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의 향기/詩와 시인

이상과 김유정 폐결핵으로 무너진 공동운명체

by 골든모티브 2010. 3. 24.

이상 탄생 100주년

 

 

 불우한 두 천재, 그들은 서로 거울이었다

 가난, 병마속에 신음하던 나날

 이상은 함께 죽자 했지만...

 유정은 아직 희망이 이글이글 끓습니다

 

이상과 김유정 폐결핵으로 무너진 공동운명체

 

1931년 이상(李箱)은 한 공사 현장에서 처음 각혈을 하며 쓰러졌다. 이후 폐결핵으로 고생하던 그는 1933년 3월 조선총독부 건축기수(技手) 직을 사직하고 황해도 배천 온천으로 요양 여행을 떠났다. 소설 〈봉별기(逢別記)〉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스물세살이오―3월이오―각혈이다. 여섯 달 잘 기른 수염을 하루 면도칼로 다듬어 코 밑에 다만 나비만큼 남겨 가지고 약 한 제 지어 들고 B라는 신개지 한적한 온천으로 갔다. 게서 나는 죽어도 좋았다.'

폐결핵은 가난과 과로를 달고 사는 예술가들의 질병이다. 예술가들이 삶의 추잡함을 정화하고 날마다 소멸하는 비루한 이승의 삶에 불을 밝히는 영혼의 질병으로 받아들이는 폐결핵을 두고 영국 소설가 찰스 디킨스는 "죽음과 삶이 기이할 정도로 뒤섞여 있는 나머지, 죽음이 삶의 홍조와 빛깔을 취하고, 삶이 기분 나쁘고 소름 끼치는 죽음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질병"이라고 썼다.

1935년 1월 소설가 김유정(1908~1937)이 조선일보와 조선중앙일보 신춘문예에 각각 〈소낙비〉와 〈노다지〉가 당선되며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그는 후기(後期)구인회(九人會) 멤버로 들어왔고, 이미 구인회 멤버였던 이상과도 친교가 이루어졌다.

 

  ◀ 단편〈소낙비〉로 1935년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 선했을 당시의 김유정

 

 유정은 3월 29일 새벽 세상을 떴다.

 그리고 20일 뒤인 4월 17일,

 이상 역시 동경제대 부속병원에서 폐결핵으로

 숨을 거두었다. 불우한 두 천재 작가들은

 이렇게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운명을

 달리했다.

 

 

이상은 김유정에 대해 '운명 공동체'라는 연대감을 느꼈다. 그것은 유정이 어린 시절에 양친을 잃고 고아가 되었듯 자신도 생부모를 떠나 백부에게 입양되며 '정신적 고아'가 된 것, 자신이 가난의 신고(辛苦) 속에서 허덕이듯 유정 역시 토호(土豪)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형이 가산을 탕진한 탓에 가난 속에서 신음한 것, 그리고 두 사람 모두 폐결핵으로 생명의 불꽃이 꺼져가고 있다는 것 등의 공통점에서 비롯됐다.

이 무렵 김유정의 폐결핵은 연속되는 과음과 철야 집필로 깊어진 상태였다. 1936년 7월 그는 서울 정릉(貞陵) 근처의 산중 암자로 요양을 갔다. 암자에서 술과 담배를 끊고 규칙적인 생활을 하자 오한과 열이 내리고 기침도 줄었다. 이처럼 그의 병세는 한때 호전되기도 했지만 8월 하순경 급격하게 다시 나빠져 위독하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조카 영수와 매형 유세준 등이 정릉 암자로 달려와 유정을 업고 병원으로 데려갔지만, 이미 회복 불가능한 상태였다.

그해 가을 어느 날 김유정이 푸른 포장을 방안에 치고 촛불을 켠 채 글을 쓰고 있는데, 이상이 찾아왔다.

"각혈이 여전하십니까?" "네. 그저 그날이 그날 같습니다."
"치질이 여전하십니까?" "네. 그저 그날이 그날 같습니다."

불우함을 공유하고 있는 두 사람 사이에 그런 대화가 오갔다. "유정! 유정만 싫다지 않다면…" 하고 이상은 귓속말로 동반자살을 제의했다. 그러나 '이 신성불가침의 찬란한 정사(情死)' 제의를, 유정은 "이것 좀 보십시오" 하고 앞가슴을 풀어헤치고 앙상하게 뼈가 드러난 모습을 보여주면서도, "명일(明日)의 희망이 이글이글 끓습니다"라며 끝내 거절했다. 이상은 그 앙상한 가슴이 부풀었다 가라앉는 걸 반복하며 거친 호흡을 하는 유정을 서글픈 얼굴로 바라보았다. "김형! 나는 일본으로 떠나오"라고 이상이 작별인사를 하자, 유정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울었다.

1937년 2월에 김유정은 거처를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산상곡리에 있는 매부 유세준의 집으로 옮겼다. 문단에서는 병고(病苦) 작가 구조 운동이 일어났다. 3월 18일, 유정은 세상을 뜨기 열하루 전에 휘문고보 동창인 안회남에게 편지 한 통을 썼다. "나는 날로 몸이 꺼진다. 이제는 자리에서 일어나기조차 자유롭지가 못하다. 밤에는 불면증으로 하여 괴로운 시간을 원망하고 누워 있다. 그리고 맹열이다."

유정은 병마와 최후 담판의 시각이 도래했음을 직감했다. 유정은 안회남에게 탐정소설을 번역해서 보낼 테니, 극력 주선하여 돈을 만들어달라고 했다. 그 돈으로 "닭 삼십 마리를 고아 먹고, 땅꾼을 사서 살모사와 구렁이를 십여 마리 달여 먹겠다"고 했다. 그러나 유정은 답장을 받기도 전인 3월 29일 새벽 세상을 떴다. 그리고 20일 뒤인 4월 17일, 이상 역시 동경제대 부속병원에서 폐결핵으로 숨을 거두었다. 불우한 두 천재 작가들은 이렇게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운명을 달리했다. / 2010.2.5 조선일보. 장석주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