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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의 향기/詩와 시인

중국에서의 윤동주 문학 연구 현황과 과제

by 골든모티브 2010. 3. 10.

중국에서의 윤동주 문학 연구 현황과 과제

  崔玉山(중국 대외경제무역대학교)

 

 

 

1. 서론

 

운명적으로 주어진 슬픔과 괴로움을 묵묵히 짊어지고 고요하고 경건하게 하늘과 바람과 별을 노래하며 깨끗하게 살다간 윤동주는 하나의 아름답게 빛나는 恒星이다.

1948년, “무시무시한 고독에서 죽었구나! 29세가 되도록 시도 발표하여 본 적이 없이!”라는 정지용의 개탄과 함께 그의 이름과 시는 마침내 오랜 고독을 떨쳐버리고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때로부터 윤동주 시는 줄곧 특별한 사랑을 받으며 애송되었고 거의 모든 한국문학 연구자들의 붓끝에 오르는 영광을 받아 안았다.

그러나 1985년 봄, 일본인 학자에 의해 부활되기 전까지 나서 자라고 뼈가 묻힌 중국 땅 용정에서의 윤동주는 한없이 외롭고 쓸쓸했다. 이념에 의한 긴 단절의 세월은 ‘시인 윤동주’를 철저하게 망각된 존재로 만들어버렸던 것이다. 그만큼 그의 발견이 가져다준 충격과 흥분과 감격은 컸다. 끊임없는 이데올로기 투쟁에 휘말리면서 중국문학과 한국문학 어디에도 제대로 끼지 못하고 홀대받던 조선족 문단과 학계는 ‘고향이 낳은 세계적 대시인 윤동주’라는 벅찬 선물에 더없이 반색했고 ‘윤동주 알리기’에 열을 올렸다. 여러 가지 어려움을 딛고 속속 산출되는 연구 성과들은 윤동주를 향한 조선족 지성인들의 애정의 발로라고 할 것이다. 그런데 양적 비약에 대등하는 질적 비약을 이루지 못했다는 점은 그 한계로 지적될 수밖에 없다. 거의 우상화에 가까운 숭배를 보이면서 학문적 접근보다 신화적 존재 만들기에 편중하는 학계 분위기도 문제지만 ‘조선족 시인’이라는 틀에 갇혀 중국 주류문단의 관심밖에 있다는 것이 더 큰 문제다. 화려한 외피에 가려진 위기를 꿰뚫는 혜안을 갖고 그 대응책에 대한 진지한 사유가 이루어질 때, 중국에서의 윤동주연구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발전과 도약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윤동주 문학의 중국적 주제는 풍부하다. 북간도 민족운동의 요람 용정의 하늘과 별을 바라보면서 시인의 꿈을 키웠던 윤동주가 남기고 간 흩어진 흔적들을 찾아내고 복원하고 작품 속에 산재해 있는 중국적 특성을 정확하게 포착하고 해명하는 작업은 윤동주연구의 큰 과제이다. 윤동주 문학의 귀속 논쟁을 슬기롭게 매듭짓고 중국 연구자들의 시선을 끌어올 수 있는 보다 효과적이고 생산적인 방법론을 모색하여 그 담론의 폭을 넓히는 일 역시 시급하다. 그리고 디아스포라 개념의 도입과 활용으로 140여년 역사를 가진 중국 조선족과 글로벌 시대 산물인 재중한인들의 디아스포라적 체험과 그 특성에 대한 考究가 또 하나의 새로운 주제로 대두하고 있는 이때, 어쩌면 윤동주에 대한 정치한 접근과 해석에서 가장 설득력 있는 해답을 얻을 수 있다는 점도 유념해야 한다. 문학적, 심미적, 윤리적 가치 모두가 서로 다른 공간, 서로 다른 체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윤동주 시의 특징은 또한 합의점이나 기준 때문에 고민하는 ‘동아시아 문학사’ 나 ‘동아시아 공통 정전(canon)’ 구성에 귀감이 될 수도 있을 터이다.

본고의 논의는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여 기존 연구의 성과와 한계를 꼼꼼하게 짚어보고 남은 과제와 그 대안을 제시함으로써 중국에서의 윤동주 문학의 자리매김 나아가서는 동아시아 한국학 구축에서 가지는 윤동주 문학의 의미를 구명하는데 일조하고자 한다.

 

 

2. 윤동주 연구의 현황과 문제점

 

삶의 길과 시가 너무도 아름답고 감동적이어서 윤동주에 매료되었다는 오오무라 마스오의 끈질긴 추적과 헌신적 노력이 없었다면 윤동주의 고독은 훨씬 더 오랜 시간 지속되었을 것이다. 중국 용정시 동산의 초라한 무덤 속에 쓸쓸하게 침묵당하고 있던 윤동주가 발견되고 돌연 문화적 財寶로 격상한 것은 1985년 5월이었다. 고향에 묻힌지 꼭 40년 만이었다. 모든 것이 이념을 위해 복무하던 시기, 한국과의 소통 통로가 완전히 막혀 있던 중국은 윤동주가 빛을 볼 수 있는 어떠한 조건도 허락하지 않았고 이러한 상황은 외국에 대한 경계가 남아 있던 1980년대 중반까지 이어졌다. 중국 학계는 윤동주에 대한 아무런 정보도 얻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것이 중국 학자들이 일본 학자의 윤동주 묘비 발견에 감사하면서도 통탄을 금치 못하는 까닭이다. “그를 오래동안 고향사람으로 몰라본데 대해 깊이 사죄하며 시인 윤동주야말로 중국 조선족이 낳은 가장 자랑스러운 아들”이라는 정판룡의 말은 윤동주에 대한 중국 조선족 지성인들의 진솔한 심경을 대변해 준다.

1985년 말, 조선족 사회의 대표적 문학 학술지『문학과 예술』에 「윤동주 시 10수」가 소개되면서 윤동주와 중국은 급속도록 가까워지며 특히 고향 연변은 아직은 낯선 시인에게 아낌없는 절찬을 보냈다. 「고귀한 령혼을 부르며」,「고향이 낳은 시인-윤동주」,「바람에 스러진 별 하나 그리며」, 「윤동주의 정신을 기리며 민족문화를 꽃피워가자」,「서서히 빛을 휘뿌리는 혜성」등 글들은 한결같이 윤동주를 얻은 흥분과 자부심에 들떠 있었다. 이들의 공통적인 한계는 “늦게야 빛을 뿌리는 혜성” 윤동주 알리기에 급급한 나머지 개괄적인 평가 이상의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생가 복원, 사적 정리, 추모 행사 등 작업의 순조로운 진행을 위해서는 시인에 대한 평가가 우선시되어야 한다는 사고에서 비롯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칭송 일색의 ‘우상화 만들기’ 분위기 속에서도 드물게나마 텍스트에 충실한 객관적 분석을 시도한 연구들이 눈에 띄어서 흥미롭다. 「윤동주 시의 변모양상」, 「윤동주 시의 심미가치에 대하여」, 「윤동주의 시세계」, 「외롭게 대화하자」, 「윤광주의 시세계-윤동주 시와의 비교」,「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는 별」등이 그 대표적 사례다. 특히 구조미에 주목하여 작품의 정신세계를 새롭게 해부, 분석하고자 한 김경훈의 「외롭게 대화하자」는 최초의 작가론이라는 데 그 특별한 가치가 있으며 윤동주 시에 나타난 이미지들의 상징성에 대한 정확한 포착이 돋보이는 장춘식의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는 별」도 특기할 만하다. 아직은 학문적 상대국인 한국과의 소통이 원활하지 못한 어려운 여건에서 탄생한 이러한 성과들은 약간의 어설픔은 있어도 윤동주 문학에 대한 성실하고 진지한 고민의 산물이라는 것만으로도 소중하다.

그런데 주목할 점은 윤동주의 이와 같은 화려한 부활을 받쳐준 것은 ‘항일 시인’, ‘저항 시인’이라는 자리매김이었다는 것이다. 조성일, 권철의 『중국조선족 문학사』는 “항일 시기의 이름 있는 시인의 보좌에 오르기에 손색이 없다.", "시종 민족의 독립과 자유를 위하여 자기의 시와 삶을 바친 재능 있는 저항 시인”이라는 평가를 내렸고 거의 모든 연구자들이 그것에 동조했다. 윤동주 시의 저항성에 이의를 제기한 한국의 일부 학자들의 논의에 “적어도 일제의 탄압 앞에는 굴복하지 않고 조선사람답게 살아가겠다는 시인의 자세는 그를 저항시인으로 부르게 한다.”라며 강한 반론을 펼친 임윤덕의 「저항시인 윤동주」는 중국의 조선족학자들이 윤동주의 위상 정립에 얼마나 예민해 있었는가를 잘 보여준다. 작품에 앞서 작가의 생애가 받아들여져야 했던 당시의 문학 풍토에서 다양한 평가가 자칫 윤동주문학의 중국 진출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원인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는 우려의 표출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중국인들의 공감대를 자극할 수 있는 충분한 가능성이 담긴 평가 덕분에 윤동주 문학은 이념과 주의를 넘어 쉽게 중국에 다가갈 수가 있었고 역동적인 발전을 도모할 발판을 마련했다. 물론 그것이 윤동주 문학을 ‘항일’과 ‘저항’이라는 틀 속에 꽁꽁 묶어 놓아 한동안 담론의 폭을 제약하는 역효과를 가져오기도 했던 것도 사실이다.

최근 들어 애착이나 집념 같은 주관적 감정에 가려 조명되지 못했던 부분들에 눈길을 돌리고 다양한 각도에서 윤동주를 새롭게 바라보려는 일부 움직임들이 보이고 있는데, 그 단적인 예로 동시대에 비슷한 삶을 살다간 시인 심연수와 함께 놓고 공통점과 차이점을 찾아내고 그 원인을 소상하게 밝힌 박려성의 「심련수와 윤동주 시문학 비교연구」를 꼽을 수 있다. 그리고 작가로서 윤동주가 자신의 정체성 인식을 어떻게 표현하였느냐에 초점을 맞추고 그의 문학의 이민문학적 성격 규명에 주력한 장춘식의 「이민문학의 시각에서 본 윤동주의 시」는 윤동주 문학연구에 디아스포라적 논의를 적용할 수 있다는 또 다른 해석 가능성을 제시해주었다. 이는 글로벌 시대가 가져다 준 열린 의식과 국제적인 감각이 연구자들의 통찰력과 창의력 향상에 영향주고 있으며 그것이 윤동주 연구의 흐름을 조금씩 바꿔 놓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하지만 조선족 학계의 무한한 관심과 사랑을 받으며 20년 넘게 떠받들리고 있는 윤동주는 중국의 주류문단과 학계에서는 여전히 서먹서먹한 존재라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현재 중국어로 된 윤동주 연구는 성후이(盛輝)의 「시인 윤동주와 그의 <서시>」와 같은 짧은 글 몇 편 밖에 없다. 중국에서의 윤동주 알리기가 사실상 조선족 사회라는 작은 울타리 안에서만 진행되었다는 안타까운 현실을 인정하고 깊은 반성과 대책 마련이 절실하다. 기실 일찍 1996년 12월에 한국 지성인들의 사심 없는 지원과 중국 학자들의 각고의 노력으로 처음으로 중국어판 『윤동주 유고집』이 발간되었으나 변방에서만 맴돌던 중국에서 한국문학의 위상 때문에 “시어의 품격을 한껏 살아나게 한” 뛰어난 번역임에도 불구하고 중국 13억의 독자층으로 확대하려했던 ‘야망’은 이루지 못하였다. 물론 그것이 한중 지성인들의 협동정신으로 만들어진 합작품이고 정전적 위치를 부여받는 『중국 소수민족 고적』의 『조선족 고적 총서』에 수록되었으며, 중국어로 윤동주와 그의 시를 알리는 매개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는 것만으로 큰 의미가 있으며 충분한 가치평가를 받아야 할 것이다.

 

 

3. 남은 과제, 그리고 대안

 

윤동주 문학의 귀속문제에 대한 끊임없는 논쟁은 조선족 학계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풍경으로 그것을 종식시킬 수 있는 대안 창출이 시급하다. 자칫 ‘윤동주 빼앗기’로 비쳐질 수 있는 이러한 풍경에는 거주국과 고국의 경계적인 공간에서 민족적 정체성과 국민적 정체성이라는 이중 정체성을 안고 살아가는 조선족이 어쩔 수 없이 겪게 되는 갈등과 고민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1980년대 중국의 개혁개방으로 상상과 그리움의 공간이었던 한국과의 소통통로가 열리자 중국 조선족 사회는 가장 먼저 ‘나는 누구인가’를 묻는 존재적 사유에 몰두했고 그것이 학계의 ‘뿌리 찾기’로 표출되었다. 윤동주 문학의 의미를 “우리 민족의 뿌리를 찾는 작업과 련계시켜 생각해 본다”, “우리는 떳떳하게 윤동주 시인의 중국조선족 문화에로의 새로운 뿌리 찾기를 고집할 수 있다고 본다.” 는 논의는 이러한 맥락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윤동주의 발견은 조선족의 ‘뿌리 찾기’에 커다란 날개를 달아준 셈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조선족 시인’으로 신분증을 내주기로 합의했음에도 많은 학자들이 한국과 중국이라는 두 개의 주체를 의식해야 하는 불편한 사정 때문에 ‘항일 시인’이나 ‘저항 시인’과 같이 명쾌하게 성격 규명을 했던 것과는 달리 ‘고향이 낳은 시인’, ‘민족 시인’이라며 조심스러움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조선족 시문학을 한결 높은 단계로 끌어올린 시문학”이라면서도 ‘조선족 시인’이라는 용어 사용은 회피하고 있는 조성일, 권철의 『중국조선족문학사』도 그렇고 “윤동주에게 호구를 붙여주고 신분증을 내주는 회의”라고 당차게 밝히면서도 회의 주제는 “민족시인 윤동주 50주기 기념 학술토론회”로 정하는 것은 더욱 그렇다. 대학 강의에서 강경애나 안수길 지어는 신채호와 같은 작가까지 조선족 문학사에 고민 없이 편입시키면서도 중국 땅에서 나서 자란 윤동주는 오히려 한국문학사에서 치중하여 다루고 있는 경우도 이와 맥을 같이하고 있다. 윤동주는 조선족 사회에 엄청난 선물이면서도 약간은 버거운 존재이기도 한 것이다. 따라서 윤동주 문학을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끌어안고 가느냐는 조선족 문학이 해결해야 하는 중요한 과제이며 그 해결을 위해서는 조선족 문학에 대한 개념 확립부터가 이루어져야 한다.

대부분의 조선족 학자들마저 외면해 버리는 학계의 무관심 속에서 어렵게 시작한 조선족문학 연구는 개념 확립에서부터 진통을 겪고 있다. 중국에서 ‘조선족’이라는 민족 명칭이 생기기 전 문학을 조선족문학 범주에 끌어들인 것이 그 근원이었다. ‘만주조선인문학’, ‘재만한국문학’, ‘중국조선족문학’, ‘중국조선민족문학’, ‘중국조선인문학’, ‘만주조선어문학’, ‘조선현대작가들의 중국체험문학’ 등 서로 다른 용어는 범주 정립 기준을 세우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출생지원칙이냐 사망지 원칙이냐 아니면 국적주의 원칙이냐 속지주의 원칙이냐가 관건인데 줄곧 합의를 이끌어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족 학자들이 윤동주 문학 귀속 문제를 마주하여 망설이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대안은 무엇일까? 윤동주가 우선 조선족시인이냐 아니냐를 따지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윤동주 문학의 보편적 가치를 발견, 발전시키고 그 효력을 확대시키는 것이 최종 목표라면 그 일환으로 최근 고조되고 있는 ‘동아시아 담론’을 활용하는 것이 문제 해결을 훨씬 수월해지게 하는 방법일지도 모른다. 각자 나름의 해석과 주장을 고집해도 해방 전 중국에서 활동했던 작가들의 작품으로 조선족문학사를 풍부하게 장식하고자 하는 소박한 바람만은 공통적이라는 것, 동아시아 한국학이 하나의 학적 체계를 구축하자면 하나의 독특한 문학현상으로 엄연히 존재하는 중국 조선족문학을 간과할 수가 없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협소한 사심을 버리고 소속관계를 넘어 ‘윤동주 문학’이라는 소중한 자산을 동아시아 전체가 공유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다. 사실 그동안 이념에 의한 긴 단절의 세월이 남긴 낯섦과 서먹함이 벽이 되어 동아시아 각국은 서로를 똑똑히 바라볼 수가 없었다. 너무 많은 아픔, 너무 많은 슬픔, 너무 많은 혼란으로 쌓여진 그 벽이 허물어질 때, 동아시아 문학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소통을 완성하고 더 넓은 세상과의 대화를 할 수가 있을 터인데, 아무런 예비적 지식이 없어도 인간 본연의 정서나 감정으로 해석이 가능하고 아울러 감동과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윤동주문학이 가장 적합한 실험의 대상임이 틀림없다. 윤동주를 한국인이나 중국인만이 아닌 동아시아인, 세계인으로 되게 하는 것이 지금의 사명이고 추세이다.

또한 윤동주문학을 동아시아 담론에 끌어들이는 것은 조선족 문학에만 끼워서 중국 주류문단의 진출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 타개에도 바람직한 대응책이다. 경계인으로서 끊임없이 자신의 정체성을 묻는 정신적 고문을 당하는 슬픈 운명, 그러면서도 그것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변두리에서 중심부로의 진입을 위한 시도를 멈추지 않는 처절한 몸부림을 생생하게 그린 것이 중국 조선족문학이다. 따라서 이중정체성의 갈등과 극복은 조선족 문학의 가장 핵심적인 주제로 자리 잡았고 그 근저에 흐르는 것은 짙은 망향의식과 모국지향의식이었다. 한반도로의 회귀에 대한 강한 집념을 털어버리지 못한 긴긴 세월동안 조선족은 중국의 지배언어인 한어가 아닌 한국어로 문학을 영위하고 있었고 그 당위성은 추호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러나 민족의 정체성과 문화의 독자성 보존을 위한 조선족 작가들의 이러한 노력이 치른 대가 역시 만만찮았다. 중국의 통용 언어인 한어가 아닌 조선어로 창작했기 때문에 주류문단에로의 진출 통로가 차단되었고 자기 민족이라는 작은 울타리에 갇히는 결과를 초래했다. 더욱이 21세기를 지배하고 있는 산업화, 도시화의 물결로 강고한 통합성을 보여주었던 조선족공동체사회가 심각한 해체위기에 빠져들고, 모국어 위주 교육으로 인한 주체 집단과의 소통의 어려움을 경험한 젊은 세대들의 지배언어로의 급격한 쏠림현상이 일어나면서 조선족 문학의 작가군과 독자층도 현저한 감소추세를 보이고 있는 것도 큰 문제다. 조선족 문단이 안고 있는 이러한 문제점과 한계는 중국에서의 ‘윤동주 알리기’를 제약하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윤동주문학이 중국 주류문단에 가까워 질 수 있는 방안 모색이 절실한 것도 이 때문이다. 물론 논의의 핵심은 여전히 윤동주 문학을 중국 조선족 문학에 편입시킨다는 전제하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래도 고무적인 것은 이처럼 불안한 가운데서도 남영전, 김인순과 같은 한어로 창작활동을 하는 작가들이 중국 문단의 중심부에 성공적으로 정착해서 조선족문학의 위상을 높이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70년대에 출생한 김인순은 <고려와 나>, <고려 옛일> 등 일련의 작품으로 한어로 창작할 경우 조선족문학의 정통성을 잃어버리지 않을까 하는 앞 세대들의 우려를 잠식시켰다. 중국 조선족 문학이 한국어와 한어라는 이중 언어를 유연하게 아우르면서 자체의 독자성을 살리는 동시에 중국 문단에서의 위상 향상에 매진한다면 중국에서의 윤동주의 문학적 위치도 분명히 높아질 것이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윤동주문학을 동아시아 문학에 접맥시킬 수 있는 실용적인 방법을 모색하는 것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이는 중국 조선족 학계만의 과제가 아니다. 그 돌파구를 동아시아 정전 구성에서 찾을 수 있다. 현재 중국의 문학 교과서 정전 목록에 단 한편의 한국 작품도 없다는 것 때문에 회의적일 수도 있지만 이데올로기보다 텍스트의 예술적 가치와 인간의 보편적 윤리의식이 강조되는 새로운 평가 기준의 도입은 그 시도가 전혀 무의미 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희망적인 메시지를 던져주었다. 중국이라는 공간과의 아주 돈독한 인연, 그리고 인간의 순결한 심성이 그대로 녹아 있는 아름답고 탁월한 작품 세계는 윤동주와 동아시아 공통 정전의 만남을 기대하는 것이 ‘사치한 욕심’이 아니라는 확신을 준다. 그 길이 멀고도 험난할 지라도 더 넓은 세상과의 회통과 대화를 위해서는 열정과 끈기와 인내를 가지고 도전하는 학문적 자세가 긴절하다.

 

 

4. 결론

 

윤동주가 중국에서 부활한지도 벌써 25년에 가까워온다. 그동안 윤동주 문학 연구는 중국의 학자들뿐만 아니라 한국, 일본 등 여러 나라의 학자들까지 가세하여 무에서 유를 이뤄내는 힘든 과정을 겪어왔다. 본고에서 논의된 논문들 역시 윤동주를 사랑하는 수많은 연구자들의 학문적 열정의 소산이요 상호이해와 협동정신의 결과물이라 할 것이다. 그럼에도 굳이 그런 연구들의 문제점과 한계를 짚어내고 대안 모색에 골몰하고자 한 것은 중국에서의 윤동주 연구의 그림을 좀 더 정치하게 크게 풍부하게 그릴 수 없을까하는 약간은 외람된 ‘야심’에서였다.

끝없는 부끄럼과 괴로움으로 살다간 윤동주는 그래도 행복한 시인이다. 시인과 시가 다 같이 사람들을 울릴 수 있는 것은 아무에게나 차려지는 행운이 아니다. 그는 신앙인의 흐트러짐이 없는 자세로, 맑고 깨끗한 심령의 노래로 독자와 연구자들을 정복하였던 것이다. 한반도뿐만 아니라 한국어를 구사하는, 그리고 순결한 삶을 지향하는 이 지구상의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윤동주와 그의 시는 영원할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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盛輝, 「詩人尹東柱和他的<序詩>」, 『吉林華僑外國語學院學報』,2007.2期

 

 

 

윤동주를 읽는 방법

 

  

-영감, 걷기 명상, 천명의 모티프를 중심으로-

  엄국현(인제대학교)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우리 속담이 있습니다. 시를 읽고 해석하는 것은 작품이라는 구슬을 꿰어 의미라는 보배를 만드는 작업이며, 그 의미라는 보배 가운데 하나가 시를 쓴 시인을 이해하는 일일 것입니다. 인류가 만든 문화 가운데 하나인 시라는 형식에는 사람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마음을 알기는 어렵기 때문에 시를 이해하는 일은 과학보다 어렵고 가치가 있는 것이며, 겉모습과 다른 속사람을 만날 수 있는 것은 시를 읽을 때입니다.

윤동주는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듯이 부끄러움의 시인입니다. 그의 천성적인 성격 때문인지 아니면 그의 시 창작 방법에서 오는 것인지 아니면 그의 유교적 교양 때문인지 잘 알 수 없으나, 윤동주는 자신의 속마음을 잘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의 시를 읽으면 그 내용이 쉬우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다 말하지 않고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이 때문에 지금까지 윤동주의 시가 완전히 해명되지 않은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의 시를 읽고 또 다시 읽는 시행착오의 과정을 거치면서 윤동주가 자신의 속마음을 절제하면서도 그의 시 여기저기에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윤동주의 시는 그의 다른 시와 함께 살펴볼 때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보다 잘 드러난다는 점에서, 그의 시는 환유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의 시 한 편 한 편은 마치 지하철 역 이름과 같습니다. 지하철 역 이름을 이어가다 보면 그의 시가 가는 곳이 1호선인지 2호선인지 3호선인지 알 수 있습니다. 또 한편 윤동주 시에는 반복되어 자주 나타나는 내용도 있습니다. 영감과 명상과 천명이 그것인데, 이것은 윤동주 시의 환승역입니다. 이 환승역을 통해 우리는 윤동주의 시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 영감과 상상력

 

시는 받아쓰는 것일까요, 아니면 만드는 것일까요? 윤동주는 시란 받아쓰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신의 영감을 시인이 받아쓰는 것을 영감론이라고 합니다만, 윤동주 시 가운데 영감을 형상화한 작품이 「사랑의 전당」입니다.

 

순아 너는 내 전에 언제 들어왔던 것이냐?

내사 언제 네 전에 들어갔던 것이냐?

 

우리들의 전당은

고풍한 풍습이 어린 사랑의 전당

 

순아 암사슴처럼 수정 눈을 내려 감아라.

난 사자처럼 엉클린 머리를 고루련다.

 

우리들의 사랑은 한낱 벙어리였다.

 

성스런 촛대에 열한 불이 꺼지기 전

순아 너는 앞문으로 내달려라.

 

어둠과 바람이 우리 창에 부닥치기 전

나는 영원한 사랑을 안은 채

뒷문으로 멀리 사라지련다.

 

이제 네게는 삼림 속의 아늑한 호수가 있고

내게는 험준한 산맥이 있다.

-「사랑의 전당」(1938)

 

시적 화자인 나와 순의 사랑의 체험을 노래하고 있는 이 시는 흔히 윤동주의 유일한 연애시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윤동주는 「바람이 불어」란 시에서 ‘단 한 여자를 사랑한 일도 없다’고 한 바 있습니다. 만약 윤동주가 한 말이 사실이라면 「사랑의 전당」은 연애시가 아니라 연애시의 형식을 빌린 명상시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랑의 전당에 언제 들어갔는지 알 수 없다는 1연의 내용은 명상이 자신도 모르게 일어나는 것이며 일상적인 지각 너머의 일임을 나타낸 것입니다. ‘우리들의 사랑은 한낱 벙어리였다’는 4연은 이 명상이 침묵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 것이며, 앞문으로 내달리는 것이나 뒷문으로 사라지는 것은 명상에서 빠져나와 일상적인 의식으로 돌아오는 것을 나타낸 것입니다. 호수나 산맥이 있다는 것은 명상에 의한 절정체험을 나타낸 것으로 ‘영원한 사랑’의 황홀경이나 생명감, 평화로움과 초월성을 상징합니다. 이것은 「돌아와 보는 밤」의 능금처럼 저절로 익어가는 사상이 존재의 참된 모습을 통찰하게 하는 것과 서로 통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5연에 보이는 촛대는 명상의 방법이 촛불을 켜고 하는 것임을 나타낸 것은 아닐까 여겨집니다. 이처럼 「사랑의 전당」은 명상하는 마음을 형상화한 작품이고, ‘순’은 남성의 무의식 속에 있는 여성적 요소인 아니마 원형상이거나 영감을 상징합니다. 왜냐하면 분석심리학에 따르면 여성은 남성에게 영감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전당」은 1938년, 윤동주가 22세 때의 작품인데, 이 해에 윤동주는 다음과 같은 작품을 남기고 있습니다.

 

발에 터분한 것을 다 빼어 버리고

황혼이 호수 위로 걸어오듯이

나도 사뿐사뿐 걸어 보리이까?

 

내사 이 호수 가로

부르는 이 없이

불리워 온 것은

참말 이적이외다.

 

오늘따라

연정, 자홀, 시기, 이것들이

자꾸 금메달처럼 만져지는구려

 

하나, 내 모든 것을 여념 없이

물결에 씻어 보내려니

당신은 호면으로 나를 불러내소서.

-「이적」(1938)

 

이 시는 기독교적인 기적을 소재로 한 시로 알려져 있습니다만, 이 시도 「사랑의 전당」처럼 명상을 소재로 한 시입니다. 시적 화자가 황혼녘에 호숫가로 부르는 이 없이 불려온 것은 자연과 일체가 되는 명상체험에서 비롯된 것이며, 연정, 자홀, 시기와 같은 감정들이 금메달처럼 만져진다는 것은 명상의 결과 연모하는 감정이나 자신의 의식으로부터 감추고 싶은 자기도취의 감정과 남을 시기하는 마음조차 손에 만져지듯이 구체적으로 느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호면으로 시적 화자를 불러내는 당신은 고리타분한 모든 것을 씻어내어 사뿐사뿐 가볍게 해 주는 그 어떤 존재를 지칭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이라는 존칭어나, 순 혹은 순이라는 여성은 명상 중에 나타나는 영감이나 아니마. 혹은 황홀한 예술적 형상사유를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시를 낳는 신적인 능력인 영감은 낭만주의 시대에 와서 상상력이라는 말로 바뀌어 다루어집니다. 코울리지에 따르면 상상력은 신적 창조력에 준하는 것이며, 대상을 변용시키는 정신능력입니다. 단순한 관찰의 차원을 넘어 명상의 경지에서 사물을 마음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 상상력이며, 시인의 창조적 정신능력은 대립되는 것들을 조화시키고 한데 어우러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봄날 아침도 아니고

여름, 가을, 겨울,

그런 날 아침도 아닌 아침에

 

빠알간 꽃이 피어났네,

햇빛이 푸른데,

 

그 전날 밤에

그 전날 밤에

모든 것이 마련되었네,

 

사랑은 뱀과 함께

독은 어린 꽃과 함께,

-「태초의 아침」(1941)

 

이 시는 시적 상상력을 형상화하고 있습니다. ‘사랑’과 ‘뱀’, ‘독’과 ‘어린 꽃’은 서로 대립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순된 존재를 함께 마련되도록 하는 상상력은 그 전날 밤에 모든 것을 새롭게 창조합니다. 이 시의 제목인 ‘태초의 아침’은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한 태초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적 상상력이 여는 새로운 세계를 뜻하는 말이라 생각됩니다. 「사랑의 전당」과 「이적」이 시의 창작이나 자연과의 일체에서 오는 황홀경(영감)을 노래하고 있다면, 「태초의 아침」은 모순된 사물을 결합시키는 상상력을 형상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지만, 이들 작품은 이 당시 윤동주가 명상에 익숙했다는 것과 함께 영감과 상상력이란 방법을 통해 시를 창작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오.

-「팔복-마태복음 5장 3-12」(1940)

 

이 시는 예수의 산상수훈 가운데 윤동주가 특히 관심을 지녔던 슬픔이란 감정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는 이 슬픔을 예수의 가르침이 보여주는 대로 부정적인 그 무엇이 아니라 긍정적인 가치를 지닌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다만 “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란 원문을 위의 시처럼 변형시키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현실의 고통과 운명의 슬픔을 인정하고 오히려 즐겁게 받아들이려는 기독교적 수난 의식과 긍정적 사랑을 표현한 것”(김재홍, 「운명애와 부활 정신」)으로 보기도 하고, 기독교 신앙에 대한 회의를 보여주는 시이며, 신에게 저항한 시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송우혜, 『윤동주 평전』)만, 이 시를 올바로 읽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윤동주 시의 창작원리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시적 상상력은 슬픔과 행복의 경우처럼 서로 대립되는 의미를 하나로 조화시킵니다. 슬픔이야말로 우리를 행복으로 이끈다는 사실을 새롭게 깨우치고자 하는 것입니다. 예수의 가르침 자체가 창조적 상상력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창조적 상상력이란 관점에서 볼 때, 이 시 「팔복」은 슬퍼하는 자를 영원히 축복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팔복」은 상상력이란 관점에서 보아야 그 참된 의미가 드러날 수 있습니다.

 

 

2. 걷기명상과 직관적 인식과 치유

 

영감은 언제 잘 나타날까요? 그것은 정신이 집중되었을 때, 다시 말하면 명상을 할 때입니다. 「사랑의 전당」에서 이미 살펴보았듯이 윤동주는 명상에 깊은 관심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윤동주는 명상 가운데 특히 걷기명상을 좋아했습니다. 걷기가 명상과 관련을 가지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루야마 시게오는 『뇌내혁명』이란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걷는 동안에는 명상을 하는 것이 좋다. 편하게 눕거나 좌선으로 몸을 이완시켜야 명상이 가능한 것은 아니다. 산책을 하면서 명상을 하면 오히려 3-4배 이상 효과적이다. 창조적인 생각이나 기발한 아이디어는 몸을 움직이면서 명상할 때 불쑥 튀어나온다. 철학자 칸트는 매일 빼놓지 않고 산책을 했다고 한다. 어쩌면 칸트의 위대한 철학사상은 산책을 통한 명상의 결과물일지 모른다.

 

또 레베카 솔릿은 『걷기의 역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장 자크 루소는 『고백록』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나는 걸을 때만 명상에 잠길 수 있다. 걸음을 멈추면 생각도 멈춘다. 나의 마음은 언제나 나의 다리와 함께 작동한다.”

 

걷기에서 위대한 사상이 나오고 걷기를 통해 명상에 쉽게 잠길 수 있기 때문에 걷기는 걷기명상이라고 불러도 좋으리라 생각됩니다. 걷기명상을 한 위대한 사상가는 서양뿐만 아니라 한국에도 있습니다. 퇴계는 자연 속의 산책을 좋아했는데, 그는 그것을 ‘왕래풍류’라고 부른 바 있습니다. 윤동주가 유학에 관심이 깊었기 때문에 윤동주가 퇴계의 왕래풍류에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 적도 있습니다만, 두 사람의 시에 나타나는 명상의 내용이 다르기 때문에 윤동주가 퇴계의 명상에서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니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천운대(天雲臺) 돌아들어 완락재(玩樂齋) 소쇄한데,

만권생애로 樂事이 무궁하여라

이 중에 왕래풍류를 닐어 무슴할고.(퇴계의 시조)

 

싸늘한 대리석 기둥에 모가지를 비틀어 맨 한란계,

문득 들여다볼 수 있는 運命한 오 척 육 촌의 가는 수은주,

마음은 유리관보다 맑소이다.

 

혈관이 단조로워 신경질인 여론 동물,

가끔 분수 같은 냉침을 억지로 삼키기에

정력을 낭비합니다.

 

영하로 손가락질할 수돌네 방처럼 추운 겨울보다

해바라기 만발한 팔월 교정이 理想?소이다.

피 끓을 그날이-

 

어제는 막 소낙비가 퍼붓더니 오늘을 좋은 날씨올시다.

동저고리 바람에 언덕으로, 숲으로 하시구려-

이렇게 가만가만 혼자서 귓속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나는 또 내가 모르는 사이에-

 

나는 아마도 진실한 세기의 계절을 따라-

하늘만 보이는 울타리 안을 뛰쳐,

역사 같은 포지션을 지켜야 봅니다.

-「寒暖計」(1937)

 

이 두 시의 차이가 잘 느껴질는지 모르겠습니다. 퇴계가 자연과의 풍류를 즐기며 만권생애를 즐기고 있다면, 윤동주는 한편으로는 자연속의 삶을 즐기고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학교를 뛰쳐나가려고 합니다. 윤동주의 학교생활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같은 해에 씌어진 「창」에서도 나타납니다만, 그는 동저고리 바람으로 언덕으로 숲으로 산책하는 걷기명상을 통해 학교생활의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합니다. 윤동주는 한란계의 모습에서 일상에 갇힌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도 ‘마음은 유리관보다 맑소이다’라고 한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평소에 자신의 맑은 마음을 들여다보고 있었기 때문에 ‘진실한 세기의 계절을 따라’ 살고자 하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쉬는 시간마다

나는 창녘으로 갑니다.

 

-창은 산 가르침.

 

이글이글 불을 피워 주소,

이 방에 찬 것이 서립니다.

 

단풍잎 하나

맴도나 보니

아마도 자그마한 선풍이 인 게외다.

 

그래도 싸느란 유리창에

햇살이 쨍쨍한 무렵,

상학종이 울어만 싶습니다.

-「창」(1937)

 

「창」에서는 쉬는 시간과 상학종을 대립시키면서, 창은 산 가르침이라고 합니다. 명상이란 창을 통해 사물을 관찰하는 그 무엇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수업시간에 얻은 죽은 지식이 찬 것이라면, 창가에서 이루어지는 명상에서 얻는 지혜는 가을날 찬 방에 이글이글 불을 피우는 것과 같은 따뜻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명상과 관련된 시들이 나타나는 1937년은 윤동주가 21세 되던 해입니다. 침묵과 고요함을 통해 마음의 평정에 도달하여 진정한 자기인식을 심화시키고 사물의 본질에 다가서게 하는 명상을 윤동주는 어디에서 배웠던 것일까요?

명상적 삶에서 비롯되는 관조는 존재를 지향하며 진리를 계시하고 존재의 비밀을 통찰케 합니다. 이른바 절정체험입니다. 플라톤에 따르면 우리로 하여금 이 신비에 대한 감각을 욕망하고 추구하게 하는 것은 사랑의 신 에로스라고 합니다. 존재의 비밀을 통찰하게 하는 것은 나와 남을 분리하는 추론적인 지식이 아니라 나와 남을 동질화하는 사랑의 직관적 인식인 명상이라는 것입니다. 윤동주의 시에는 명상을 소재로 삼거나 명상 중에 일어나는 정신적인 신비적 현상인 영감이나 상상력(神思), 황홀경을 노래한 작품이 있습니다. 1937년에 씌어진 「달밤」, 「소낙비」, 「명상」, 「산협의 오후」가 명상을 소재로 한 시라면, 1938년에 씌어진 「사랑의 전당」, 「이적」은 명상의 절정체험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1939년에 씌어진 「산골물」은 냇가의 명상과 거리의 소음을 대립시키면서 바다라는 중심상징으로 나아가고자 합니다. 이 바다에서 괴로운 사람의 고통은 ‘그신듯이’ 가라앉을 것입니다. 명상의 치유적 기능을 잘 보여주는 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 시 가운데 몇몇 시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흐르는 달의 흰 물결을 밀쳐

여읜 나무 그림자를 밟으며

북망산을 향한 발걸음은 무거웁고

고독을 반려한 마음은 슬프기도 하다.

 

누가 있어만 싶은 묘지엔 아무도 없고,

정적만이 군데군데 흰 물결에 젖었다.

-「달밤」(1937)

 

가츨가츨한 머리칼은 오막살이 처마끝,

쉬파람에 콧마루가 서운한 양 간질키오.

 

들창 같은 눈은 가볍게 닫혀

이 밤에 연정은 어둠처럼 골골이 스며드오.

-「명상」(1937)

 

괴로운 사람아 괴로운 사람아

옷자락 물결 속에서도

가슴 속 깊이 돌돌 샘물이 흘러

이 밤을 더불어 말할 이 없도다.

거리의 소음과 노래부를 수 없도다.

그신 듯이 냇가에 앉았으니

사랑과 일을 거리에 맡기고

가만히 가만히

바다로 가자,

바다로 가자,

-「산골 물」(1939)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 봅니다.

 

우물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자화상」(1939)

 

달밤에 북망산의 묘지까지 걸어가서 고독과 정적을 즐겼던 사람, 조용히 앉아 눈을 감고 바람이 콧마루를 간질이는 것을 느끼며, 자신의 마음속에 연정이 스며드는 것을 지켜보던 사람, 거리의 소음을 벗어나기 위해 산골의 냇가에 홀로 앉아 가슴 속에 흐르는 샘물 소리를 들으며 자신의 괴로움을 그치게 하던 사람, 달밤에 산모퉁이를 돌아 외딴 우물에서 홀로 자신의 모습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사람이 윤동주였습니다.

명상을 모티프로 한 이와 같은 시들은 명상시라고 부를 수 있는데, 이들 명상시 가운데 「자화상」은 윤동주가 걷기명상을 즐겼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시입니다. 「자화상」의 1연에는 외딴 우물을 찾아가는 산책의 모티프와 그 우물을 들여다보는 명상의 모티프가 나타납니다. 윤동주가 시를 구상하는 방법이나 사물을 인식하는 방법이 관조나 명상에 기초해 있으며, 그를 통해 자기를 성찰할 뿐만 아니라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데까지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시가 「자화상」입니다.

「자화상」의 3연에는 시적 자아가 쉽게 자기 통합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현재의 자기와 마땅히 되어야 하는 자기 사이의 갈등 때문에 가만히 들여다보는 명상의 행위가 중단되다 이어집니다. 2연에 나타나는 달, 구름, 하늘, 바람, 가을과 같은 자연은 존재와 가치 사이의 분열이 없기 때문에 시적 자아는 자연과의 합일을 통해 존재의 빛을 통찰하게 됩니다. 인간은 자연과 달리 이상과 현실, 가치와 존재 사이에 거리가 있기 때문에 현실 그대로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경우 존재의 비밀은 이상과 현실의 거리만큼 감춰집니다. 시적 자아는 당위적인 가치에 도달하지 못한 사나이(현실적 자아)에게 부정적 감정인 미움을 품게 됩니다. 이 미움의 감정을 희망의 감정으로 전환시키는 것이 명상의 힘이고, 윤동주의 시가 지닌 구조적 특징일 것입니다.

윤동주의 시를 윤동주의 시답게 하는 것은 그러나 희망의 구조보다는 오히려 온 몸으로 고통을 받아들이는 그의 고통에 대한 감수성과 그 깊이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그의 시를 긴장되고 아름답게 합니다. 고통을 자기화하는 과정을 거쳐서 시적 자아는 사나이와 조화로운 관계를 이루게 됩니다.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다는 것은 시적 자아가 이미 현실적인 자아가 아니라 내면적인 성찰을 통해 지혜로운 자아로 변모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지혜로운 현실적인 자아와 달리 자연과 아무런 거리도 없이 조화롭게 공존할 수 있습니다. 윤동주의 시에 나타나는 명상에 따른 자기분석은 에리히 프롬이 지적한 것처럼 인간 내면의 갈등을 자각함으로써 인간의 자기해방을 확대시키는 치유적 기능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자화상」에는 이미 살펴본 것처럼 우물을 들여다보는 명상을 통해 이상적 자아와 현실적 자아의 갈등이 조화로운 관계로 변모되고 있습니다만, 윤동주가 생각하는 참된 자기는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별 헤는 밤」(1941)에서 볼 수 있듯이 현재의 ‘부끄러운 이름’을 넘어 그가 좋아하는 프랑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와 같은 시인이 되어 별처럼 빛나는 것이었습니다.

 

 

3. 천명과 일과 길

 

윤동주는 자신의 소명이 시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소명이란 신의 부르심이고 천직이고 직업으로 이해되기도 하는 말입니다.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 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 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

 

대학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러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쉽게 씌어진 시」(1942)

 

유교에서는 소명을 천명이란 말로 부릅니다. 기독교적 소명이 천명이란 유교적인 말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윤동주의 기독교는 유교적 기독교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한국에 전래된 초기 기독교는 유교와 융합된 것이었는데, 이와 같은 유교적 기독교의 모습을 윤동주의 시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윤동주는 자신의 소명이 시인이라고 믿었습니다만, 그 소명은 슬픈 것이었습니다. 어둠을 밝히기 위해서는 친구를 하나 둘 잃어버리고 혼자서 외롭게 살아가야 했기 때문입니다.

 

하얗게 눈이 덮이었고

전신주가 잉잉 울어

하나님 말씀이 들려 온다.

 

무슨 계시일까

 

빨리 봄이 오면

죄를 짓고

눈이

밝아

 

이브가 해산하는 수고를 다하면

 

무화과 잎사귀로 부끄런 데를 가리고

 

나는 이마에 땀을 흘려야겠다.

-또 태초의 아침(1941)

 

계시처럼 다가온 하나님의 말씀, 그것은 이마에 땀을 흘리는 일이었고, 그 일은 시를 쓰는 일이며, 죄를 짓고서라도 눈이 밝아져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그는 자신의 길을 당당하게 걸어가고자 합니다.

 

바람이 어디로부터 불어와

어디로 불려 가는 것일까,

 

바람이 부는데

내 괴로움에는 이유가 없다.

 

내 괴로움에는 이유가 없을까,

 

단 한 여자를 사랑한 일도 없다.

시대를 슬퍼한 일도 없다.

 

바람이 자꾸 부는데

내 발이 반석 위에 섰다.

 

강물이 자꾸 흐르는데

내 발이 언덕 위에 섰다.

-「바람이 불어」(1941)

 

반석과 언덕이 상징하는 것은 삶의 중심점이면서 목적지일 것입니다. 윤동주의 길은 그곳에 이르기까지 주변을 둘러보는 일 없이 꾸준히 걸어가야 하는 길입니다. 그것은 여자를 사랑할 수도 없고, 시대를 슬퍼할 겨를도 없이 걸어가야 하는 길이었습니다. 그런 삶은 당위성에 토대를 둔 삶이기 때문에 자신의 삶의 괴로움이 어디에서 오는지 그 이유를 찾기 어려운 것이지만 바람이 불 때면 자신의 삶의 괴로움이 새삼 다가오는 그러한 삶이었고, 다음 시에서 보듯이 무서운 것이기도 했습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서시」(1941)

 

거 나를 부르는 것이 누구요,

 

가랑잎 이파리 푸르러 나오는 그늘인데,

나 아직 여기 호흡이 남아 있소,

 

한 번도 손들어 보지 못한 나를

손들어 표할 하늘도 없는 나를

 

어디에 내 한 몸 둘 하늘이 있어

나를 부르는 것이오.

 

일을 마치고 내 죽는 날 아침에는

서럽지도 않은 가랑잎이 떨어질텐데.....

 

나를 부르지 마오.

-「무서운 시간」(1941)

 

나한테 주어진 길이란 바로 자신의 소명인 시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마에 땀을 흘리는 일은 다름 아닌 소명노동이며, 무서운 시간이란 그 소명을 불가능하게 하는 어떤 것입니다. 천명이란 개념에는 양심의 부름을 듣는 소명이란 뜻과 함께 우연적 비극, 외면적 자연성으로서의 운명의 뜻도 지니고 있습니다. 윤동주는 자신의 길을 걸어가야겠다고 다짐을 하면서도 또 한편 두려워했습니다. “나를 부르지 마오”라는 「무서운 시간」의 마지막 절규는 소명을 다하기 전에 자신의 죽음이 도둑처럼 올지도 모른다는 무서운 예감을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시인이란 천명의 길은 윤동주에게 너무 무거운 짐으로 다가왔기 때문에, 그는 때때로 시인의 삶과 다른 편안한 삶을 꿈꾸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바닷가 햇빛 바른 바위 위에

습한 간을 펴서 말리우자,

 

코카서스 산중에서 도망해 온 토끼처럼

둘러리를 빙빙 돌며 간을 지키자,

 

내가 오래 기르던 여읜 독수리야!

와서 뜯어먹어라, 시름없이

 

너는 살찌고

나는 여위어야지, 그러나

 

거북이야!

다시는 용궁의 유혹에 안 떨어진다.

 

프로메테우스 불쌍한 프로메테우스

불도적한 죄로 목에 맷돌을 달고

끝없이 침전하는 프로메테우스

-「간」(1941)

 

프로메테우스 신화와 별주부 설화가 하나로 결합될 수 있는 것은 간이라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간이 상징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윤동주의 연희전문학교 입학동기인 유영은 그들의 학창시절을 회상하는 가운데 손진태 교수의 강의를 듣고 감동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간」은 손진태 교수의 강의에서 그 소재를 얻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손진태의 『한국민족설화의 연구』라는 책을 보면, “우리 민간에 성행하는 별주부 설화는 고래 동양적으로 유명한 설화이며, 조선 기록상 최초의 것은 삼국사기 김유신전 상에 보이는 바이다”라고 하면서 김유신전 가운데 별주부 설화와 관련된 부분만을 인용해 놓고 있습니다. 김유신전 가운데 이 시의 주제와 관련이 있는 부분은 다음 구절이라 생각됩니다. “내 듣건대 위태함을 보고는 목숨을 바치고 어려운 일에 다다라서는 자기 몸을 잊는 것이 열사의 뜻이라고 한다.”

간의 시적 자아는 김유신과 같은 열사의 뜻과 달리, 혹은 「또 다른 고향」의 표현을 빌리자면 ‘지조 높은 개’와 달리 그 뜻을 잃고 용궁의 유혹에 떨어집니다. 1연의 ‘습한 간’이 바로 그것입니다. 2연은 배경이 바닷가에서 코카사스 산중으로 바뀝니다. 프로메테우스 신화에 나오지 않는 토끼를 끌어들인 것은 두 이야기를 하나의 시로 만들기 위한 장치라고 생각됩니다. 「간」이란 주제에 맞게 만들기 위해서 프로메테우스 신화를 창조적으로 변형시킨 것입니다. 3연의 독수리가 간을 뜯어먹는 이야기는 지조를 잃은 데서 오는 양심의 가책을 나타내기 위한 것입니다. 4연에 ‘너는 살찌고 나는 여위어야지’라는 말이 나옵니다. 윤동주가 자주 읽었던 것으로 알려진 앙드레 지드의 소설 『사슬에서 풀려난 프로메떼』 가운데 ‘그는 살찌고 나는 말라야만 한다’는 소제목이 있는 것으로 보아, 윤동주는 앙드레 지드의 소설에서도 「간」의 소재를 구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욕망을 긍정함으로써 양심의 가책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앙드레 지드의 소설과 달리 윤동주의 시는 욕망을 부정함으로써 양심의 가책으로부터 해방되고자 합니다. ‘다시는 용궁의 유혹에 안 떨어진다’가 바로 그것입니다. 6연은 시적 자아가 유혹에 떨어진 동기를 보여줍니다. 불을 인간에게 전해주기 위해 고난 받은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에게 불을 가져다주고 고통을 받는다는 점에서 등불을 밝혀 어둠을 내몰고자 하는 시인과 같은 운명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프로메테우스가 침전하듯이 시인도 침전합니다. 이것은 윤동주가 프로메테우스와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윤동주가 동일시하는 문화영웅으로 프로메테우스와 예수가 있으며, 사물로는 초가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어둠에 빛을 가져다주며, 자기희생을 통해 자기를 유지한다는 희생의 이중적 성격을 지니고 있으며, 죽음과 재생의 원형적 모티프를 지닌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습니다. 윤동주는 「십자가」라는 시에서 ‘괴로왔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라고 하여, 희생의 주제를 목이란 이미지를 통해 나타내고 있습니다. 프로메테우스의 경우에도 목에 맷돌을 다는 이미지가 나오는데, 이 목의 이미지는 윤동주가 이들 문화영웅처럼 인류에게 빛을 가져오기 위해 목숨을 바치고자 하는 막중한 사명감을 지녔기 때문에 나온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윤동주는 불과 침전의 이미지를 통해 프로메테우스와 자신을 동일시합니다. 용궁의 유혹을 거부하고 간을 지키겠다는 것은 천명을 따르고자 하는 시인의 의지와 결단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침전하는 고통을 가져다주지만 빛을 가져오기 위해서는 마땅히 치러야 할 고통입니다. 간을 지킨다는 것은 천명을 따르겠다는 것을 뜻합니다. 하늘이 명령한 시인의 길을 걷기 위해 목을 드리우고 침전하는 고통을 감수하고자 했던 의지의 인간이 바로 시인 윤동주였던 것입니다.

이 시에는 세 종류의 동물이 나옵니다. 천상의 독수리와 지상의 토끼와 수중의 거북입니다. 유혹에 떨어진 수중의 거북이 이드를 나타낸다면 천상의 독수리는 초자아의 양심을 상징하며 간을 지키는 토끼는 자아를 뜻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윤동주가 자신의 심리적 갈등을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이론을 빌어 구체화하고 있는 작품이 「간」이란 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윤동주는 시인의 사명을 따르고자 하면서도 그 어려움 때문에 천명과 어긋나는 삶을 꿈꾸기도 하였지만, 천명과 어긋난 삶은 지조 없는 삶이라 여겼습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자신의 삶이 유혹에 떨어졌다고 느꼈을 것이고, 자신의 주체가 분열되는 아픔을 겪기도 하였던 것입니다. 그것을 보여주는 또 다른 시로는 「또 다른 고향」과 「길」이 있습니다.

 

고향에 돌아온 날 밤에

내 백골이 따라와 한 방에 누웠다.

 

어둔 방은 우주로 통하고

하늘에선가 소리처럼 바람이 불어온다.

 

어둠 속에 곱게 풍화작용하는

백골을 들여다보며

눈물짓는 것이 내가 우는 것이냐

백골이 우는 것이냐

아름다운 혼이 우는 것이냐

 

지조 높은 개는

밤을 새워 어둠을 짓는다.

 

어둠을 짓는 개는

나를 쫓는 것일게다.

 

가자 가자

쫓기우는 사람처럼 가자

백골 몰래

아름다운 또 다른 고향에 가자.

-「또 다른 고향」(1941)

 

잃어버렸습니다.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에 나아갑니다.

 

돌과 돌과 돌이 끝없이 연달아

길은 돌담을 끼고 갑니다.

 

담은 쇠문을 굳게 닫아

길 위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습니다.

 

돌담을 더듬어 눈물짓다

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

 

풀 한 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은

담 저쪽에 내가 남아 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길」(1941)

 

자기의 사명을 버리거나 자기 삶의 의미를 발견할 수 없을 때, 그런 삶은 풀 한 포기 없는 길을 걷는 것과 같습니다. 이때 필요한 것이 잃은 것을 찾는 것입니다. 잃은 것을 찾는다는 표현은 잃어버린 인간의 본성을 찾아야 한다는 맹자의 수양론을 떠올리게 합니다. 윤동주는 명상을 통해 자기를 분석하고 자신의 본래의 삶을 회복하고자 합니다. 그 방법의 하나가 유혹 때문에 황폐해진 자신의 본성을 되찾는 것이라면, 또 다른 방법은 참회하면서 자신의 슬픈 운명을 수용하는 것입니다.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만 이십사 년 일 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 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 온다.

-「참회록」(1942)

 

녹이 낀 거울 속의 얼굴이 시인의 사명을 잊은 것이라면,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은 시인이란 슬픈 천명을 회복한 사람의 모습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윤동주의 거울은 명상의 거울이고 양심의 거울입니다. 「참회록」의 마지막 연은 그가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며, 이 시의 연장선에 있는 것이 앞에서 살펴본 「쉽게 씌어진 시」입니다.

 

 

4. 별처럼 빛나는 시인, 윤동주.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윤동주가 시를 창조하던 근본원리는 영감과 상상력이었고, 이 신비한 예술적 형상사유를 불러오기 위해 윤동주는 명상을 즐겼던 것입니다. 윤동주가 생각하던 시의 가치는 등불을 밝혀 어둠을 내모는 것이었고, 그런 시를 쓰기 위해서는 슬프고 고독한 삶을 운명처럼 받아들여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시인의 사명이 얼마나 컸던지 윤동주는 촛불처럼 스스로를 불태우며 프로메테우스처럼 침전하는 삶을 살았고, ‘단 한 여자를 사랑한 일도 없다’는 그의 말처럼 연애 한 번 하지 않고 자신의 삶을 오로지 시에 바쳤던 것입니다. 시는 윤동주의 종교였고, 그의 사원은 사랑의 전당이었습니다. 윤동주가 남긴 시의 등불은 식민지 시대를 넘어 그 어떤 시대의 어둠에도 빛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사랑의 등불인 것입니다. 슬픈 천명을 눈물과 위안으로 받아들였던 윤동주는 마침내 별처럼 빛나는 시인이 된 것입니다.

 

 출처 : 가을에서 겨울로 / 동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