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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의 향기/詩와 시인

고인이 된 괴짜 문인들(文人)

by 골든모티브 2008. 2. 9.

고인이 된 괴짜 문인들(文人)

 

김관식(金冠植.1934∼1970)

 

   "좌충우돌의 미학은

    너로 말미암아 비롯하고,

    드디어 끝난다. 

    구슬도 먼지도 못되는

    점잖은 친구들아, 

    이제는 당하지 않을 것이니 

    되려 기뻐해다오. 

    김관식의 가을바람 이는 이 입관을"

 

   천상병(千祥炳) 시인의 시 <김관식의 입관(入棺)> 일부분이다.

 55년 서정주(徐廷柱) 시인의 추천으로 문단에 나온 김관식은 타계할 때까지 거칠 것 없는 행동으로 문단에 숱한 화제를 뿌렸다.

 

  어려서 신동으로 불리며 시 1천수를 줄줄 외웠던 김관식은 한학에도 밝아 시의 세계가 깊고 그윽하다는 평을 들었다. 그러나 문단에서 그의 행태는 광기를 띨 만큼 호탕해 ‘미친 아이’로 불리기도 했다. 문단 대선배도 ‘군(君)’자를 붙여 제자 다루듯 했으며 시 세계에 가식이 섞였거나 조금만 삐뚤어져 있으면 독설(毒舌)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던 김관식이 4ㆍ19로 열린 민주국가에 기여하겠다며 서울종로 국회의원 후보로 나서 당시 거물급 정치인 장면(張勉)과 맞붙은 일화는 유명하다. 또 홍은동 산동네에다 무허가 판잣집을 지어 멋대로 팔고 가난한 시인들에게는 거져 주기도 했다. 세상 거칠 것 없이 몸으로 ‘좌충우돌의 시학’을 가르치다 죽었으니 시도 아닌 시로 점잔을 빼던 시인들이 기뻐했을 법도 하다.

 

 

▶김시습(金時習.1435∼1493)

 

   멀리 조선조로 올라가면 중의 신분으로 문득 성안에 거지차림으로 나타나 지나가던 고관들에게 욕지거리를 서슴지 않았던 김시습이 방외문인의 한 전범으로 꼽힌다. 수양대군이 조카 단종의 왕위를 빼앗는 것을 보고 세상에 등을 돌려 왕까지도 안중에 안 두고 사대부 출신이면서 유교도, 또 중이면서 불교도 훌쩍 뛰어넘은 그의 자유혼이 웅혼한 시와 <금오신화>를 낳게 했다.

 

 

▶김병연(김삿갓.金炳淵.1807∼1863)

 

   풍자시의 진면목을 보인 김병연의 기행(奇行)은 가위 전설적이다. 철종 시대의 방랑시인 김삿갓이 바로 그다. 할아버지가 홍경래난에 투항한 사실을 부끄러이 여기며 구름을 이불 삼고 시 한 수로 밥을 빌며 전국을 떠돌다 첩첩산중 강원도 영월에 묻힌 그도 우리 문학사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괴짜 문인이다.

 

 

▶박용래(朴龍來.1925∼1980)

 

   “오오냐, 오오냐 적당히 살거라 시인들아!”라며 세상을 온통 긍정하면서도 눈물로 시적 에스프리(프랑스어로 esprit, 즉 기지, 재치, 정신)를 캐냈던 박용래는 천성적 순수로 현실에는 도저히 편입될 수 없는 시인이었다. 강경상고를 졸업하고 은행에 들어갔으나 돈 세는 것에 염증나 그만둬버린 박용래는 돈ㆍ사회와는 영영 등을 돌리고 술로만 살았다. 술을 마시면서도 울고, 별을 보고도 울고, 봄 햇살에 날리는 장닭 꼬리를 보고도 울고, 울면서 또 울던 박용래는 삼라만상에서 한 (恨)의 원형을 끌어올린 극순수의 서정시인이다.

   "골목에서 골목으로 

    거기 조그만 주막집. 

    할머니 한 잔 더 주세요.

    저녁 어스름은 가난한 시인의 보람인 것을…

    흐리멍텅한 눈에 이 세상은 다만 

    순하기 마련인가.“   (<주막에 서>중).

 

 

▶신동문(辛東門.1928∼1993)

 

   1956년에 등단, 1965년 절필할 때까지 참여시인으로 필명을 날렸던 신동문도 시인의 결벽성으로 시대와의 불화를 이겨낸 시인이다. 5ㆍ16군사정권에 맞서는 자신의 시도, 자기 자신도 결국은 아무 것도 ‘아니다’며 신동문은 세상을 등져버리고 충북 단양의 초야에 묻혀버렸다. 거기서 그는 침술로 주민의 병을 치료, ‘단양의 신(辛)바이처’로 인술을 떨치다 자신의 암은 치유치 못하고 세상을 영원히 등졌다.

 

 

▶오상순(吳相淳.1893∼1963)

 

   오상순은 시대와의 불화가 빚어낸 대자유인이었다. 목재상 아들로 태어나 일본 도시샤(同志社)대학을 나와 전도사 활동을 하던 그는 1920년 김억ㆍ남궁벽ㆍ황석우ㆍ변영로등과 함께 [폐허] 동인으로 참가, 창간호에 <시대고와 희생>이란 평론을 발표하면서 식민 치하의 허무주의자로 돌아선다.

   불교에 귀의, 허무의 극한에서 공(空)을 깨치고 속세로 돌아와 동가식 서가숙하며 70평생을 문학도들에게 시의 순수를 자신의 삶 자체로 깨우쳐주다 갔다.

   기독교도, 불교의 공사상도 초월해 ‘공초(空超)’라 한 오상순은 하루 2백개비씩 줄담배를 피운 ‘꽁초’로도 유명하다. 오상순같이 세상과의 불화를 견뎌낼 수 없는 타고난 순정한 기질로 세상 어디에도 편입하지 못하고 오직 자유혼으로 문학을 일군 방외(方外) 문인들. 이들의 맥은 우리 문학사에 깊은 골을 이루고 있다.

 

 

▶이상(李箱, 본명 김해경.1910∼1937)

 

   문단의 봉우리에 올랐으면서도 일체의 문단 출입도 없었다. 박제(剝製)된 천재 이상)은 대책 없는 자유혼으로 그의 문학을 한국 문학사에 문학의 영원한 ‘원형’, 속인이 쉽게 풀 수 없는 비의(秘意)로 각인시켜 놓았다. 건축기사 출신 이상(김해경.金海卿)은 인부가 잘못 부른 ‘이-상(李氏 이씨)’을 그대로 필명으로 쓰며 문단에 들어왔다. 기생 금홍과 기괴하고 방만한 풍문을 뿌리며 27세로 요절한 이 상. 청춘의 무한한 실험과 가능성 그 자체로의 요절이 오늘도 그의 문학을 푸르게 흘러들게 하고 있다.

 

 

▶천상병(千祥炳.1930∼1993)

 

   천상병 시인도 대책 없는 순수로 이 세상을 가난하게만 살다간 천상의 시인이다. 서울대 상대를 나와 보장된 그 좋은 직장도 다 마다하고 천상병은 술로써만 시를 지키다 갔다. 그는 무직ㆍ방랑ㆍ구걸ㆍ주벽으로 우리시대 마지막으로 숱한 화제를 뿌리다 쓰러져가는 철거민촌 오두막에서 외로이 숨져갔다. 그러한 삶도 좋았노라고, 마치 소풍놀이 같았다며 하늘로 돌아갔다. 그가 죽자 문학평론가 김재홍(金載弘)씨는 다음과 같이 추모했다.

   “곤궁한 삶의 극한 속에서도 세속으로부터 자신을 해방하여 인생의 의미를 깊이있게 일깨워준 참자유인, 진짜 시인의 타계로 이제 이 땅에서 시인의 신화시대는 막을 내렸다.”

고. ‘참자유인’은 천상병만이 아니라 ‘진짜 괴짜문인’ 모두를 가리키는 말이다. 세속으로부터 자신을 해방한 아웃사이더 문인들을 우리가 기리는 것은 시공을 초월한 인생의 깊은 의미를 일깨우기 때문이다. 또 바로 이것이 문학의 핵심 아닌가. 시절이 수상해지면 방외자로서 숨어 있는 문인들이 우리의 시야에 다시 들어올 것이다. 그리고 참자유가 무엇인가를 깨우칠 것이다. 

 

 

▶한용운(韓龍雲.1879∼1944)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연인과의 이별을 절절하면서도 단아하게 읊은 듯한 <님의 침묵>의 시인 한용운은 근대문학사의 최초의 방외문인으로 볼 수 있다. 만삭의 아내를 저버리면서까지 출가(出家), 속세와 인연을 끊은 그는 어디에도 구속되거나 굴하지 않은 숱한 기행을 남기고 있다. 변절한 최남선이 아는 체 하자 '당신을 장례치른지 오래다'며 죽은 사람 취급했던 일이나 언 방에서 고구마로 끼니를 때우면서도 세상의 도움을 거절했던 그다.

 

 

▶한하운(韓何雲.1920∼1975)

 

   김관식과는 정반대편에서 천형의 나병에 걸려 전국을 떠돌면서도 <보리피리> 같은 아름다운 서정시를 남긴 한하운도 빼놓을 수 없는 방외문인이다.

   "맑은 생시의

    속 깊은 슬픔은

    어떻게 무엇으로

    어떻게 달래나.

    나는 취했다.

    명동에서 취했다.

    종로에서 취했다. 

    나는

    나는

    이런 것이 아니다.”( <아니다의 주정>중에서).


출처 : 미완성을 위한 戀歌  |  글쓴이 : 多余人 원글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