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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과 삶의 향기/문학 산책

춘원 이광수 가옥

by 골든모티브 2011. 10. 4.

작가의 집을 찾아서(1) 이광수 가옥

 

한국근대문학의 개척자 춘원 이광수(1892.3.4~1950.10.25) 가옥(등록문화재 제87호)

1934년~1935년까지 5년 동안 이집에서 살았던 자하문 산장. 1972년 다시 복원, 근대화된 한옥양식

 "친일행각으로 공과에 대한 논란이 뜨거운 인물이지만 역사적 교훈을 얻을 수 있는

한국 근대사의 현장을 남겨 두는 것도 필요하다."

 

 

 

 

 

 

 

 

 

 

최초의 근대소설 <무정,1917>을 발표하여 한국 근대문학사의 선구자로 평가 받음

일본에서 2·8독립운동을 주도하는 등 일제강점기 초기에는 항일운동에 가담했으나 결국 친일로 돌아섬.

春園 이광수는 평안북도 정주에서 출생했다. 몰락한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나 1902년 고아가 됐다. 일진회의 추천으로 일본에 유학하며 회람지 <소년>을 발행하고 시와 평론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1910년 귀국해 오산학교에서 교편을 잡았고, 1917년 최초의 근대 장편소설 『무정』을 <매일신보>에 연재했다. 1919년 2.8독립선언서를 기초한 후 상하이로 망명, 임시정부에 참가해 독립신문사 사장을 역임했다. 이후 <동아일보> 편집국장, <조선일보> 부사장 등을 거쳤다.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투옥된 후 친일로 기울어 1939년 친일문학단체인 ‘조선문인협회’ 회장을 맡았다. 1940년 일본명 가야마 미쓰오(향산광랑,香山光郞)으로 창씨개명하는 등  친일 행위를 함. 그의 작품 세계는 이상주의에 바탕을 둔 계몽적 민족 의식을 표현하고 1930년대에 이르러서는 역사 의식을 반영하는 쪽으로 나타남. 6.25때 납북되어 생사 불명이었으나

최근 1950년 북한 만포병원에서 벽초 홍명희의 배려로 입원 중 사망(병사)했음이 알려짐.

대표작으로 「무정」(1917), 「유정」(1933), 「사랑」(1939), 「흙」(1932), 「단종애사」(1929)

 

 
▲ ① 이광수의 ´무정´ 출간 당시 표지. ② 1917년 매일신보에 실린 ‘무정’ 첫 회 원문. ③ 이광수가 소설을 집필하고 있는 모습. ④ 이광수가 ‘가야마(香山)’로 성(姓)을 바꿨음을 보도한 당시 언론.

1917년 최초의 신문 1면 소설 매일신보에 총 126회에 걸쳐 연재 / 사진자료 서울신문

 

 

조선의 학도여[친일시]

그대는 벌써 지원하였는가,
- 특별지원병을 -
내일 지원하려는가
- 특별지원병을 -

 

공부야 언제나 못하리
다른 일이야 이따가도 하지마는
전쟁은 당장이로세
만사는 승리를 얻은 다음날 일.

 <중략>

남아 한번 세상 나,
이런 호기(好氣) 또 있던가,
일생일사(一生一死)는 저마다 다 있는 것,
위국충절은 그대만의 행운

 

가라 조선의 6천 학도여,
삼천만 동향인(同鄕人)의 앞잡이 되라,
총후(銃後)의 국민의 큰 기탁(寄託)과
누이들의 만인침(萬人針)을 받아 띠고 가라

<매일신보(每日新報)> 1943년 11월 4일)

 

*萬人針(만인침)-원래는 千人針(천인침-센닌바리)으로 일제시대 출정병사의 무사를 빌기 위해

천명의 여자가 한 땀씩, 붉은 실로 천에 매듭을 놓아서 보낸 배두렁이, 부적과 같은 역할을 함 

2011.10.3 / 문학인을 집을 찾아서, 김동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