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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과 삶의 향기/발표 작품

겸재 정선이 바라본 개화사

by 골든모티브 2011. 10. 12.

[역사문화 탐방 시리즈]

 

겸재 정선이 바라본 개화사

개화산 정상에서 '영신의 아침'을 맞이하다

김동기

 

 

영신교회는 개화산의 기점이다. 방원중학교를 지나 영신교회를 돌아가면 언덕길로 개화산 산책로가 펼쳐진다. 모든 등산객들이나 개화산을 찾는 사람들은 영신교회를 거쳐 가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건너편 근린공원에서 시작하는 등산로도 있지만 역시 주 산책로는 영신교회로부터 시작한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하듯이 말이다.

 

 

좁은 산책로는 개화산 정상(해발 약 128미터)으로 이어져 다시 몇 갈래로 나뉘어 흩어진다. 정상에 오르면 군부대가 왼쪽으로, 약사사가 오른쪽으로 위치하고 정면으로 일산과 상암 월드컵경기장, 북한산 등 한 폭의 수채화를 감상하듯 조망할 수 있고 건너편 행주산성이 웅장한 자태로 임진왜란 때 권율장군의 승전보 소식을 전해준다. 발아래로 한강이 도도하게 흐르면서 붉은 빛을 발하는 방화대교를 맴돌며 옛 이야기를 전해준다. ‘양천읍지에 의하면 개화산의 원래 이름은 주룡산(駐龍山)이라 하는데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신라 때에 주룡(駐龍)선생이라는 한 도인이 이 산에 살면서 매년 99일에 동자 두세 명을 데리고 높은 곳에 올라가 술을 마시며 '구일용산음'(九日龍山飮, 구구절에 용산에 올라가 술을 마시다) 이라 하였다 하여 주룡산 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선생이 돌아간 후에 그 자리에서 이상한 꽃 한 송이(연꽃)가 피어났고 그 이후부터는 개화산이라 일컬어졌다고 한다. 선생이 살던 곳에 절이 세워졌는데 처음에는 절 이름을 개화사(고려 공민왕 21353)라 하였으나, 개화사에 있는 좋은 약수 때문인지 조선 말기(순조이후부터)쯤에 약사사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산 정상에는 조선조에 사용했던 봉화대가 있었으나 현재는 그 터만 남아있다

 

조선후기 진경산수화의 대가 겸재 정선(1676~1759)은 양천현감 재임 시절 개화사’(경교명승첩, 양천8경첩에 수록)라는 제목으로 한양 진경의 절경을 그렸다. 이 작품은 영조16(1740)에 개화사가 중수 된지 3년 후 쯤에 개화산의 풍경을 그렸다고 한다. 현재의 절의 모양과는 조금 다르지만 이 그림에 나오는 개화사(開花寺)가 지금의 약사사(藥師寺)이다. 주룡산 중턱에 법당과 소나무, 그 아래 3층 석탑과 별체가 선명하게 보인다. 절 아래로는 버드나무와 층층의 다랑이 논이 산골짜기를 따라 이어져 있고 산자락 아래로는 쌍돛단배가 유유히 한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형태이다. 개화산 아래 범머리 근방 한강에 배를 띄워놓고 배에서 그린 그림으로 개화산 경내와 주변 풍광이 아름답게 표현되어 있다. 겸재가 그린 개화사에 보이는 삼층석탑이 지금은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39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탑(높이 4미터의 화강암석탑)은 원래 약사사 석불 입상이 모셔져 있던 금당 바로 앞에 서 있던 삼층석탑으로 약사사의 역사를 보여주기도 한다. 개화산 중턱에 있는 이 탑은 한강을 내려다보면서 서 있는데, 그 모습이 투박한 듯 하면서도 날렵하다. 이 석탑은 일층 기단과 삼층 탑신으로 구성된 독특한 형식이다. 석탑의 받침부에는 사각형 지대석 위에 큼직한 사각형 기단과 판석으로 된 갑석이 놓여 있다. 다소 육중한 기단 위에는 갓기둥이 있는 1층 탑신과 큼직하고 가파른 지붕돌이 놓여 있고, 다시 2,3층 탑신과 지붕돌이 올려 있다. 탑의 몸체부는 투박한 받침부에 비해서 날렵한 모양이다. 이 석탑은 고려 말에서 조선 초 석탑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동시에 당시의 희귀한 석탑의 예로 그 가치가 크다.

 

그 외 우리 동네에 조상의 얼이 살아 숨 쉬는 역사 문화유산으로 개화지구 전투 충혼위령비(미타사), 개화산 봉수대(성화대), 약사사 석불(유형문화재 제40), 풍산심씨 묘역(유형문화재 제77), 여우골 전설 등이 있다. 또한 느티공원의 은행나무(수령 400)와 느티나무는 우리에게 영원한 쉼터를 제공해 주고 있다.

 

영신의 아침 제7호/2011.9 / 김동기(한서고 국어교사, 민주평화통일자문위원, 강서문단편집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