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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과 소설의 향기/소설 작가

순수문학, 장르문학의 ‘상상력’을 입다-징후소설(symptom fiction)

by 골든모티브 2008. 4. 21.

순수문학, 장르문학의 ‘상상력’을 입다

‘가벼움’에 익숙해진 독자에 눈맞춤

김영하

한국 문학에서 엄격하게 구분돼 왔던 본격문학과 장르문학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다. 본격문학 진영의 소설가들이 장르소설의 문법과 장치를 차용한 소설, 기존 리얼리즘 소설에서 볼 수 없었던 기발하고 번뜩이는 상상력을 자랑하는 소설들을 속속 발표하고 있다.

계간 ‘작가세계’ 봄호는 한국 문학의 이런 흐름을 분석한 기획특집 ‘장르문학 혹은 라이트노블’을 마련했다.

복거일

영화평론가 이상용씨는 ‘한국문학 속 장르문학, 장르문화 속 한국문화’를 통해 이같은 현상이 1차적으로는 독자들의 변화에 있다고 분석했다. “기존 문예계간지들이 점점 더 무거운 ‘문학담론’으로 독자들을 위압하는 데 반해, 2000년대 이후 독자들의 취향은 가벼운 읽을거리를 선호한다”는 것이다. 이는 민족·국가·민주화 등 거대담론이 실종된 시대의 흐름과도 연관이 깊다. 이같은 흐름의 선두에는 소설가 박민규씨가 있다. 그의 데뷔작인 장편소설 ‘지구영웅전설’(문학동네)이나 소설집 ‘카스테라’(문학동네)는 판타지 혹은 SF(과학소설)적인 요소가 다분하다. 최근 나온 계간 ‘창작과 비평’ 봄호에 실린 단편 ‘절’은 아예 무협소설의 문체를 빌려 현실사회를 비판했다.

지난해 가을 소설집 ‘셋을 위한 왈츠’(문학과지성사)를 펴낸 작가 윤이형씨와 스파이 영화에서 소재를 얻은 장편소설 ‘본드걸 미미양의 모험’(문학동네)을 쓴 오현종씨 역시 각각 로봇을 소재로 한 ‘아이반’과 ‘창백한 푸른 점’을 문예지에 발표했다. 또 소설가 우광훈씨는 올초 팩션과 추리소설의 기법을 차용해 화가 베르메르의 위작사건을 다룬 ‘베르메르 Vs 베르메르’(민음사)를 펴냈다.

오현종

순문학과 장르문학이 섞이는 경향은 지난해 5월 창간한 장르문학 전문 월간지 ‘판타스틱’에서도 확인된다. 이 잡지는 추리 무협 로맨스 미스터리 호러 SF 등의 장르문학과 더불어 소설가 복거일씨의 SF연재물, 소설가 김영하씨 인터뷰 등 장르문학과 본격문학의 경계를 실험하는 본격문학 작가들을 꾸준히 소개해 호평을 얻고 있다.

문학평론가 강유정씨는 이처럼 장르문학의 요소가 반영된 본격문학 소설들을 징후소설(symptom fiction)이라고 지칭한다. 그는 ‘작가세계’ 특집에 실린 ‘한국 소설의 새로운 문체, SF(symptom fiction)’라는 글에서 박민규씨를 비롯해 윤이형, 오현종씨 등의 소설을 징후소설로 규정했다. 이들 작품이 채용한 과학소설(Science fiction) 혹은 장르소설의 특성과 문체가 현재의 삶을 좀더 낯설게 하기 위한 문학적 장치라는 설명이다. 대개의 SF가 ‘미래에 대한 작가의 주관적 비전’ 혹은 미래에 대한 ‘디스토피아적 불안과 유토피아적 염원’을 그린 데 반해, 이들 소설은 SF의 문법을 빌려오긴 하지만 현재의 삶을 ‘일종의 병적 징후와 증상으로 전경화하기 위해 비사실적 요소들과 결합’시켰다는 차이가 있다.

박민규

동시대 한국문학의 이같은 시도는 일찌감치 장르문학을 본격문학에 수용한 서구문학계에 비하면 늦은 감이 있다. 움베르토 에코의 대표작 ‘장미의 이름’은 서지학적 지식과 탐정소설의 기법을 결합했고, 미국문학의 대표주자 폴 오스터는 ‘거대한 괴물’ 등을 비롯한 일련의 작품에서 추리기법을 응용한다. 남미환상문학의 대가인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루이스 세풀베다도 빼놓을 수 없다.

이들 작품은 장르문학의 상상력을 적극 끌어들여 독자들에게 ‘소설 읽는 맛’을 극대화하면서도 문학이 갖는 보편성을 잃지 않는다. 국내 본격소설의 변화가 한국문학의 외연 확대로 이어질지 지켜볼 일이다.

 

경향신문,2008.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