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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의 향기/詩와 시인

김해경은 왜 이상이 되었나

by 골든모티브 2010. 3. 20.

이상(1910~1937) 탄생 100주년

 

한국문학의 영원한 모던보이

  

 

  자연인에서 문학인으로 탈출선언

  가난한 집 장남이었지만 가족 부양보다

  예술 택해

 

김해경은 왜 이상이 되었나

 

이상의 본명은 김해경(金海卿)이다. 강릉을 본관으로 하는 김연창(金演昌)이 그의 생부다. 김연창은 얼굴이 얽은 사람으로, 형 김연필(金演弼)의 주선으로 구한말 궁내부(宮內府) 활판소(活版所)에서 일하다가 사고로 손가락 세 개를 절단당한 뒤 작은 이발소를 개업해서 호구지책을 삼았다.

이상은 〈슬픈 이야기〉라는 글에서 그 사연을 이렇게 적었다. "우리 어머니도 우리 아버지도 다 얽으셨습니다. 그분들은 다 마음이 착하십니다. 우리 아버지는 손톱이 일곱밖에 없습니다. 궁내부 활판소에 다니실 적에 손가락 셋을 두 번에 잘리우셨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생일도 이름도 모르십니다. 맨처음부터 친정이 없는 까닭입니다. 나는 외가집 있는 사람이 퍽 부럽습니다. 그러나 우리 아버지는 장모 있는 사람을 부러워하지 않으십니다."

김해경이 1910년 9월 23일 새벽 6시경 서울 통인동 154번지에서 중인 계급의 가난한 집안 장남으로 태어났을 때, 그의 이름을 지은 이는 조부 김병복(金炳福)이었다. 해경은 집안의 자랑이었고, 몰락한 가문을 일으켜 세울 희망이었다. 그런 까닭에 조부의 사랑을 듬뿍 받을 수 있었다.

 
경성고등공업학교 시절의 이상. 그림을 좋아하는 청년이었다. /‘뿔’제공

어린 해경은 젖을 떼자마자 총독부 상공과의 하급 관리직에 있던 자식 없는 백부의 양자로 들어갔다. 백모는 해경에 대해 엄격했다. 백부가 안아줄 때도 겁이 난 어린 해경은 늘 울곤 했다. 해경의 내면은 어리광과 유희 본능을 억압당하고 낯선 세계가 주는 공포와 불안에 착색당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이상(李箱)'이란 필명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혼재한다. 해경이 경성고등공업학교 졸업반 시절 공사장에 감리감독을 나갔을 때, 인부들이 그의 성을 잘못 알고 일본식으로 '리상(李樣)!' 하고 부른 데서 기인한다는 설이 유력하다. '이상'이란 필명이 처음 나타난 것은 경성고공(京城高工) 제8회 졸업앨범이다. 조선인 학생 17명이 이름을 올린 그 명부 안에 해경은 이상(李箱)이란 필명을 쓰고 있다. 그러나 1931년에는 김해경이란 본명으로 《조선과 건축》(7·8·10월호)에 〈이상한 가역반응〉 등 21편의 일어(日語) 시를 연이어 내놓는다. 그리고 아홉 달 뒤인 1932년 7월 같은 잡지에 〈건축무한육면각체〉라는 제목 아래 7편의 시를 내놓으며 비로소 '이상'이란 필명을 쓴다. 전통과 탈전통, 어른과 아이, 혈통적 의무와 예술적 자유 사이에서 공포와 불안의 운명에 주박당한 기호인 김해경은 이상이라는 귀면(鬼面)을 쓰고 탈주한다.

김해경이란 이름은 강릉 김씨라는 핏줄을 잇고, 몰락한 가문을 일으켜 세우라는 정언적 명령이자 세속적 가치의 기호라는 함의를 갖는다. 1931년 백부 김연필이 죽고 해경이 가족의 품으로 돌아갔을 때, 그에게 다가온 것은 "젖 떨어져서 나갔다가 23년 만에 돌아와 보았더니 여전히 가난하게들 사십디다"에서 볼 수 있듯 가난의 참상 속에서 벗어나지 못한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의무였다.

'해경'은 그의 생식력과 노동력이 온전히 이 가족적 가치의 재생산에 바쳐져야 함을 의미하는 가족명이다. 따라서 '이상'이란 필명의 참칭은 '김해경'의 전면부정이자 그것이 강제하는 일체의 운명으로부터의 탈주와 새로운 주체 탄생, 그리고 근대적 가치에 의한 봉건적 가치의 죽음을 선언하는 셈이다. 시인 김승희는 이 변성명(變姓名) 행위를 '억압과 위기에 대응하는 자아변형과 제의적(祭儀的) 변화의 추구'로 설명한다. 아울러 그것은 자신의 자발적 의지와 상관없이 강제된 운명으로 주어진 '김해경'의 상징적 죽음과 함께 이루어질 이질적인 삶으로의 분열·분화를 예고하는 신호탄이고, 평론가 신형철의 지적대로 '자연인 김해경에서 문학인 이상으로의 탈출'이다.

이상은 정지용이 주재하던 잡지 《카톨릭청년》(1933.7.)에 한국어로 된 시를 발표하며 자신의 문학을 한국문학의 영토 안으로 편입시켰다. 그중 〈1933, 6, 1〉이라는 시에서 "나는 그날 나의 자서전에 자필의 부고(訃告)를 삽입하였다"라는 표현을 썼고, 이어서 같은 잡지(1933.10.)에 내놓은 〈거울〉이라는 시는 자아가 '거울 밖의 나'와 '거울 속의 나'로 분열하는 모습을 분명하게 그려낸다. / 2010. 1.26 조선일보, 장석주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