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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과 소설의 향기/현대 문학

중국인보다 더 삼국지에 열광하는 한국인

by 골든모티브 2008. 5. 19.

[Why] 조선 선조때 상소문에 "삼국지 널리 읽혀 걱정"

 

중국인보다 더 삼국지에 열광하는 한국인


▲ 삼국지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
삽화. 위부터 유비, 관우, 장비, 조조, 제갈량. 도서출판‘깊은 샘’제공
 
월북 소설가 구보 박태원(1909~1986)이 완역한 삼국지가 월북 반세기 만에 국내에서 출간됐다. 도서출판 '깊은 샘'은 박태원이 북한에서 1964년 전 6권으로 완역, 출간했던 '삼국연의'를 저본(底本)으로 해 총 10권의 박태원 삼국지를 펴냈다고 밝혔다.

한국에서 '삼국지'는 영원한 베스트셀러다. 한용운, 박태원, 박종화, 김동리, 황순원, 황석영, 이문열 같은 한국 문학의 간판 글쟁이들이 모두 '삼국지'를 번역하거나 출간했다. 지금까지 국내에서 발간된 삼국지는 400여 종이다. 그 외에 삼국지 처세학·경영학·논술 같은 실용서도 50종이 넘는다. 최근에는 영화, 만화, 비디오, 컴퓨터 게임, 애니메이션까지 만들어졌다. '읽는 삼국지'에서 '보고 즐기는 멀티미디어형 삼국지' 시대를 맞은 것이다.

인하대 한국학연구소는 2004~2006년 조선 중기부터 지금까지 발간된 삼국지 한국어 번역 판본을 발굴·조사하고 해석했다. 연구소에 따르면 국내 역사책에 삼국지 얘기는 조선 선조 2년(1569년) 처음 등장했다. 성리학자 기대승의 상소문에 "삼국지가 널리 읽혀 풍속의 괴란(壞亂)이 우려된다"는 문구가 나온다. 이때 이미 삼국지가 유행했다는 증거다. 당시 원본을 손으로 옮긴 필사본을 비롯해 목판본·납 활자본이 널리 퍼져 있었고 조선 후기에는 청나라에서 석판본이 수입됐다.

삼국지는 조선 정조 이후 상업적 측면에서 출간되다 1904년 근대화 판본인 구 활자본이 박문서관에서 간행됐다. 1929년에는 양백화에 의해 최초로 신문(매일신보)에 연재됐다. 만해 한용운은 1939~1940년 조선일보에 '삼국지'를 연재했다. 김동리와 황순원이 공저(共著)라는 방식으로 낸 삼국지는 1958년 초판 인쇄된 후 1964년까지 7쇄를 낼 만큼 널리 읽혔다.

박태원은 1941년 4월 월간 잡지 '신시대'에 '삼국지' 연재를 시작했다가 1943년 1월호를 마지막으로 중단했다. 독자들의 뜨거운 반응이 이어지자 해방 후 다시 번역에 들어가 정음사에서 5권으로 출간했다. 하지만 이 역시 작가의 월북으로 중단됐다. 정음사는 이후 최영해 사장의 이름으로 1955년 총 10권을 완간했다. 박태원은 월북 후 1959~1964년 총 6권의 '삼국지'를 출간했다. 이번에 나온 '박태원 삼국지'는 이 북한 출간본이 원본으로, '삼국지의 한국화와 현대화'라는 성취를 처음으로 일궈낸 시발점으로 평가받고 있다.

1967년 삼성출판사에서 삼국지를 펴낸 박종화는 역사소설가답게 역사소설 기법으로 깊은 맛을 자아냈다는 평을 받는다. 1974년 발간된 김구용 삼국지는 지금까지 나온 판본 중 가장 완벽한 번역으로 알려졌다.
신라 향가를 복원한 국어학자 양주동도 1976년 총 7권으로 구성된 삼국지 번역본을 냈다. '삼국지'를 쓰며 옥고를 버틴 황석영은 2003년 10권짜리 번역서를 출판했다. 연구소 측은 "다른 직역본이 한문의 원문 표현과 고문 투의 번역체를 그대로 구사하고 있는 데 반해 황석영은 한글 문장의 아름다움을 살린 새 번역을 시도했다"고 평했다. 이문열이 1988년 펴낸 삼국지에 대해선 "인물에 대한 해석이 자의적"이라고 평했다.

근대 이후에 발간된 삼국지 판본은 중국 '모종강(毛宗崗)류'와 일본 '요시가와 에이지(吉川英治)류'가 양대 산맥이다. 모종강은 1494년 나관중이 펴낸 '삼국지연의(삼국지 원전)'를 소설로 완성한 인물이다. 삼국지연의가 서기 285년 진나라 역사 이야기를 종합 정리한 것이라면 모종강은 서사적 구성을 완결지었다.

박태원, 최영해, 박종화, 김구용 등이 쓴 삼국지가 모종강류다. 원전에 충실하면서도 소설적 묘미를 살린 것이 특징이다. 김동리, 김광주, 양주동이 쓴 삼국지는 1939년 요시가와 에이지가 현대적 기법으로 재창작한 것을 그대로 번역한 수준이다. 요시가와 에이지의 삼국지는 '촉한(蜀漢) 정통론'에서 벗어났고, 인물들의 내면 세계를 들여다봤다는 점에서 의미있다.

연구소 측은 "한국어가 문학어로 재탄생하는 데 삼국지 번역이 차지하는 공로도 크다"고 말했다.
한국의 대표작가들이 끊임없이 '삼국지' 번역을 시도하는 이유는 뭘까. 문학평론가 조성면씨는 "삼국지는 일단 출판하면 어느 정도 팔린다는 게 보장돼 있고, 작가들의 도전의식을 자극하는 대작이기 때문"이라며 "출판사나 매체 간의 경쟁도 원인의 하나로 볼 수 있다"고 했다.

이문열은 "창작품도 아니고 일종의 재구성이라 개인적으로 아주 의미 있는 작품은 아니다"라며 "스스로 폄하해서 말하자면 일종의 부업처럼 젊을 때 흥이 나서 썼던 작품"이라고 했다. 그는 예전에 "내 창작소설을 다 합친 것보다 삼국지가 더 많이 팔렸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문열 삼국지는 1988년 초판을 찍은 후 지금까지 30쇄, 1500만 부라는 대기록을 세운 '초특급 베스트셀러'다.

삼국지에 대한 논란은 역사적 사실과 괴리가 크다는 것. 연구소 측은 "삼국지의 내용 가운데 70%만 사실이고 30%는 허구"라며 "중국인 특유의 과장이 많고 '촉한(蜀漢) 정통론'의 시각에서 쓰였기 때문에 사실과 맞지 않는 대목이 많다"고 했다.
 
 
왜 삼국지인가 - 과거로 현재 보려는 욕망 충족
 
한국인들은 왜 삼국지에 열광할까. 윤진현 인하대 한국학연구소 박사는 "삼국지는 본고장인 중국보다 우리나라에 더 깊숙이 파고들어 있고 삼국지를 외래의 것으로 여기는 한국사람들은 거의 없다"며 "시대를 막론하고 과거를 통해 현재를 비춰보고자 하는 욕구가 있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그것을 유독 삼국지라는 작품을 통해 충족시키려 하는 경향이 강하다"고 말했다.
▲ 한국의 대표 작가들이 펴낸‘삼국지’들. 왼쪽부터 이문열 삼국지, 황석영 삼국지, 박태원 삼국지. 조선일보 DB
그는 삼국지가 특히 인기를 끄는 이유를 두 가지로 해석했다. 하나는 국권을 잃은 시기의 자기 정체성을 역사를 통해 해명하려는 시도, 또 하나는 이야기 자체의 풍부함이다.

그는 "인간은 가문이나 역사를 통해 자기 정체성을 설명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우리는 나라를 잃어버린 경험이 있어서 한국 역사 안에서는 쉽게 다루기 어려웠고 경로도 막혀 있었다. 반면 삼국지는 이미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공유하는 완성된 문학이고, 이미 나와있는 것을 재해석하면서 필요한 교훈을 쉽게 찾아낼 수 있게 된 것"이라고 했다.

또 "현재 내가 처한 어려움이나 모든 상황을 삼국지에서 예를 들어 설명할 수 있을 정도로 풍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는 점, 인간사에서 생길 수 있는 다양한 역학관계를 비유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내용이 많다는 것도 삼국지의 매력"이라고 했다. 한국 작가들이 끊임없이 삼국지 번역서를 내는 이유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

조선일보,2008.5.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