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 옆 서촌
인왕산서 몽유도원도 속 풍경 발견한 안평대군, 무계정사 지었는데…
경복궁 서쪽 마을을 일컫는 서촌(西村). 고관대작부터 중인, 아전까지 서로 다른 신분층이 모여 살던 인왕산 자락 동네입니다. 사대부 중심의 북촌, 중인 중심의 남촌과는 다른 독특한 생활문화를 형성한 서촌은 조선시대 경치 일번지, 문학 일번지, 그림 일번지였습니다. 서울역사박물관(관장 강홍빈)이 최근 발간한 2010 생활문화자료조사집 『서촌-역사 경관 도시조직의 변화』에서 소개한 서촌의 내력을 간추립니다.
안견, 몽유도원도, 1477년, 비단에 먹과 채색, 그림(38.7×106.2㎝) 부분, 일본 덴리대 도서관 소장.
몽유도원도는 그림 부분과 발문을 포함해 두 개의 두루마리(각 11.2m, 8.57m 길이)로 돼 있다. 안평대군·신숙주·정인지 등 세종시대 22명이 각각 친필로 쓴 글 23편은 서예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기도 하다.
정선, 독서여가, 1740년, 비단에 채색, 24×16.8㎝, 간송미술관 소장.
‘인왕제색도’vs‘인왕산도’
정선, 인왕제색도, 1751년, 종이에 수묵, 79.2×138.2㎝, 호암미술관 소장.
정조대왕 국도팔영
정조(1752~1800)는 서촌 지역에 자주 행차했다. 사당인 육상궁(증조모), 선희궁(할머니), 연우궁(할머니)을 참배하기 위해서였다. 참배를 마치면 선희궁 옆에 있던 세심대에서 신하들과 활쏘기를 했다. 세심대는 왕실과 깊은 인연이 있었다. 『열양세시기』에 “(세심대는) 꽃나무가 많아 봄의 꽃구경이 장관이다. 영조, 정조, 순조, 익종이 여기에 자주 거동하고 한 달 동안 사람들이 구름같이 구경했다”고 적혀 있다. 세심대는 원래 당진현감을 지낸 이정민(1556~1638)의 집터였으나 도성에서 경치 좋기로 유명해 광해군이 세심대를 취하고 대신 벼슬을 내렸다. 그러나 이정민은 이를 피해 홍주 봉서산으로 낙향했다고 한다. 정조는 세손 시절 ‘국도팔영(國都八詠)’을 지었는데, 인왕산에 자주 오르던 때라 주변 명승을 많이 꼽았다. 8곳의 명승 중 필운대·청풍계·반송지·세검정 등 인왕산 자락 서촌의 명승지 네 곳이 포함됐다.
이상의 집, 윤동주의 하숙집
20세기가 된 뒤에도 서촌은 예술의 중심지였다. 이중섭·이상범·박노수 등 당대 최고의 화가와 노천명·윤동주·이상 같은 당대 최고의 문인이 이곳에 살았다. 이상(1910~37)은 3세 되던 1912년 형편이 넉넉하던 백부 김연필의 양자로 들어갔다. 이상은 백부의 집인 통인동 154번지에 23세까지 살았다. 짧았던 생애 대부분을 보낸 곳이지만 통인동이 작품 속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경성의 모던보이로 유곽이나 카페에 대한 글을 썼던 그에게 전형적인 주택가인 서촌이 작품에 들어올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이상의 집은 백부가 세상을 떠난 1933년 팔린 뒤 헐려 자취가 없어졌다. 그러나 2007년 문화유산 보전 단체인 문화유산국민신탁이 사들여 이상 기념관으로 활용할 예정이다.
윤동주(1917~45)가 서촌으로 이사온 까닭은 대동아전쟁이 시작되면서 연희전문학교 기숙사 식사가 부실해져서다. 그는 졸업반이던 1941년 5월부터 9월까지 누상동 하숙집에 살며 ‘십자가’ ‘태초의 아침’ ‘새벽이 올 때까지’ 등 작품을 지었다. 윤동주의 하숙집은 10년 전 헐렸고 그 자리에 3층짜리 다가구주택이 들어섰다.
서촌의 문화재
사적 제149호로 지정된 ‘육상궁과 칠궁’은 조선조 500여 년간 아들이 왕위에 오른 후궁 7명의 신주를 모셔 놓은 사당이다. 육상궁은 영조의 생모며 숙종의 후궁인 숙빈 최씨의 신위를 모신 사당으로 고종 19년(1882) 불타버린 것을 이듬해 복구했다. 순종 1년(1908년) 이후 여러 곳에 분산돼 있던 여러 신위를 옮겨와 결국 칠궁이 됐다. 저경궁(선조의 후궁이며 추존왕 원종의 생모인 인빈 김씨 신궁), 대빈궁(숙종 후궁이며 경종의 생모인 희빈 장씨 신궁), 연호궁(영조 후궁이며 효장세자의 생모인 정빈 이씨 신궁), 선희궁(영조 후궁이며 사도세자 생모인 영빈 이씨 신궁), 경우궁(정조 후궁이며 순조의 생모인 수빈 박씨 신궁), 덕안궁(고종 후궁이며 영친왕 생모인 순헌황귀비 신궁)이 모셔져 있다.
등록문화재 93호인 배화여고 생활관은 당초 선교사를 위한 주택으로 지어졌다. 1915년 무렵 완공된 것으로 추정된다. 건물의 맨 아래층이 반지하로 되어 있어 현관으로 들어서려면 계단을 올라가야 한다. 전체적인 외관은 서양식 붉은 벽돌벽과 서양식 기둥을 사용했지만, 한옥의 기와지붕을 올려 서양식과 한국식 건축이 섞여 있는 독특한 건물이다. 문화재자료 9호로 지정된 백사(白沙) 이항복(1556~1618) 집터는 ‘필운대(弼雲臺)’라는 바위 글씨로 남아 있다. 배화여자 중
그 밖에 동양화가 이상범 가옥(등록문화재 171호), 박노수 가옥(문화재자료 1호), 홍종문 가옥(서울시 민속자료 29호), 해공 신익희 가옥(시도기념물 23호) 등 문화재자료가 서촌에 남아 있다. 박노수 가옥의 경우 일제시대 대표적 친일파인 윤덕영이 딸을 위해 지은 집으로, 한국 최초의 건축가 박길룡이 1930년대 후반 설계했다. 조선 말기 한옥 양식과 중국식, 서양식 수법이 섞여 있는 절충식 가옥이다./ 중앙일보.20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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