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명을 둘러싼 문인들의 고충
올해 한겨레문학상 수상 작가인 고은주씨에게는 고민이 하나 있다. 고민의 근거는 다름 아닌 이름. ‘고은주’라는 이름의 선배 소설가가 이미 활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새 이름, 그러니까 필명이 필요한 것이다. ‘두 번째 고은주’씨와 마찬가지로 늦게 출발한 자의 비애로서 어쩔 수 없이 필명을 써야 했던 이들이 있다. 평론가 권성우·진정석씨 등과 대학(서울대 국문과) 동기인 시인 안찬수씨의 본명은 ‘안도현’. 그러나 두 살 위인 시인 안도현씨와 혼동을 피하고자 필명을 쓰기로 했다. 소설가 김형경씨는 소설보다 시를 먼저 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김정숙’이라는 본명을 썼는데, 잡지에 작품이 발표된 뒤 전화 한 통을 받았다. 같은 이름을 쓰는 선배 시인의 남편이었다. ‘후배가 이름을 바꾸는 게 예의 아니겠느냐’는 압박성 조언을 받아들여 지금의 이름을 택했다.
문인들의 필명이 반드시 중복과 혼동을 피하기 위해서만 쓰이는 것은 아니다. 본명이 너무 평범하거나 비문학적(?)이라고 판단한 이들이 ‘있어 보이는’ 필명을 취하는 경우가 많다.(이하 괄호 안은 본명.)
신경림(신응식), 김지하(김영일), 염무웅(염홍경), 조해일(조해룡), 황석영(황수영), 이문열(이열), 황지우(황재우), 류시화(안재찬), 방현석(방재석) 등이 그런 경우다. ‘이무기’를 연상시키는 평론가 임우기(임양묵), ‘정’(情)과 ‘리’(理)라는 뜻을 담은 평론가 정과리(정명교)와 같은 경우도 있다. 성민엽(전형준), 유하(김영준), 전경린(안애금), 정이현(홍종현)씨는 아예 성을 바꾸었다. 이념과 시대의 분위기를 담은 필명들도 있다. ‘노동해방’의 약자인 시인 박노해(박기평), ‘ 무산계급’을 가리키는 시인 백무산(백봉석) 등이 대표적이다. 시인 이산하씨의 본명은 이상백인데, 소설가 박상륭씨를 존경한 나머지 한동안 이륭이라는 필명을 쓰다가 시대의 요청(?)에 따라 지금의 필명으로 정착했다. 본명이 임준열인 평론가 임헌영씨의 이름에서는 남로당 총수 박헌영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부모의 성을 한 자씩 따서 필명으로 삼은 2004년 한겨레문학상 수상 작가 권리(권민성)씨는 ‘부모 성 같이 쓰기’라는 시대 정신을 필명에 반영한 경우다.
필명에 관한 한 남부럽잖게 모색과 방황을 거듭한 이가 소설가 심상대씨다. 오랫동안 본명을 쓰던 그는 그리스 신화 속 인물의 이름을 딴 ‘마르시아스 심’을 필명으로 삼았다가, 급기야 ‘선데이 마르시아스’로 한 발 더 나갔다. 자신의 이름 ‘상대’와 발음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선데이’를 택한 것. 그렇게 이름에서부터(어쩌면 이름에서만?) 세계화를 염두에 둔 변신을 모색하던 그는 언젠가 슬그머니 본명으로 돌아왔다.
목월(木月)이나 일석(一石)에 필적할, 소설가 한수산(水山)씨의 ‘필명급 본명’, 마찬가지로 문학적 지향이 뚜렷해 보이는 작고한 소설가 이문구(文求)의 이름은 이름 자체가 문학적 운명을 예고하는 듯하다.
최재봉의 문학풍경 / 한겨례,2008.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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