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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태진의 詩로 읽는 세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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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가 내게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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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니까 그 나이였어… 시가 / 나를 찾아왔어. 몰라. 그게 어디서 왔는지 / 모르겠어. 겨울에서인지 강에서인지 / 언제 어떻게 왔는지 모르겠어 / 아냐, 그건 목소리가 아니었고, 말도 / 아니었으며, 침묵도 아니었어 / 하여간 어떤 길거리에서 나를 부르더군 / 밤의 가지에서 / 갑자기 다른 것들로부터 / 격렬한 불 속에서 불렀어 / ... - 파블로 네루다 '시'
에밀리 디킨슨은 시(詩)를 이렇게 말했다. ‘책을 읽다가 온몸이 싸늘해져 어떤 불로도 녹일 수 없게 되면, 그것은 시다. 머리끝이 곤두서는 것 같은 기분이 들면, 그것은 시다. 나는 오로지 그런 방법으로만 시를 알아본다. 다른 방법이 있으면 한번 말해보라.’
시와 담쌓고 사는 사람일지라도 무심코 접한 시에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놀라움 두려움 경이로움 슬픔 기쁨으로 가득 찬 세상 속으로 녹아든다. 어지럽던 심사가 차분해지고 답답하던 가슴이 시원해지고 찌들었던 머리가 맑아진다. 시는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과 그들이 겪는 마음의 기복을 나눠가짐으로써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 준다. 사람이 밉고 사는 게 힘들 때 생명과 희망으로 잠자는 영혼과 상상력을 일깨운다.
‘그러니까 그 나이였어… 시가/ 나를 찾아왔어. 몰라. 그게 어디서 왔는지/ 모르겠어. 겨울에서인지 강에서인지/ 언제 어떻게 왔는지 모르겠어/ 아냐, 그건 목소리가 아니었고, 말도/ 아니었으며, 침묵도 아니었어/ 하여간 어떤 길거리에서 나를 부르더군/ 밤의 가지에서/ 갑자기 다른 것들로부터/ 격렬한 불 속에서 불렀어/ ….’ - 파블로 네루다 ‘시’
네루다는 시나 시인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고 했다. 세상 만물이 갑자기 달리 보이기 시작하면 그것이 시라고 했다. 시는 모든 것에 의미가 있고 숨결이 있음을 깨닫는 일이다. 늘 그곳에 있던 것이 어느날 새롭게 보이는 일이다.
‘…바람에 흔들리다가/ 풀잎이며/ 나뭇잎이/ 조용히 제자리로 돌아선다/ 그것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이미 반은 시인이다’ - 임강빈‘시인’
‘마루 모리가 내게 준/ 양말/ 한 켤레/ 양치는 손으로/ 그녀가 직접 짠/ 토끼같이 부드러운/ 양말 두 짝/ 황혼의 빛과/ 양털로 엮은 듯한/ 주머니/ 두 개/ 그 속에/ 두 발을/ 슬며시 넣었다/ 놀라운 양말/ 내 발은/ 두 마리의 양털 물고기/ 황금 털이/ 나 있는/ 짙푸르고 기다란 상어 두 마리/ 두 마리의 커다란 검은 새/ 대포 두 대/ 천상의/ 양말이/ 내 발에 축복을 내렸다/ 그것이/ 너무나 아름다워/ 나는 처음으로/ 늙어빠진 소방수 같은/ 내 발이 미워졌다/ ….’ - - 파블로 네루다‘내 양말에게 바치는 송시(Ode to My Socks)’
네루다는 하찮은 양말 한 켤레에서 71행짜리 긴 시를 풀어냈다. 새 양말 한 켤레에 관해 곰곰이 생각하면서 양말이 주는 무구한 즐거움과 놀라움을 써내려 갔다. 네루다의 시는 일상의 아름다움과 경이로 가득하다. 그는 양말뿐 아니라 토마토, 옷, 양파, 수탉, 다리미, 우표첩, 소금에게도 송시를 바쳤다. 나이 쉰에 ‘일상적인 것에 대한 송시들(Odes to Common Things)’을 출간하기 시작했다. 그는 삶의 진정한 기쁨이 사소한 것들에서 온다는 것을 알았다. 시는 저 멀리 높이 있는 것도 거창한 것도 아니다.
두보(杜甫)도 모든 것을 시로 썼다. 이런 게 시가 되나 싶은 일상 잡사(雜事)들까지 무심코 넘기지 않고 감정을 옮겨 넣었다.
집에서 기르는 닭이 벌레를 잡아먹으니 벌레가 가엾다며 아내와 아이들이 닭을 팔아 치우기로 한다. 묶인 닭들이 요란하게 울어대자 두보가 뛰어나가 끈을 풀어주며 머슴을 꾸짖는다. 닭도 팔려가면 잡아먹히는 것을 모르느냐고. 두보는 생각에 잠긴다. 닭에게 잡혀먹는 벌레는 분명 불쌍하다. 벌레를 먹도록 타고난 닭도 불쌍하다. 이 모순은 생명 있는 것들의 생존에 본래 따르는 것이니 도저히 해결할 방법이 없다. 그의 ‘묶인 닭의 노래(縛鷄行)’다.
두보는 벼를 벤 뒤 이삭은 마을 아이들이 맘대로 줍게 하라고 이른다. 벼 훑는 도구를 놓을 땐 개미집을 부수지 않게 조심하라고 챙긴다. 겨울밤 불조심하라는 박자목(拍子木) 소리가 들려오면 얼마나 가엾은 처지에 놓인 아이가 저 딱딱이를 치고 있는 것일까 생각한다.
‘집 뜰 대추는 서쪽 이웃이 따가라고 놔두시게/ 먹을 것도 자식도 없는 아낙이라네(堂前撲棗任西隣 無食無兒一婦人) 그녀가 가난하지 않다면 어찌 이런 일 있으랴/ 두려워할 테니 더욱 친하게 대해 주시게(不爲困窮寧有此 祗緣恐懼轉須親) …성긴 울타리에 섶을 빽빽이 심는 건 지나친 일이네(使疏籬?甚眞) ….’ - 두보 ‘다시 오랑에게(又呈吳郞)’
두보가 기주에 살던 시절, 오랑이라는 먼 친척에게 집을 넘겨주고 이사가면서 남긴 시다. 가난한 이웃 과부가 두보 집 울타리에 난 개구멍으로 들어와 몰래 대추를 따가곤 했다. 두보는 울타리를 손보기는커녕 모르는 체 내버려뒀다. 그는 이사 오는 오랑이 사정을 몰라 그녀를 쫓을까 걱정하며 울타리를 그대로 두라고 당부한다. 이쯤이면 세상에 시 되지 않을 일이 없다.
‘막힌 하수도 뚫은 노임 4만원을 들고/ 영진설비 다녀오라는 아내의 심부름으로/ 두 번이나 길을 나섰다/ 자전거를 타고 삼거리를 지나는데 굵은 비가 내려/ 럭키슈퍼 앞에 섰다가 후두둑 비를 피하다가/ 그대로 앉아 병맥주를 마셨다/ 멀리 쑥국 쑥국 쑥국새처럼 비는 그치지 않고/ 나는 벌컥벌컥 술을 마셨다/ 다시 한번 자전거를 타고 영진설비에 가다가/ 화원 앞을 지나다가 문밖 동그마니 홀로 섰는/ 자스민 한 그루를 샀다/ 내 마음에 심은 향기 나는 나무 한 그루/ 마침내 영진설비 아저씨가 찾아오고/ 거친 몇 마디가 아내 앞에 쏟아지고/ 아내는 돌아서 나를 돌아보았다/ 그냥 나는 웃었고 아내의 손을 잡고 섰는/ 아이의 고운 눈썹을 보았다/ 어느 한쪽/ 아직 뚫지 못한 그 무엇이 있기에/ 오늘도 숲속 깊은 곳에서 쑥국새는 울고 비는 내리고/ 홀로 향기 잃은 나무 한 그루 문밖에 섰나/ 아내는 설거지를 하고 아이는 숙제를 하고/ 내겐 아직 멀고 먼/ 영진설비 돈 갖다주기.’ - 박철 ‘영진설비 돈 갖다주기’
시인이 늘어놓는 얘기는 뭐 대단한 게 아니다. 아내에게 4만원을 받아들고 외상값 갚으러 가는 짧은 동네 길에 시인은 두 번이나 일을 저지른다. 그 돈으로 맥주를 사 마시고 자스민을 사버린다. 그런데 시인이 하는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입가에 절로 미소가 솟고 괜히 가슴이 훈훈해진다.
요즘 조선일보에선 아침마다 시가 사람들 눈높이로 내려앉아 친근하게 말을 건다. 새해 첫날부터 조선일보에 하루 한 편씩 실리고 있는 시들이다. ‘현대시 100년’을 맞아 시인 100명이 추천해 고른 명시 100편이다. 독자들 반응은 뜨겁다. 정성껏 오려 스크랩하고 온 가족이 함께 읽는다는 집이 적지 않다. 아침마다 한 편의 좋은 시를 읽으며 따뜻해진 가슴, 맑아진 머리로 하루를 시작하게 해줘서 고맙다는 이들도 많다.
‘시 한 편에 삼만원이면/ 너무 박하다 싶다가도/ 쌀이 두 말인데 생각하면/ 금방 마음이 따뜻한 밥이 되네// 시집 한 권에 삼천원이면/ 든 공에 비해 헐하다 싶다가도/ 국밥이 한 그릇인데/ 내 시집이 국밥 한 그릇만큼/ 사람들 가슴을 따뜻하게 덥혀줄 수 있을까// 시집 한 권 팔리면/ 내게 삼백원이 돌아온다/ 박리다 싶다가도/ 굵은 소금 한 됫박인데 생각하면/ 푸른 바다처럼 상할 마음 하나 없네.’ - 함민복 ‘긍정적인 밥’
시는 값이 참 쌀지 모르지만 쌀 두 말, 국밥 한 그릇, 소금 한 됫박처럼 사람들 삶의 허기를 채워 주는 정신의 풍요로운 양식이다. 독자들이 한 편의 시를 읽으며 마음속에 작은 소용돌이가 일고 인생과 일상을 다시 한번 생각했다면 그것만으로도 시는 위대한 일을 하고 있다.
weekly.chosun.com 위클리조선,2008.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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