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문학과 삶의 향기/발표 작품

백두산기

by 골든모티브 2011. 10. 6.

가깝고도 먼 백두의 신비

 

문학서울 제15호

김동기

 

한반도를 향해 북상하고 있는 태풍 '꿀랍(KULAP)'을 등지고 연길공항에 도착하여 신산 백두산을 향하여 이도백하(二道白河)로 가는 버스로 옮겨 탔다. 일기예보와는 달리 하늘은 청명하며 차창 밖으로는 옥수수 밭이 지천으로 깔려 있다. 어른 키보다 더 큰 옥수숫대들이 연녹색의 파초 같은 잎들을 서걱거리며 무르익고 있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옥수수 밭이 실로 엄청나게 펼쳐져, 달리는 버스가 망망대해(茫茫大海)에서 표류하고 있는 것 같다.

저 멀리 백운봉과 천문봉이 햇살을 받아 어렴풋이 눈에 들어오고 백두산 토종이라며 피나무꿀을 파는 양봉업자들이 곳곳에 늘어서 손짓을 한다. 12일 팀이 다녀갔다며 팀원들의 인증샷까지 걸어놓고 옷을 붙잡는다. 한 수푼 먹어보니 꼭 아카시아꿀 맛이다. 일행 중 한 명이 선뜻 꿀 한 병 사들고 다시 한참을 달리니 하늘을 향해 쭉쭉 뻗은, 줄기가 붉은 백두산 미인송이 제일 먼저 반긴다. 이 소나무는 송풍라월’(松風羅月)이라 불리며 아름다운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송풍의 피는 미인송의 몸이 되고, 푸른 잎은 사랑이 되었다.”는 선남선녀의 애절한 사랑이야기 때문인지 백두산 자락의 소나무들은 유난히 붉은 줄기를 하고 하늘 높이 뻗어 있어 더욱 아름답게 느껴진다.

 

북파(北坡)산문을 거쳐 본격적으로 천문봉으로 오르는 전용버스와 지프를 번갈아 타고 힘차게 시동을 걸었다. 6인승 지프는 산허리를 돌고 돌아 정상까지 지그재그로 이어진 구불구불한 산길을 따라 쉬지 않고 달린다. 천문봉으로 가는 길은 사람이 오르는 것이 아니라 차가 달린다. 지리산 노고단 입구까지 버스가 오르듯이 말이다. 푸른 하늘과 하얀 구름이 눈앞에 벌려있고 저 멀리 드넓게 펼쳐진 누런 만주 벌판이 더욱 풍요롭다. 좌우로는 천 길 낭떠러지, 안전벨트 하나 없이 의자에 매달려 이리저리 쏠리며 옆 사람의 팔짱에만 의지한 채 몸을 맡겨야 한다. 카레이싱을 벌이는 듯 엄청난 속도로 질주하여 끝까지 긴장감을 놓을 수 없다. 곡예운전을 자랑삼는 중국인 기사에게 안전운전 부탁합니다.’란 볼멘소리도 다 소용없는 노릇이다. 한편으로는 좌우의 풍경에 사로잡혀 델마와 루이스의 영화 속 장면인 그랜드 캐니언을 시원스럽게 달리는 상상도 해보며 그 속도감과 스릴에 취해 마치 놀이공원에서 청룡열차를 타는 듯 그저 환호성을 지르고 말았다.

어느덧 악화림대, 수피가 하얀 자작나무 군락지다. 흰 두루마기 걸치고 우람하게 서있는 모습이 정말 장관이다. 더욱이 눈이 오면 하얀 속살을 드러내고 만년설의 자태를 뽐낼 것이다. 이곳을 지나니 나무의 수목한계선인 고산지대에 들어선다. 들꽃과 낮은 풀 외에 수목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자세히 내려다보니 자잘한 풀꽃만이 얼굴을 내밀고 있다. 마치 드라이 플라워를 내던져 수놓은 것처럼 한 폭의 수틀 속에서 누군가 나를 응시하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은 에델바이스였다. 이미 꽃을 떨군 채 몸을 웅크리며, 차창 밖으로 손을 흔들어 대는 산객들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수없이 매연을 내뿜으며 달리는 지프의 행렬에 넘어졌다 다시 일어서고, 브레이크 밟은 소음에 시달려 지쳐있는 듯 눈살을 찌푸리며 아주 귀찮다는 표정을 짓는다. 왠지 안쓰러운 마음에 백두산 탐방의 즐거움이 금세 사라졌다. 한라산 백록담까지 차가 올라간다고 생각하니 몹쓸 짓 아닌가?

 

좌우의 차창 밖으로 용암이 만들어낸 협곡의 웅장함에 시선을 빼앗기다 보니 벌써 천문봉 주차장에 도착했다. 기상대가 한쪽으로 비켜서서 우리를 노려보며 천지 조망은 내손에 달렸다고 큰소리를 친다. 수많은 사람들이 천지를 향해 뒷사람의 꽁무니만 쳐다보며 가파른 계단을 따라 줄지어 있다. 과연 저편의 사람들은 온전하게 천지의 비경을 보고 있는 것일까? 하늘을 우러러 보니 변화무쌍한 구름과 안개가 한순간에 천지를 휘감으며 나를 희롱하는 듯 했다. 천지에 10번 오르면 그 모습을 두세 번 볼까 말까해서 천운에 맡겨야 한다는 가이드의 설명이 생각난다. “천지를 보려면 3대가 공을 들이고 덕을 쌓아야 한다.”는데 과연 그러했는지 조바심이 나며 시린 손을 비비며 초조해하는 마음을 진정시킬 뿐이다. 믿거나 말거나, ‘천지(天池)를 보지 못한 사람이 천지(天地)’라지만 아무려면 어떻겠는가?

 

 

드디어 천문봉(天文峰) 정상, 천지다! 천지! 말로만 듣고 사진으로만 보아왔던 탁 트인 천지가 시야에 들어오면서 발이 꽁꽁 묶여버렸다. 무릎을 꿇어야하나. 커다란 바위와 봉우리로 둘러싸여 움푹 파인 천지의 분화구, 화산활동으로 신비의 비경을 자아낸 석공의 솜씨인가? 대자연이 빚어낸 아름다움에 갑자기 ~’ 하는 탄성과 환호성이 이곳저곳에서 터져 나왔다. 백두산 천문봉에 올랐지만 흰 멧부리는 어디에 있는가? 천지가 발아래 있지만 여기 또 천지가 있다. 거울은 아내에게 두고 왔는데 하늘 아래 매달린 저 거울은 또 무엇인가? 하늘과 땅 사이에 천지가 가로 놓였지만 천지가 하늘이고 천지가 땅이다. 이게 무슨 조화란 말인가? 첫 선에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구나.

 

감히 누구도 범할 수 없는 기품을 지니고 앉아있는 너

태초의 모습 그대로 간직한 신성하고 외경스러운 자태

동해 쪽빛보다 더 푸른 에메랄드 빛 칼데라호

선녀들만 내려와 목욕을 한다.

 

햇빛에 반사되어 은빛 물결 눈부시게 반짝이며

그 깊이를 보여 주지 않는 너

16폭 병풍의 품에 안겨 편안하게 잠든 새색시의 모습인가?

 

저 멀리 장군봉, 다시 오른쪽으로 백운봉

고고한 자태를 물속에 드리우고 그림자로 반사되어 다시 보여주는 명경대

솜털 같은 구름 속으로 무심코 흘러가는 섬들 바라보며

한 발짝도 물러서지 못하고 그대로 망부석이 되어 17봉우리를 만들어낸다.

 

지척(咫尺)에 있는 백두의 최고봉을 눈앞에 두고 남의 땅에서만 바라보아야 하는 안타까운 마음에 가슴이 저려온다. 저 뭉게구름은 자유롭게 흘러들어 가는데 우린 언제쯤 장군봉을 마주하며 호연지기를 느낄 수 있을까? 금강산도 오르는데 백두라고 못 오를까?

 

물이란 물은 다 내 물이고, 산이란 산은

다 내 산인데

(……)

흙이란 흙은 다 내 흙이고, 풀이란 풀은

다 내 풀인데

내 땅에서 내 발바닥으로 저 백두산에 내 못 가네 <양성우, 백두산>

어느 시인의 외침이 새삼스럽게 떠오른다.

 

백두의 변덕스런 날씨는 이미 예상을 했지만 순식간에 먹구름이 일고 바람이 세차게 불더니 이내 해를 집어 삼켜버린다. 순간 슬픈 역사가 생각난다. 조선과 청나라 사이의 국경선인 백두산정계비는 이미 소실된 지 오래다. 간도협약으로 청나라에 영유권을 넘겨준 이래, 중국은 백두산 공정으로 장백산을 중화 10대 명산중 하나로 지정하여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를 추진하고 있다고 하니 마음 급한 일 아닌가. 또한 단군신화에 등장하는 우리민족의 성지인 백두산을 중국은 만주족의 왕지로 정하고 청나라를 세운 누르하치의 탄생신화로 왜곡하고 있다. 최남선은 <조선의 산수>에서 조선 사람이 백두산 속에 있음을 잊어버린 것은 물속의 고기가 물을 잊어버린 것 같다.”고 했다.

백두인가 장백인가를 따지기 이전에 민족분단의 아픔과 설움을 극복하고 어서 통일이 되어 백두산이 우리 품으로 온전하게 돌아왔으면 한다. 오천년의 역사를 지탱해준 한반도의 등뼈인 백두대간의 시발점, 발아래 저 멀리 금강산과 태백산, 한라산을 굽어보며 종주하는 그날을 손꼽아 기다린다.

김동기, 한서고 국어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