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성 시인 초청 강의
시(詩)란 무엇인가?
나는 <저문 강에 삽을 씻고>의 시인 정희성으로 소개되고는 한다. '삽'이라는 단어가 산업화시대의 노동자들의 삶의 정서를 건드려주는 뭐가가 있었기 때문일 텐데, 이 작품은 우리나라가 본격적으로 산업화되기 시작하던 70년댜의 작품이다.
나는 시가 당연히 자기가 살고 있는 시대의 사회적 현실을 반영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좋은 시가 지녀야할 내용적 요건 가운데 하나일 뿐이지, 사회성을 지니고 있다 해서 자동적으로 좋은 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저문 강에 삽을 씻고>
흐르는 것이 물뿐이랴
우리가 저와 같아서
강변에 나가 삽을 씻으며
거기 슬픔도 퍼다 버린다
일이 끝나 저물어
스스로 깊어가는 강을 보며
쭈그려 앉아 담배나 피우고
나는 돌아갈 뿐이다
삽자루에 맡긴 한 생애가
이렇게 저물고, 저물어서
샛강바닥 썩은 물에
달이 뜨는구나
우리가 저와 같아서
흐르는 물에 삽을 씻고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의 마을로
다시 어두워 돌아가야 한다.
시가 뭐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또 좋은 시란 어떤 것이냐는 질문도 자주 받는다. 유종호 교수는 "모든 좋은 시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빛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40년이나 시를 써왔으면서도 나는 시란 이런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 나는 여전히 시에 허기져있다. 일찍이 '이것이야말로 최상의 시다' 라고 할 만한 좋은 작품을 한 편이라도 썻다면 나는 더 이상 시를 쓰지 않았을 것이다. 이게 시인가 해서 붙잡고 보면 그건 시의 속살이 아니라 시의 겉옷에 불과했다.
<詩를 찾아서>
말이 곧 절이 라는 뜻일까
말씀으로 절을 짓는다는 뜻일까
지금까지 시를 써오면서 시가 무엇인지
시로써 무엇을 이룰 지
깊이 생각해 볼 틈도 없이
헤매어 여기까지 왔다
경기도 양주군 회암사엔
절 없이 절터만 남아있고
강원도 어성전 명주사에는
절은 있어도 시는 보이지 않았다
한여름 뜨락에 발돋움한 상사화
꽃대궁만 있고 잎은 보이지 않았다
한 줄기에 나서도
잎이 꽃을 만나지 못하고
꽃이 잎을 만나지 못한다는 상사화
아마도 시는 닿을 수 없는 그리움인 게라고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마음인 게라고
끝없이 저잣 거리 걷고 있을 우바이
그 고운 사람을 생각했다
|
|
▲정희성시인 사인회
시란 이런 것이다 라고 말한 사람은 많다. 시의 정의는 시인의 수만큼 많다. 아니 어쩌면 시인들이 쓴 시의 숫자만큼이나 많다고 할 수 있다. 엘리어트는 "시에 관한 정의의 역사는 오류의 역사이다"라고 말한다. 나는 오늘 말이 지닌 몇가지 속성을 중심으로 내가 생각하는 <좋은 시>의 윤곽을 그려보고자 한다. 한 편의 시를 이루는 언어적 요소는 말뜻, 소리, 모양(형상,이미지)이다. 말 뜻을 강조하면 회화성이 강한 시가 될 것이다. 우리는 이 세 가지를 1920년대 중반에서 193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여러 유파를 통해 따로따로 경험하게 된다.
말을 말 그대로의 의미로 사용하든 상직적인 의미로 사용하든 말이 지닌 뜻은 그 시의 내용을 이루게 되는데, 언어의 세 요소 가운데 말이 지닌 뜻을 가장 강조한 것이 우리 문학사에서 1920년대 중반의 프로문학이다. 프로문학은 내용성(이념성)에 치중한 나머지 언어가 지닌 다른 두요소를 소홀히 한 점이 있다. 그러나 그 이념성은 일제에 대한 저항의 성격을 지닌 것으로 오늘날과 같은 반공의 시각으로 평가될 일은 아니라고 본다.
이에 대한 반동으로 제출된 것이 1930년대 시문학파의 순수문학이다. 문학사적으로 시문학파의 등장은 프로문학의 주체인 카프의 헤체에서 출발한다. 염무웅 교수에 의하면 순수문학은 "카프 문학의 역사적 극복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식민지 권력의 탑압에 의해 강요된 것이고 정치적 후퇴에 대한 예술적 보상"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점에서 문제가 있지만, 시문학파는 프로문학이 소홀히 했던 다른 측면 곧 '소리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오늘날 우리가 영랑의 시를 읽을 떄 거기서 어떤 감명을 받는다면 그것은 주로 그의 시가 지닌 음악성에 기인하는 것이기가 쉽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은, 그의 시가 구체적인 경험 내용을 진술하기 보다는 그것의 단편적이고 순간적인 인상과 감흥을 드러내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적어도 "시는 말해진 내용이 아니고 그것을 말하는 방식"이라는 하우스만의 말은 영랑의 시를 놓고 볼 때 타당한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영랑의 시가 글자 그대로 음악성을 잘 살린 시인가는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정작 그의 시가 '노래'되고 있는 것이 없지 않은가?
외격상 시문학파에 대한 반동으로 제출된 것이 모더니즘이다. 김광균으로 대표되는 회화성이 강한 시가 우리 문학사에 등장하게 된다. "김영랑과 감광균은 피상적으로 볼 때 서로 매우 이질적인 시인이지만 근본적으로는 비슷한 시인"이라는 김종철 교수의 지적이 있다. 그들은 관념적인 세계관에 있어 공통적인 기반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그 외견상의 차이 즉 김영랑의 '음악적'인 면과 김광균의 '회화적'인 면은 언어의 세가지 속성 줄 '의미' 즉 이념성을 제외한 나머지 두 부분을 과장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김광균의 시가 제시하는 이미지에서 우리는 과연 얼마만한 영홍의 깊이를 느끼는지는 생각해볼 일이다.
소리내서 읽으면 노래를 둗는 듯하고, 머리속울로는 그림이 그려지고, 가슴에 묵직하게 안겨오는 뜻 깊은 시가 있다면 그것이 바로'좋은 시'일 것이다. 애송시에는 무언가 그럴만한 근거가 있다. 우리가 애송하는 몇편의 시에서 그것이 얼마만큼 성취되었는지 생각해보자.
▶대표작 : 길, 답청, 민지의 꽃, 얼은 강을 건너며, 숲, 태백산행,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한서고 밤샘책읽기 대회> 김동기, 국어교사
'❀ 문학과 삶의 향기 > 문인 행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용택 시인 초청 강의 (0) | 2012.10.08 |
---|---|
정호승시인-시의 발견과 이해 (0) | 2012.07.29 |
김승옥 소설가 등단 50주년 문학낭독회 (0) | 2012.03.24 |
2011 한일문화교류의 밤 (0) | 2011.11.09 |
만나고 싶은 작가 - 정호승시인 (0) | 2011.08.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