서 미당은 유난했던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장씨는 “바위를 정원에 들이고 주변에 화초를 심는 행위는 미당에게 단순히 눈요기를 위한 게 아니라 영원(바위) 앞에 선 인생(화초)을 되새기는 공부였던 것 같다”고 말했다.

 ‘봉산산방’이 다시 얼굴을 드러낸 데는 미당의 제자였던 동국대 국어교육과 윤재웅 교수 등 미당기념사업회의 역할이 컸다. 1만8000점에 이르는 미당의 유품을 수습해 전북 고창의 미당시문학관과 동국대 도서관에 나눠 보관해왔고, 그 중 60여 점을 미당의 집에 내놓았다. 엘리베이터 설치 등 집의 본 모습을 훼손하는 리모델링도 막았다. 윤 교수는 “만감이 교차한다. 앞으로 미당의 집에서 격조 높은 문화행사가 수시로 열려 한국문화의 저력을 보여주는 가늠자 역할을 하면 좋겠다”고 말했다.

홈페이지 seojungju.gwanak.go.kr, 02-881-4959.

시는 무엇이며, 시인은 독자에게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 것일까? / 김동기

 

 

 {다른시각} 불현한 시각 공존
 민족문제연구소 등 “친일작품도 전시돼야” 공정성 주문
1970년 미당은 남현동 집에 이사와 ‘봉산산방(蓬’蒜山房)’이라는 택호를 짓고 이 소나무를 손수 심었다. 봉산산방은 곰이 쑥(蓬)과 마늘(蒜)을 먹으면서 웅녀가 됐다는 단군신화에서 따온 옥호로 한국 신화의 원형이 시작된 곳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마쓰이 히데오!/ 그대는 우리의 가미가제 특별공격대원/(중략)… / 수백 척의 비행기와/ 대포와 폭발탄과/ 머리털이 샛노란 벌레같은 병정을 싣고/ 우리의 땅과 목숨을 뺏으러 온/ 원수 영미의 항공모함을/ 그대/ 몸뚱이로 내려쳐서 깨었는가?(후략).

 미당 서정주의 작품인 ‘오장(伍長) 마쓰이 송가(頌歌)’의 한 부분이다. 이 시는 태평양전쟁 당시 ‘자살 특공대(가미가제)’로 참전해 미국 함대를 공격하다가 전사한 개성 출신의 한국청년 ‘마쓰이 히데오’를 추모하고 있다. 미당의 친일시비가 불거질 때마다 등장하는 단골메뉴이기도 하다. 미당의 삶에서 이러한 친권력적이면서 다소 부족해 보이는 현실인식 능력은 지난 80년대 군사정권 시절 독재권력을 추앙한 ‘전두환 탄신 56회 축시’에서도 드러난다.


‘귀촉도’와 ‘국화 옆에서’ 등 주옥같은 시들로 우리시대 최고의 문인으로 추앙받고 있으나 동시에 친일행적의 과오 또한 공존하고 있다. 그는 훗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었던 일”이라며 뒤늦게 반성하는 모습도 보였다.

 

[시인들이 좋아하는 서정주 애송시]

서정주 : '꽃' 23회, '자화상' 14, '동천' 12, '귀촉도' 4, '국화 옆에서' 6, '푸르른 날' 4, '신록' 3,

'역사여, 한국 역사여' 1, '봄' 1, '서시' 1, '상리과원' 1, '아지랑이' 1, '풀리는 한강가에서' 3,

'선운사 동구' 1, '무등을 보며' 5, '영산홍' 1, '마른 여울목' 1, '바다' 1, '화사' 4, '석남꽃' 1,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1, '부활' 3, '침향' 1, '신부' 2 (총 72회 추천으로 1위)

시인세계 특집 / 김동기, 한서고, 문학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