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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號)에도 유행어 - 고려말

by 골든모티브 2008. 3. 23.

[이한우의 역사속의 WHY]

 

隱(숨을 은)… 齋(집 재)… 호(號)에도 유행어가

 

                                         신중·조심하며 살자는 의미
                                                   亡國·士禍때 '은둔 풍조' 반영
                                                   정작 정쟁의 주역들이 애용

 

고려말 식자들 사이에 유행이 있었다. 호(號)에 숨는다는 뜻의 '(隱)'자를 붙이는 것.

명신(名臣) 이인복(李仁復 1308~1374)은 나무꾼(樵)으로 숨어살고 싶다는 뜻을 담아 초은(樵隱)이라고 했다. 목동을 꿈꿨는지 이색(李穡 1328~1396)은 목은(牧隱)이었고 이방원에게 주살당한 정몽주(鄭夢周 1337~1392)도 채소밭(圃)이나 가꾸며 살고 싶어 포은(圃隱)이라 했다. 정도전의 원한을 사 조선 개국과 함께 비참한 최후를 맞았던 이숭인(李崇仁 1349~1392)도 도은(陶隱)인 것을 보면 질그릇이나 만들며 살고 싶었나보다. 야은(冶隱) 길재(吉再 1353~1419)는 쇠붙이를 다루는 대장장이의 꿈을 갖고 있었을 테고. 그 밖에도 농은(農隱) 야은(野隱) 어은(漁隱) 등이 있었다. 하나같이 피말리는 정쟁에 몸담았던 사람들인데 농어민 같은 민초들을 동경했다니, 위선처럼 보이기도 한다.

은(隱)자 돌림 호에 대한 선망은 조선초에도 남아 있었다.

태종 때 붓 만들기에 능한 김호생(金好生)이란 인물이 있었다. 그 이야기를 들은 태종이 김호생을 공조(工曹)에 배치하여 필장(筆匠)이라는 보직을 주었다. 임금의 붓을 만들다보니 그에게 붓을 만들어달라는 청탁도 많이 들어왔다. 목에 힘이 들어간 김호생은 문사들에게 자신의 호를 부탁했다. 문사들은 "그대는 지금 붓을 만들고 있으니 고려 때의 예에 따라 호은(毫隱)이 어떤가"라고 물었고 김호생은 좋아라 하며 호은을 자처하고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그를 아끼던 한 친구가 "호은이라고 할 때의 은(隱)은 은둔하다는 뜻이 아니고 자네가 남의 호모(毫毛-가는 털)를 슬쩍한다고 해서 붙인 것이니 슬쩍한다는 뜻의 은(隱)이라네"라고 바른 말을 해주자 그 즉시 호은이라는 호를 버렸다.

연산군 때부터 사화(士禍)가 이어지면서 조선에도 은둔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중종 때 조광조가 변을 당한 기묘사화(1519년)가 일어나자 사림들 사이에 은둔의식이 퍼지면서

집 재(齋)자로 끝나는 호의 유행이 불기 시작했다. 초야에 숨어 지내며 재에서 학문을 닦고 제자들이나 길러내려는 심정의 발로로 보인다. 물론 그전에도 안재(安齋) 성임(成任 1421~1484)처럼 재(齋)가 들어가는 호를 쓰기는 했지만 사림의 등장 이후에야 본격화됐다.

홍언필(洪彦弼 1476~1549)은 갑자사화로 유배됐다가 중종반정으로 풀려나지만 다시 기묘사화 때 조광조 일파로 몰리는 등 정치적 부침을 거듭하면서도 영의정에까지 오른다. 그의 호는 묵재(默齋)였다. 조광조를 길러낸 사림학자 김굉필의 제자인 김안국(金安國 1478~1543) 김정국(金正國 1485~1541) 형제는 각각 모재(慕齋)와 사재(思齋)라는 호를 썼다. 김안국과 동갑으로 김안국 형제와 정치노선을 함께했던 사림계 인사 권벌(權木發 1478~1548)의 호는 충재(沖齋)였다. 충(沖)은 온화하고 고매하다는 뜻. 사림의 거두 이언적(李彦迪 1491~1553)은 주자학을 따르겠다는 결연한 의지의 표시로 호를 회재(晦齋)라고 했다. 주희의 호가 회암(晦庵)이었다.

이처럼 재(齋)로 끝나는 호를 썼던 사람들은 앞 자(字)에 지향하는 바를 담으려 했다.

기재(企齋) 신광한(申光漢 1484~1555)은 기묘사화 때 피해를 입었으나 을사사화 때는 윤원형의 편에 서서 공신이 된다. 하필 '기(企)'자는 꾀하다, 도모하다, 발돋움하다 등의 뜻을 갖고 있다. 을사사화로 20년간 유배생활을 하다가 풀려나 마침내 영의정에까지 오르게 되는 노수신(盧守愼 1515~1590)은 호가 소재(蘇齋)다. 되살아나다, 깨어나다는 뜻의 소(蘇)다. 그 밖에 황재(黃齋) 눌재(訥齋) 신재(愼齋) 담재(澹齋) 간재(艮齋) 등 조선 중기 저명 인사들 중에서만 보아도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은(隱)이나 재(齋)로 끝나는 호들은 대부분 신중하고 조심하며 살자는 뜻인데 실상과 부합했는지는 사람마다 별개다. 하긴 예나 지금이나 관직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렵고 제때에 나오기는 또 얼마나 더 어려운가? 주역(周易)에서도 '지지지지(知至至之), 지종종지(知終終之)'라 했다. '나아갈 때를 알아 거기에 나아가고 마칠 때를 알아 그것을 마쳐라.' 그만큼 진퇴(進退)가 어렵기 때문에 주역 첫머리부터 이를 강조했을 게다. 호(號)로써 다짐하는 정도로는 될 일이 아닌 것 같다.

 

조선일보,2008.3.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