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올해의 책 10선(選) -조선일보
"베스트 북에서 최고의 지혜를 얻다."
대항해시대-주경철 지음ㅣ서울대학교 출판부ㅣ582쪽ㅣ
이렇듯 방대한 분량에 이만한 거시적인 주제로 세계사적인 통찰을 시도한 연구서가 국내 저자에 의해 쓰여졌다는 사실 자체가 올해 출판계에서 기억돼야 할 일이다. 근대 세계사를 '해양 세계의 발전'이라는 관점에서 해석한 이 책은 '지리상의 대발견'으로 알려진 16~18세기 서유럽의 해상 팽창을 총체적으로 서술한다. 경제·군사·환경·종교처럼 책 한 권을 쓸 수 있을 만한 주제들이 각 장(章)마다 촘촘히 배치돼 있다.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인 저자는 이 시대의 해석에서 유럽 중심주의로부터의 탈피를 시도했다. 유럽의 힘이 새로운 세계 질서를 만든 것은 분명하지만, 세계가 함께 만들어 놓은 문명이 이미 존재했고 유럽이 그 위에 올라탔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유럽에서만 국가의 힘과 자본의 힘이 결탁해 팽창의 원동력을 만들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고 말한다. 문명의 전파와 경제적 수탈, 새 질서의 형성과 환경의 파괴가 떼어놓을 수 없이 상호작용하고 있었던 대항해시대의 네트워크 형성 과정을 거친 결과, 세계가 하나의 흐름으로 묶이는 진정한 의미의 '지구사(地球史)'가 이뤄지게 됐다는 것이다.
하늘에서 본 한국-얀 아르튀스 베르트랑 사진ㅣ이어령·존 프랭클 외 글 새물결ㅣ336쪽ㅣ
사진작가 얀 아르튀스 베르트랑은 1946년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지난 5년 동안 DMZ에서 독도와 마라도까지 우리 국토 구석구석을 2만여 장의 사진에 담았다. 헬리콥터를 타고 하늘로 붕 떠오른 채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찍은 것들이기에 얼핏 보면 다른 나라 같다. 그만큼 아름답고 새롭다.
이 책은 작가가 그중 160여 장을 엄선해 펴낸 사진집이다. 초록색 극세사 이불을 덮어놓은 듯한 보성 녹차밭, 연분홍 꽃 모양의 거대한 분수를 호수 한가운데에 세워 놓은 충주호, 전소되기 3개월 전의 숭례문 등 오늘의 한국이 곳곳에 담겼다. 사진마다 그 지역에 관한 역사와 지리, 문화와 삶을 담은 에세이를 곁들여 사람 사는 냄새를 물씬 풍긴다.
가장 눈길을 잡아 끄는 건 단연 숭례문이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숭례문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 자리에 서 있지만,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은 천 겹 만 겹으로 갈라진다. 이 책은 땅을 기록했지만, 그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역사까지 담은 '한국의 증명사진'이다.
개밥바라기 별-황석영 지음|문학동네|288쪽|
작가 황석영의 저력을 다시 한 번 보여준 작품. 지난 7월 말 출간 직후부터 지금까지 베스트셀러 리스트에 머물고 있다. 황석영은 《오래된 정원》, 《손님》, 《바리데기》 등의 작품을 통해 세계 체제 내에서 한반도인으로 살아가는 것의 의미를 곱씹고, 탈북자들이 겪는 디아스포라의 아픔을 기록해 왔다. 그런 의미에서 개인적인 삶의 경험을 성장소설 형식으로 쓴 이번 작품은 황석영 문학의 새로운 풍경이다.
소설 주인공인 유준이 겪은 방황은 작가가 실제로 겪었던 모진 성장통을 그대로 옮겨놓다시피 했다. 두 번의 가출과 고교 자퇴, 한일회담 반대 시위에 참여했다가 경찰서 유치장에서 만난 일용직 노동자를 따라 전국의 공사판을 떠돈 사연, 오징어잡이 배와 빵 공장에서의 노동, 승려가 되기 위한 입산과 행자생활, 음독으로 이어지는 유준의 방랑은 베트남전에 참전 군인이 되어 떠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1960~70년대의 무전여행 문화,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를 연상케 하는 거리의 활극 등 서사적 재미를 주는 요소들도 풍성하게 배치했다.
뇌, 생각의 출현-박문호 지음ㅣ휴머니스트ㅣ502쪽ㅣ
저자는 2004년부터 최근까지 뇌와 관련된 인식론·의학·철학은 물론 물리학까지 두루 섭렵했다. 다양한 학교와 연구자들의 공부 모임에서 자연과학과 인문학 지식을 바탕으로 천문, 우주, 생명, 뇌 과학 분야에 대해 강의한 경력의 소유자이다. 이 책은 그의 지식과 강의내용을 한데 모아 뇌에 대한 궁금증을 조목조목 풀어주는 내용들로 구성됐다.
저자가 뇌를 연구하면서 문·이과를 아우르는 다양한 영역을 탐구한 이유는 인간의 인식, 창의성, 무의식, 감정과 기억까지 뇌로 설명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어류→조류→양서류→포유류→영장류→호모사피엔스로 이어지는 뇌의 발생과 진화를 알아보고, 이 과정 속에서 감정과 기억, 생각과 창의력이 출현하는 과정 등을 살펴본다.
저자는 "감정과 기억은 거의 대부분 동일한 회로를 사용하기 때문에 감정과 기억은 서로를 강화해주며, 감정이 풍부한 사람은 기억력도 탁월하다"고 말한다.
엄마를 부탁해-신경숙 지음|창비|300쪽|
지난 11월에 초판만 무려 5만부를 찍으면서 나오자마자 종합 베스트셀러 순위 선두 다툼을 벌이고 있는 신경숙의 신작 장편소설이다. 올해 하반기에 나왔지만 당당하게 올해의 책에 오를 만한 문학적 품격을 지녔을 뿐 아니라 대중적 호응도 뜨겁다. 진솔한 작가 신경숙의 고백을 바탕으로 사실과 허구가 융합된 스토리가 감동적이다. 가족을 위해 헌신만 요구당했던 전통적 어머니들에게 '엄마' 이전에 여자로서의 개인성을 되돌려주자고 작가는 호소한다. "우리는 엄마가 처음부터 엄마라는 존재로 태어난 것으로 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엄마에게도 태어난 시절, 소녀 시절이 있었고, 엄마는 가정을 통해 엄마가 된 것"이라고 작가는 말했다. 이 소설은 시골에 살던 어머니가 자식들을 만나러 서울에 왔다가 지하철역에서 실종되면서 시작한다. 그 어머니는 3살 때 아버지를 잃고 학교 문턱에도 가 보지 못해 글을 읽지 못한 여인이다. '태어나 기쁨도 슬픔도 어린 시절도 소녀시절도 꿈도 다 잊은 채 초경이 시작되기도 전에 결혼해서 다섯 아이를 낳고 그 자식들이 성장하는 동안 점점 사라진 여인'이다. 그 '엄마'의 삶을 다양한 등장인물들의 시점에서 추리 기법으로 재구성하는 소설이다.
슈퍼자본주의-로버트 B. 라이시 지음ㅣ형선호 옮김 김영사ㅣ364쪽ㅣ
1970년대 말, 새로 개발된 아이디어와 기술들은 세계화와 새로운 생산방식의 출현, 탈규제 같은 변화를 일으켰다. 사람들은 근대 시민혁명이 안겨준 '시민'이란 정체성을 벗고, 저비용과 고소득을 추구하는 '소비자·투자자'가 되었다. 기업들은 훨씬 더 경쟁적이고 전(全)지구적이며 혁신적인 경쟁을 벌였으며, 더 값싼 상품을 만들어 소비자·투자자의 욕구에 잘 부응했다. 이렇게 해서 강력해진 자본주의가 바로 슈퍼자본주의다.
슈퍼자본주의는 풍요와 번영을 가져다 주었다. 하지만 시민들이 소중히 여기는 가치들을 보호하는 체계는 무너졌다. 사람들은 기업으로부터 해고당해 실직자가 됐다. 기업들은 사회적 책임을 외면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저자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고 노동조합을 강화해야 하지만, 기업에게 민주주의의 권리나 의무를 부여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한다. 기업은 착하게 행동할 수 있는 인격체가 아니며, 슈퍼자본주의는 이윤을 악화시키는 기업의 착한 행동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풍선을 샀어-조경란 지음|문학과지성사|324쪽|
올해 동인문학상 수상작. 소설은 표면적으로 죽음과 상실, 깊이를 알 수 없는 절망의 세계를 유영하지만, 생의 빛나는 순간을 찾아 삶의 불꽃을 다시 태우는 인물들이 그 어둠을 몰아낸다.
삶이 불가피하게 부과하는 절망은 이 소설집에서 '가까운 사람의 죽음'이라는 소재의 반복으로 제시된다. 수록작 〈마흔에 대한 추측〉은 특히 "오랜 시간 슬럼프에 시달렸다"던 작가가 절망의 늪을 빠져 나오는 과정을 진솔하게 고백했다. 시집 한 권 내지 못한 시인인 '나'는 무기력에 빠져 정신과 상담을 받는다. 그러다 우연히 라디오 방송의 '책 읽어주는 여자' 프로를 진행하게 된 나는 담당 PD, 구성작가 등과 함께 마작판에 어울리며 고립된 삶에서 빠져나온다. '상담을 통해서 나는 나한테 일어난 한가지 변화에 주목했다. 그것은 내가 다른 사람의 말을 귀담아듣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 귀를 열자, 이야기가 들렸다. 세상에는 아주 많은 이야기들이 있었고 그것은 생각보다 가까이 있었다'(238쪽)는 독백은 소설가 조경란의 고백이기도 하다. 생생하고 긴장감 넘치는 서사가 몰입감을 선사한다.
악령이 출몰하던 조선의 바다-박천홍 지음ㅣ현실문화ㅣ807쪽ㅣ
도대체 왜, 지구상의 모든 지역 중에서 한반도만이 19세기 후반까지도 '은둔의 땅'으로 남아있었던 것일까? 그 많은 유럽의 배들이 이곳만은 무심하게 지나쳐 갔던 것일까? 해금(海禁) 왕국 조선의 해안에는 16세기부터 1860년대까지 수많은 유럽 배들이 출현했다. 처음엔 표류하거나 식량을 찾아 상륙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점차 다양한 관심이 생겨나게 됐다. 탐험과 측량, 통상 요구, 기독교 선교, 보복 원정…. 영국 탐사선 프로비던스호의 이야기로 시작하는 이 책은 그 기막힌 '만남'의 연대기다.
조선인들은 그것을 '이상한 모양의 배[異樣船]'라고 불렀다. 청나라의 '천하 질서' 속에서 안온함에 젖어 있으면서도 세도정치와 삼정(三政)문란을 겪으며 서까래가 무너지고 있던 조선에게, 이양선은 악령의 출현이자 몰락의 전주곡이었다. 세계의 현실은 격동하고 있었으나 조선의 집권층은 그 현실에 눈을 감고 있었다. 조선의 미래에 놓였던 수많은 갈림길 중에서 결국 닥쳐 온 것은 '폭압적 근대'였다는 것이다.
제국의 미래-에이미 추아 지음|이순희 옮김 비아북스|560쪽|
세계 초강대국의 성립·유지 비결과 몰락 요인을 '관용'(Tolerance)이라는 키워드로 설명한다. 한 사회가 세계에서 경쟁자를 물리치고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인종, 종교, 배경을 따지지 않고 손꼽히는 능력과 지혜를 갖춘 인재들을 끌어들이는 관용이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고대 페르시아 제국부터 로마, 당, 몽골, 스페인, 네덜란드, 영국에 이르기까지 모든 초강대국들은 관용을 통해 최고의 인재들이 제국에 참여하고, 번성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고 말한다.
이 책은 제국의 쇠퇴는 불관용과 외국인 혐오, 그리고 인종적·종교적·민족적 순수성에 대한 촉구와 함께 시작됐다고 경고한다. 주목할 것은 쇠퇴의 씨앗을 뿌린 것 역시 관용이었다는 사실이다. 제국이 관용을 토대로 다양한 인적 자원을 끌어들였지만, 이들을 제국의 일원으로 일체감을 갖도록 끌어안는 데 실패했을 때, 붕괴의 원인이 된다는 얘기다.
법학자인 추아(Chua) 예일대 법대 교수는 기존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세계사를 꿰뚫는 이 책을 써냈다. 《강대국의 흥망》을 쓴 폴 케네디 교수가 "이 분야 고전으로 남을 만한 책"이라고 호평했다.
모던 타임스(1·2권)-폴 존슨 지음|조윤정 옮김|살림|759·837쪽
20세기 세계사를 결정 지은 사건과 인물들에 대해 서술한 이 1600쪽에 이르는 책은 《내셔널 리뷰》가 뽑은 '20세기 100권의 책'에 선정되기도 했다. 영국 옥스퍼드대 출신의 역사저술가인 저자는 대단히 신랄하고 독특한 시각으로 현대사를 재해석했다.
"현대 세계는 1919년 5월 29일에 시작했다"는 첫 문장부터가 그렇다. 그날 무슨 일이 일어났나? 서아프리카와 브라질에서 동시에 촬영된 일식 사진으로 인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증명됐다. 바로 그날을 기점으로 뉴턴의 우주론이 무너져 내린 동시에 상대주의가 풍미하게 됐다는 해석이다. 평화주의라는 순진한 이상이 오히려 2차 대전을 불러왔으며, 마르크스와 프로이트는 무엇이든 집어삼키는 도그마를 만든 사람이었다는 등의 새로운 평가들이 책 전체를 채우고 있다. 이 해석들은 나름대로 탄탄한 바탕을 갖추고 있는데, 무척 풍부한 1차 사료와 분야를 넘나드는 해박한 지식이 디테일한 묘사와 훌륭하게 결합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일보, 2008,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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