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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과 소설의 향기/문학기행 기사

한국 문학지리학-장석주

by 골든모티브 2008. 8. 26.

 

 

1. 장소의 탄생 (우리시의 문학지리학)
 
** 아름다운 우리 땅이 낳고 기른 詩의 발자취를 찾아서 **

황해도에서 독도까지 우리 땅에 새겨진 선인들의 인문지리학적 위업을 살피는 동시에 시인들이 남긴 주옥같은 문학지리의 축적물들을 오롯이 재발견해내고 있는 이 책은 이중환의 『택리지』와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 영감을 받아 집필되었다.

 

그 탐구는 김소월과 백석의 정주, 서정주의 질마재, 오장환과 김수영과 김혜순의 서울, 정지용의 옥천, 박용래의 강경, 고은의 문의마을, 김광섭의 성북동, 박목월의 경주, 신경림의 목계나루, 이성복의 남해 금산, 김지하의 목포, 황지우와 김준태와 임동확의 광주, 김영랑과 한하운과 이성부의 전라도, 유하의 청계천 세운상가, 함민복의 강화도, 고형렬의 설악산, 고정희의 지리산, 문충성의 제주도, 유치환의 울릉도, 박정대의 독도, 그리고 황병승의 상상의 지리까지를 아우르며 펼쳐진다. 100여 명의 시인과 그들이 노래한 100여 편의 시를 싣고, 우리시와 지리의 만남은 한반도의 산계와 수계를 타고 갈래를 지으며 힘차게 내달려간다.  우리시의 문학지리학>이라는 부제를 단 이 책은 김소월에서 황병승까지 한국 현대시에 그려진 특정 공간, 곧 장소의 특징과 의미를 인문지리적 프리즘으로 살펴보고 있다.

 

 

2. 문학이 태어난 곳을 찾아서-장소의 기억들을 꺼내다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장석주(54)씨가 시인 기형도가 자라난 안양, 화가 나혜석이 태어난 수원, 소설가 오정희가 묘사한 인천, 시인 함민복이 시를 쓰며 살아가는 강화도 등 경기도 곳곳을 답사하며 그 땅이 배출한 예술가들의 삶과 작품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문학 지리'라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려는 시도가 신선하다. 그는 캐나다 지리학자 에드워드 렐프를 인용하며 "사람은 곧 자신이 살고 있는 장소이고, 장소는 곧 이곳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고 강조한다.

 

제3부 장소의 기억들을 꺼내다 - 목록

 

그 많던 포도원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 안양_기형도 이토록 아름답고 오래된 성곽도시 / 수원_나혜석 서해로 나아가는 관문 / 인천ㆍ강화_오정희, 이규보, 김중식, 함민복 기세 좋게 뻗어가는 신도시 / 일산ㆍ김포_김지하, 최창균, 고형렬, 박철 주한미군 달러로 번성하던 '리틀 시카고' / 동두천_김명인 철거민이 세운, 철거민은 없는 신도시 / 성남ㆍ분당_윤흥길, 공지영 들 넓고 물 맑은 경기 남단 / 안성_고은, 조병화, 박두진, 박후기

 

[그곳의 포도알과 양공주의 기억, 시가 되고 소설이 되었네]

 

 

문학작품과 그 지리적 공간 사이의 관계에 대해 탐색하는 '문학지리학'(literary geography)이란 용어는 20세기초 유럽에서 등장했지만, 국내에선 2004년 동국대 한국문학연구소의 '한국 문학지리학의 새로운 모색'이라는 학술대회에서 처음 논의된 것 같다.
이후 2006년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장석주가 '장소의 탄생-우리시(詩)의 문학지리학'(작가정신)을 펴내면서 본격적으로 구현됐고, 이어 다른 평론가들도 이 용어를 끌어다 쓰기 시작했다. 장석주는 두 번째로 '장소의 기억을 꺼내다-경기도의 문화자리'(사회평론)를 최근 펴냈다. 이번 책은 경기도에 집중했다. 경기도란 공간을 분석하고 그 공간에서 살았을 작가가 어떻게 작품에 그 공간의 삶을 담아냈는가를 추적한다. 장소는 고향이기도 하고 순례의 길이기도 하지만, 작가는 거기서 어떤 정체성을 부여받는다. 반대로 작가는 작품을 통해 장소에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하기도 한다.

따라서 '문학지리학'은 무슨 낯선 개념이 아니라 작가의 '삶'과 '문학'을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양쪽 렌즈'로 또렷하게 바라볼 수 있게 하는 관점이다.

"목마른 내 발자국마다 검은 포도알들은 목적도 없이 떨어지고 그 때마다 고개를 들면 어느 틈엔가 낯선 풀잎의 자손들이 날아와 벌판 가득 흰 연기를 피워올리는 것을 나는 한참이나 바라보곤 했네." (기형도 '포도밭 묘지1'중)

'안양'하면 지금도 '안양 포도'를 생각할 만큼 안양은 1970년대초까지만 해도 유명한 포도산지였다. 하지만 안양이 경인공업지대의 거점도시로 바뀌면서 포도밭은 뭉개져 공장터로 바뀌었다. 그 인근에서 자란 시인 기형도의 '포도밭 묘지'연작은 그 스산해진 장소에서 보낸 추억과 기억을 꺼내보여주고 있다.

"해안촌 혹은 중국인 거리라고도 불려지는 우리 동네는 겨우내 북풍이 실어나르는 탄가루로 그늘지고, 거무죽죽한 공기속에 해는 낮달처럼 희미하게 걸려있었다.(…) 검게 그을린 목조 적산 가옥 베란다에 널린 얼룩덜룩한 담요와 레이스의 속옷들이 이 시의 풍물이었고 그림자였고 불가사의한 미소였다"(오정희 '중국인 거리'중)

인천에 살았던 사람이 이 글을 본다면 금세 자유공원에서 내려다 본 풍경을 떠올릴 것이다. 소설가 오정희는 초등학교 2학년 때 중국인촌이 내려다보이는 그 곳에 살았다. 중국인촌에 세들어 사는 양공주들의 이국적인 화려함은 전쟁 직후의 혼란기에 막 사춘기로 들어선 작가의 내면에 깊이 새겨졌고 나중에 소설 '중국인 거리'로 만들어 진다.

"일산 새집에 들어/빈 방에/흰 빛 난다/진종일 눈부시고/매미 소리 뼈만 남고/어둠 속 붉었던/ 살/자취없다/ 먼 강물/핏속에 흐르나/나 이제 벌판에서 죽으리"(김지하 '일산시첩'전문)

1990년대부터 일산에 터를 잡은 김지하는 이 시에서 평생 자신을 몰고갔던 '어둠 속 붉었던'것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

장석주는 "흰 방에 닻을 내린 그 삶은 살의 모든 욕망과 피의 요동을 제거한 채 뼈만 남은 삭막한 삶"이지만 "그 삭막함이 시인으로 하여금 아득한 곳에서 흐르는 강물을 보게하고(…), 그래서 시인은 '내 삶/아직/괜찮다'라는 긍정속에 있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 짧은 시 한편 속에, 다소 삭막하지만 해사한 아파트들과 멀리 한편으로 한강이 흐르는 신도시 일산이 신기하게도 그대로 떠오르면서 시인의 삶이 겹쳐진다.

책에는 신여성 나혜석(수원), 시인 김중식(인천), 함민복(강화), 고은 조병화 박두진(안성), 김명인(동두천), 소설가 윤흥길 공지영(성남·분당) 등 경기도 땅에서 살아갔고, 살아가고 있는 많은 작가와 이들이 만들어낸 문학을 다루고 있다.

안성에서 터를 잡고 있는 장석주는 "내가 경기도의 문학자리에 관심을 갖는 까닭은 그것이 더 넓은 의미에서 내 실존의 의미에 대한 관심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문화일보,2008.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