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시의 10 봉우리] - 정진명 시인
1.시와 정신
이때 돌아보는 나의 몸을 떠받치고 있는 산봉우리의 정점은 시인의 정신이다. 그러고 보니 정신은 산을 닮았다. 시의 상상력에는 높낮이가 없다. 산에서 제 각기 색깔을 내는 단풍들처럼 자기 자리에서 빛을 내면서 아롱진 무늬를 보여주는 것이 상상력이다. 그러나 정신에는 높이가 있다. 쉽게 가늠하기 어려운 그 어떤 높이가 각기 있다. 높은 정신이 장대한 상상력을 만날 때 우리는 오르기 즐거운 한 거대한 봉우리를 본다. 시집을, 혹은 시인을 산으로 본다면 우리나라에는 정말 많은 산이 있다. 실제 우리나라 땅의 7할이 산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우리나라의 시인들이 쓴 시집은 이루 다 헬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러니 그 만큼 많은 산들이 여기저기서 솟아있는 것이다.
시집이 산이라면 비슷비슷한 군락을 이룬 시집들의 행렬은 산줄기일 것이다. 실제로 시들은 시대에 따라서 상황에 따라서 서로 닮는 측면이 많기 때문에 줄기줄기 이어지는 산줄기로 표현해도 그리 어리석은 일은 아닐 것이다. 이런 유추에 힘입어 한국의 근대시를 굳이 비유한다면 백두대간을 닮지 않았나 싶다. 해방 전후의 시기와 그 이후의 시기에 쓰여진 시들을 보면 이런 생각을 더욱 절실하게 한다. 해방 후의 시들이 보여주는 높이는 해방 전의 시들이 보여주는 높이를 따라가지 못한다. 어떻게 보면 해방 전의 시기는 자유시가 막 실험을 시작하던 시기이기 때문에 형식 면에서도 내용 면에서도 불안정한 시기이다. 그리고 실제로 많은 시들이 그런 불안정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최초의 자유시라는 수식어가 붙는 주요한의 경우에도 결국은 새로운 틀을 보여주지 못한 채 <최초>라는 엉거주춤한 수식어만 받고서는 끝내 피어나지 못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근대시 초기의 3∼40년 동안, 그 후에 나타날 모든 시의 원형이 완벽에 가깝게 실험되어 어떤 전형을 만들어버렸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그 후에 계속 본받도록 배운 정지용, 김소월, 한용운, 이상, 이육사, 김기림, 백석, 이용악 같은 시인들이 나타나서 자유시라는 이름의 틀을 주물 지어버렸다. 그리고 시대의 탓이지만, 해방 후에는 남북 양쪽에서 불구의 모습으로 시의 역사가 진행되다가 1980년대의 노동문학을 거치면서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는 변화를 보이고 있다. 이런 흐름을 보면 꼭 백두대간을 닮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백두대간은 조선후기의 이른바 '실학자'들이 설정한 지리개념이다. 한민족의 지리를 한반도로 지형을 확정지은 다음 그것을 전제로 설정한 개념이다. 그래서 백두산 천지에서 시작하여 반도의 오른쪽을 따라 높은 봉우리들을 연결하고 태백산을 거쳐 지리산에 이르면서 국토의 뼈대를 이루었다는 발상이다. 모든 줄기는 여기서 가지치면서 벌판을 지나 바다까지 달려간다. 그러니까 출발점인 백두산 천지와 그 아래쪽에 펼쳐진 해발 1000미터 이상의 고원지대가 해방 전후의 시기에 해당하는 셈이다. 이미 이 고원지대에서 우리가 본받아야 할 어떤 정신의 형식은 거의 완성됐다. 이 시기에 시를 쓴 시인들의 정신이 너무 높아서 그 후의 시인들이 따라가기 어려운 상황이 돼버렸다.
그리고 해방 후에는 그러한 정신이 분화되면서 어느 한쪽으로 몰리는 경향을 띠었다. 그리고 분단 정국이라는 분위기를 타고 기우뚱한 사상의 편향에 말려들면서 시는 쇠퇴 일로를 걸어왔다. 아마도 이것이 추가령 지구대가 지나가면서 만든 낮은 산들의 지역이 아닐까 한다. 그리고 1980년대의 노동문학을 기점으로 산들이 다시 높아지기 시작해서 이제는 상상력의 백가쟁명 시대를 열기에 이르렀다. 좋게 말해 백가쟁명이지 한 마디로 어지럽다. 그렇다면 지리산은커녕 태백산 언저리에나 와있는지 어쩐지도 모를 일이다. 분명한 것은 백두대간의 가장 큰 축인 지리산에 이르려면 멀어도 한참을 멀었다는 것이다. 나아가 고매한 정신이 바라보는 태평양으로 뻗은 무한한 세계를 향하여 나아가는 것은 아직 꿈도 못 꾸고 있는 것이 200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바라보는 시의 지형도이다.
결국 상상력이 넓이라면 정신은 높이인데, 산의 높이를 결정하는 것은 정신이다. 그런데 정신은 가만히 죽어있는 것이 아니라 흐른다. 그래서 정신은 시대의 한 복판을 흐르고, 그 흐름 위에서 가장 높은 파고를 만드는 것은 개인이다. 따라서 시대를 잘못 만난 시인이 자신의 능력을 초과하는 높이를 이룰 수는 없는 것이고, 이것은 우리가 딛고 있는 어떤 정신 문명의 현재 위치를 점검하지 않으면 애초부터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자각할 필요가 있다. 해방 전후의 시인들에게는 그 이전부터 흘러오던 유학이라는 도도한 정신의 관성이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은 사라져버린 이 유학의 관성 밖 어느 곳에서 그 도도한 흐름을 찾아낼 것인가 하는 것이 가장 절실한 문제이다. 그리고 이것은 이 시대의 모순을 묻는 물음과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이 요구하는 정신의 문제를 검토하는 일이 될 것이다. 결코 단순하지가 않다.
2.시의 열 봉우리
나는 지난 한 해 동안 시집 1000권을 읽었다. 말하자면 마음 단단히 먹고 등산을 한 것이다. 물론 아주 많은 봉우리가 그전에 올라가 본 곳이기는 했지만, 새로 올라본 느낌은 또한 숙고해볼 만한 것이었다. 이렇게 산을 오르면서 우리나라에도 만만치 않은 산들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일이 즐거웠고, 이 글은 그 중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 10개를 내 나름대로 뽑아서 간단히 정리, 소개해보자는 뜻으로 쓴다. 이런 정리만으로도 문학사를 조감하는 한 계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1)가락의 창조와 완성, 김소월
근대 이전에 시는 노래의 가사였다. 이것은 시가 가락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놓여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그전의 전통에 반발하면서 출발한 근대시가 자유라는 이름으로 제일 먼저 벗어 던진 것이 이 운율이었다. 그만큼 시에서 가락은 굉장한 관성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그런 까닭에 이른바 '자유시'라는 이름으로 시도된 근대시를 보면 여전히 운율의 강한 구속력을 확인할 수 있다. 김동환, 김동명을 비롯하여 1920년대, 30년대에 활동한 시인들의 시를 보면 정형률에 가까운 운율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근대시는 전통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이었으므로 일부러 운율에 매달린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이런 가운데 시의 가락을 오히려 더 강하게 실험한 시인들도 있다. 김소월과 김영랑의 경우가 그렇다. 그 중에서도 특히 김소월은 우리 문학사에서 전무후무한 위치에 오른 시인이다.유럽의 언어 같은 경우에는 액센트 언어이기 때문에 리듬이 발달하지 않을 수 없다. 중국어 역시 사성이 발달해서 운율이 말에 잘 살아있다. 그런데 그런 말과 달리 우리말은 음의 고저장단이 아주 불분명한 말이다. 이런 말에서 가락을 의식하고 조절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래서 그 방편으로 이용하는 것이 호흡의 길이이고, 그것은 음수율로 나타난다. 글자수의 개수에 따라서 리듬이 결정되는 방식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것들이 어떤 도식에 의존해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점을 김소월의 시는 아주 잘 보여준다.
김소월이 전무후무한 위치라고 하는 것은, 두 가지 점에서 그렇다. 그가 가락이 잘 살아있는 노래 시의 시대를 산 사람이라는 것과, 앞으로 오는 세대에는 김소월이 겪은 그런 가락을 겪을 수 없다는 점이 그것이다. 시대가 디지털 시대이기 때문에 앞으로 자라는 세대는 영상 이미지로 세계를 인식한다. 그러면 다른 감각이 후퇴하기 마련이다. 특히 청각은 점차 쇠퇴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시에서 김소월 같이 가락을 살려놓기 어렵다는 점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김소월은 그 이전의 가락을 그대로 반복한 것이 아니고, 근대시라는 한 형식의 실험기 속에서 한 정형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는 특징이 있다. 시가 버려야 할 근대의 속성 속에서 오히려 시가 가장 잘 살릴 수 있는 것이 가락이라는 것을 증명한 경우이다. 민요에는 2음보와 3음보가 기본을 이루면서 우리말의 가락을 형성하였다. 그런데 이 단조로운 가락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활용하여 그의 시에 적용시켰다. 우리에게 익숙한 '진달래꽃', '산유화' 같은 작품들을 보면 시에서 가락이 얼마나 잘 살아있는가 하는 것을 역력히 볼 수 있다. 따라서 옛날의 가락에 근거를 두면서도 그 가락을 시에서 살아있는 것으로 만든 희귀한 경우이다. 그래서 전통의 계승과 창조가 거의 동시에 이루어진 경우이다.
이 가락의 전통은 해방 후로 오면 거의 후퇴한다. 1960년대로 접어들면 가락이 시에서 현저히 쇠퇴한다. 김춘수는 가락 대신 시각 이미지를 이용하는 극단의 방향을 선택하여 나아가고, 김수영은 관념화된 세계로 나아가면서 전통 시에서 느껴지던 가락에 일대 혁신을 일으켰다. 어쩌면 가락을 무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경우일 것이다. 다른 시인들도 가락을 특별히 활용하려고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시에서 가락은 운명 같은 것이어서 그 후의 시인들에게서도 가락의 특징이 잘 살아나는 경우가 많다. 문병란, 박정만, 양성우, 정호승, 김용택, 곽재구 같은 시인들의 시에서 가락이 잘 살아나고 있다. 가락은 여전히 시에서 중요한 활력을 일으킬 수 있는 요소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형식이란 어찌 보면 공동사회의 조건이다. 혼자 있을 때라면 형식은 필요치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단 둘만 모여도 의사소통의 조건은 형식을 요구한다. 시의 가락 역시 그런 형식의 일종이다. 가락이란 사회성과 긴밀한 연관을 맺고 있다는 것이다. 시의 가락이 민중시, 노동시 계열의 시인들한테서 많이 그리고 우세하게 나타나는 것은 이런 특성과 관련이 없지 않음을 보여준다.
시각 이미지는 아주 고급스러운 속성을 지니고 있다. 선승과 선비들의 시가 고도의 절제된 시각 이미지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 역시 그런 속성의 한 측면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자신의 내면으로 파고드는 사람들의 시에서 시각 이미지가 우세하게 나타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시의 역사 전체를 운율 지향의 세계관과 시각 이미지 지향의 세계관으로 나누어 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어쨌거나 김소월은 이미 사라지는 시의 전통인 가락을 시에 아주 잘 살려서 운율의 한 모범을 보인 시인이고, 이 점 앞으로도 김소월을 뛰어넘을 만한 시인이 나오기 어렵다는 점에서 김소월은 우리 근대시의 초기에서 가장 우뚝 솟은 봉우리이다.
2)새로운 의식 실험의 선봉, 이상
이상의 시를 보면 당혹스럽다. 그 전에 이어진 시의 전통과는 너무나 다르기 때문이다. 물론 그 판이함은 그가 일본의 시를 구경한 데서 말미암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것을 나름대로 소화한 것을 보면 이상 역시 대단한 시인이라는 생각이 든다. 껍데기를 핥는 데에 그치지 않고 수박의 씨까지 뱉은 사람이다.
자유시가 그 전에 이어져온 전통으로부터 탈출하는 것에서 얻은 이름이었다면, 당시로서 이상은 가장 완벽한 자유시를 구가한 사람이다. 이전의 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가락인데, 읽는 이의 마음속에서 가락을 방해하려고 띄어쓰기를 무시한다거나 숫자나 부호를 끌어들인 것이 그런 경우이다. 김소월과는 등을 맞대고 걸어간 셈이다. 그러나 시의 형태만을 일그러뜨려서는 진정한 자유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은 이상 자신이 더 잘 알았을 것이다. 괴팍한 그의 삶은 그 한계에서만 설명될 수 있다. 그런데 그 정신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어서 이상은 그 정신의 문턱에 도달하기 전에 삶을 마감해버린 셈이다. 유학의 전통이 단절되고 그것을 대체할 만한 것이 이상이 살면서 가고자 했던 방향의 세상에서는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낯설게 하기>의 수법으로 주목을 받으려는 속셈을 가진 사람들이 극복해야 할 것은 바로 이상의 시가 남긴 정신의 영역임은 말할 것도 없다. 해방 후 그런 점을 시의 목표로 설정하고 가장 과감하게 밀고 나간 사람이 오규원이다. 그리고 그 후에 형식을 흔드는 시도를 한 사람들 역시 이상에게 빚을 지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1980년대의 황지우, 이성복, 박남철과 그 이후의 문명비판에 계보를 대고 있는 시인들이 그들이다. 그러니까 이들을 평가할 때는 이렇게 물어야 한다. 이상이 못 본 세상의 자유를 누리면서 과연 이상을 넘어섰는가?
3)정신의 절정에 서리는 무지개, 이육사
한시는 조선 지배층의 양식이다. 지배층은 나라를 통치하는 자들이고, 그들의 통치는 어떤 관념 위에서 존재한다. 그리고 그 관념은 이미 성리학이라는 절대 학문으로 조선을 짓눌렀다. 바로 그 무게에서 그의 시는 치솟는다. 한시는 이들의 생각과 감정을 표현한 도구로 수 천 년 동안 변함없이 그들의 정서를 담아낸 형식이었다. 이 경우 형식은 아주 정제되어서 감정의 지도 노릇도 한다. 지도란 현실마저 그렇게 바꾸는 힘이 있다. 한시의 경우가 그렇다.
따라서 이육사의 시에 서린 그 강렬한 느낌은 일제라는 시대 상황의 산물일 것이지만, 그 바탕에는 한시의 절제된 세계관이 짙게 드리웠다는 사실을 함께 보아야 한다. 강해야 한다는 믿음과 그 강함이 내면으로부터 밖으로 관철되어 일정한 형식을 드러내는 그 지점에 이육사의 시가 서린다. 강함은 시대와 사람의 산물이지만, 형식은 정신의 산물이다. 이 경우 정신은 바깥으로 투쟁의 동력이지만, 안으로는 단련의 힘이 된다. 그 내면의 단련이 바깥으로 형식을 요구한 것이 시이다.
4)언어와 의미의 정확한 아귀 물림, 박남수.
언어가 앞서나가는 경우는 현란하다. 의미를 될수록 감추고 상상력을 최대한 부풀려서 시의 공간을 확대하려는 시도 때문이다. 그 때문에 때로는 의미가 사라지기도 한다. 그러면 언어만 남는다. 언어만 남으면 윤리를 배우지 않은 청소년들이 어떤 게 불륜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듯이 상상력의 동종교배가 이루어져서 혼란으로 빠져든다. 다행히 그 혼란의 밑바닥에 무의식의 세계가 연결되어 있다면 인간의 심리를 연구하는 차원의 문학이 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어지러울 뿐이다.
의미가 앞서나가는 경우는 멀미난다. 언어가 희생당하기 때문이다. 무언가 전달하기 위해서 언어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전달하고자 하는 그것이 잘 전달되기만 하면 언어가 어떤 형태로 일그러지든 상관하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멀미가 난다. 언어가 제 자리에 정확히 자리잡지 못하고 횡설수설하기가 쉽다. 도구인 언어가 초래하는 부작용이다. 대부분 어떤 사상을 전달하려는 의도를 가진 시들이 그러하다. 1920년대의 카프 시나 1980년대의 노동시들이 그런 경향을 강하게 띤다.
그런데, 이 둘을 정확하게 양분하는 중간지점에서 이루어지는 시가 없을까? 즉 이미지가 의미를 끌고, 의미가 이미지를 밀어서 어느 한 쪽이 조금만 허물어지면 시 전체가 맥이 빠지는 그런 경우 말이다. 이 경우 언어는 이미지를 따라서 전개되고 언어의 이미지는 의미의 테두리 밖으로 무리하게 빠져나가지 않는다. 언어가 정해주는 테두리 안에서 의미가 살아 숨쉬고 의미가 가져가는 크기 안에서 이미지가 움직이는 것이다. 나는 박남수를 그런 경우라고 본다.
물론 박남수의 경우도 실험을 계속 했기 때문에 이미지가 너무 월등해서 의미가 희생당한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러나 그가 추구한 목표지점은, 중간에 드러난 실패작들에서 보이는 이런 경우가 아니라, 언어와 의미가 정확히 맞물려서 서로 부담을 주지 않는 그런 것이었다. 그것이 성공을 했느냐 못 했느냐 하는 것을 떠나서 그런 경계에 든 시인이 있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성공한 박남수의 시에서는 의미와 언어가 톱니바퀴처럼 정확하게 맞물린다. 그래서 언어가 의미를 꼭 그 만큼만 싣고 가면, 의미는 또 언어에 실려 자신의 뜻만큼만 빛을 낸다. 그렇기 때문에 전체 시가 드러내는 것은 그 둘의 교묘한 조화와 그 조화가 빚는 빛나는 언어들의 행진이다. 아귀가 꼭 맞아서 선후를 따질 수 없는 경우이다. 이 점을 처음으로 분명하게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박남수의 공은 어떤 시인보다도 우뚝하다.
5)민족 반역자가 노래한 신화의 세계, 서정주
서정주는 교과서 시인의 대표주자이다. 그렇기에 한국 현대시의 모순을 가장 잘 드러내는 시인이기도 하다. 시의 역사성을 논할 때마다 거론되는 그의 친일행각과 그 후의 묘한 행적 때문이다. 카아의 이론을 빌지 않더라도 역사는 어떤 시각을 전제로 한다. 그렇기 때문에 시에서까지 그런 시각으로 재단할 필요가 있는가 하는 회의론이 들 수도 있지만, 그런 회의론조차도 어떤 시각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변명의 여지는 사실 없다.
그런 점에서 서정주의 시를 평가할 때 반드시 그의 행적을 소개하는 것이 시인과 독자 양자에 대한 예의이다. 그의 친일 행적을 거론하지 않고서 시만을 감상한다는 것은 그의 시를 나 편한 대로 이해하겠다는 발상이다. 그건 수용미학으로 접근해볼 일이다. 그러나 그것만이 유일한 이론이 아니라면 독자는 모든 것을 알 권리가 있다. 이 권리를 무시하면서까지 서정주론을 쓴다면 그건 고약한 일이다.
서정주는 신화의 세계에 산 사람이다. 신화는 현실의 반영이지만, 현실과 일정한 거리를 둔다. 그래서 치열한 현장으로부터 이탈하기에 치열한 현장의 정서를 정확히 인식하지 못하는 곳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신화가 재미있다. 게다가 신화는 인간의 본성에 깃들어 있는 영역이기 때문에 울림 역시 깊다. 바로 이 점을 서정주 시에서는 놓쳐서는 안 된다.
그래서 나는 <질마재 신화>의 세계가 서정주 시의 가장 핵심 세계라고 본다. 물론 시만을 놓고 보면 그 이전의 시들이 오히려 긴장감 있고, 절실한 아름다움을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화사집>의 세계는 설익는 냄새가 나고 외국물도 흐른다. 그리고 <동천>과 <학이 울고 간 날들의 시>는 유장하지만 질마재에 도달하기 위한 중간 과정이다. 신라 어쩌구 하는 세계는 말장난이나 정신 장난의 흔적에 지나지 않는다. 세상을 들어올린 신화를 빼면 서정주의 시에 남는 것은 별로 없다. 현실로부터 신화로 상승하기 위한 몸부림이 그의 시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는 한국시의 신화가 되었다. 안타까운 일이다.
6)한국시가 쏘아 올린 자유의 불꽃, 김수영
영문학을 전공한, 그래서 삶에서도 시에서도 자유의 개념을 분명히 알았던 김수영은 바로 이 점을 자신의 시에 담는다. 그리고 그 성공 여부를 판단하기 전에 시를 마감했다. 그리고 그에 대한 판단은 지금껏 내려지지 않았다. 김수영의 시는 자유의 완성을 향해 나가는 어떤 정신의 움직임이었고 그의 문제 제기에 한국시가 답을 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움직임은 그대로 한국시의 유산이 되어 지속되었다. 7-80년대를 갈랐던 참여와 순수 양쪽에서 그의 후계자임을 자처한 것이 그런 징후이고, 그것은 그의 시가 완성이 아니라 과정에 있었음을 방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결국 김수영에게 빚지고 있는 이 양대 산맥이 한국시의 지형을 결정지은 것이라면 이후 한국시는 김수영으로부터 벗어나 한 걸음 더 나아가는 일이 시의 발전을 이루는 것이면서 동시에 그의 시를 완성하는 것임은 자명해진다. 한국시는 김수영으로부터 얼마나 벗어났는가? 이것은 시의 물음이면서 동시에 현실의 물음이다. 시는 현실이고, 김수영의 시는 현실이었기 때문이다.
7)뿌리뽑힌 자의 길, 신경림
이렇게 시의 행로 전체가 길과 맞물린 것까지는 좋은데, 그 원인이 자신의 방랑벽에 있지를 않고 사회의 변화에 있다는 점이다. 농촌이 붕괴되면 자연히 사람들은 도시로 몰리고 도시는 도시대로 농촌은 농촌대로 격심한 변동을 겪는다. 신경림의 시는 바로 그 점을 잘 잡아내고 있다.
농자천하지대본은 우리 사회의 수 천 년 약속이고 근거였다. 그런데 그 근거가 무너지는 지점이 근대이고, 그 근대의 한 복판에 시인이 서있으며, 그 붕괴의 완성은 1994년 우르과이라운드 타결이고, 현재는 그 지진의 여진이 남은 자들의 삶을 공포로 몰아넣고 있는 상태이다. 바로 이 변화를 그의 시는 잘 보여준다. 그의 시는 방법론에서도 분명하다. 철저하게 묘사 중심으로 시를 이끈다. 그래서 자칫 흥분하기 쉬운 내용도 냉정한 시각으로 돌아보면서 자신을 성찰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변혁 운동과 연계된 시들이 필요 이상의 목소리를 내면서 독자로 하여금 등을 돌리게 만든 것과는 달리 신경림의 시는 자신의 내면 성찰까지 연결시켜서 육화된 사상의 한 정점을 보여준다. 방법의 일관성은 지키기 대단히 어려운 일이고, 그것을 지킨다는 것은 큰 시인한테서 공통으로 발견되는 일이다. 그 방법 속에 무엇을 담느냐는 시인의 몫인데, 그는 자신의 선택에 충실한 경우이다.
8)노동해방의 진군나팔, 백무산
사회 운동의 일환으로 시를 파악할 때 시는 선전선동의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실제로 해방 전의 카프 시인들이 쓴 작품을 보면 카프 시의 대표라고 칭찬 받은 임화마저도 형편없는 시들을 써댔다. 이것은 시인들의 능력이 없는 것도 한 이유겠지만, 그들이 시에 대해서 갖고 있는 생각이 다른 시인들의 생각과는 달랐기 때문이다. 노동 투쟁의 현장에서 선동을 잘 하는 것이 시의 본 임무라고 보는 시인들에게 무슨 수사가 필요하고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하겠는가?
그러나 백무산의 시는 이런 단계를 넘어서 성숙한 노동자들의 정신을 대변할 수 있는 아름다운 모습까지 갖추었다. 목적이 있지만, 그 목적 때문에 의상을 상하지 않고 오히려 의상을 잘 차려입음으로써 그 목적마저 빛나게 하는 성취를 이룬 것이다. 노동 문학의 단계를 한층 끌어올린 그 정점에 백무산이 서있다. 노동 해방의 현장에서는 계속 같은 이야기의 시가 반복되겠지만, 백무산은 그런 이야기들의 정점에서 새로운 해방을 향해 나아가는 세력에게 희망을 노래하는 진군나팔의 한 전형을 보여준다.
9)죽음에 이르는 병을 앓은 시인, 기형도.
그런데 그런 문제점을 개인의 생활 속에서 가장 처절하고 철저하게 보여준 경우가 기형도이다. 기형도는 이 문명을 흉기로 파악한 듯하다. 그리고 그 흉기 앞에 스스로를 내맡겼다. 말하자면 난도질당하는 자신을 관찰하면서 그것을 시라는 양식으로 보여준 것이다. 이 점이 참 불사사의한 일이다. 한 인간이 삶에 대한 자신의 욕구와 본능을 포기하고 그런 자세로 세상을 살 수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그 만큼 그는 이 문명의 폐해 앞에 정면으로 서서 그것을 자신의 내면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거기서 끝났으면 좋았을 텐데, 이상하게도 욕망의 가장 강력한 의지인 '표현'을 했다. 자신을 죽음의 아가리 속으로 내던진 자가 이 점마저 포기하지 않은 것이 이상하다. 시에 나타난 상황을 보면 죽음에 대한 어떤 의지, 말하자면 그것을 드러내고 싶어하는 욕망 같은, 것들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이 역시 기형도한테서 느끼는 두 번째 불가사의이다.
그렇다고 죽음을 어떻게 해보자고 그런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런 가운데 그의 시에서 줄기차게 느끼는 정서는 외로움이다. 그것도 뼈저린 외로움. 그런데 외로우면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몸짓을 하기 마련인데, 그의 시에서는 별로 그런 기미가 느껴지지 않는다. 그냥 그 뼈저림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관찰하고 관조했던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의 시가 그리는 냉정한 묘사의 이면에는 그런 것이 엿보인다. 바로 이 점이 아무나 따를 수 없는 부분이다. 뼈저린 외로움이 아니면 도달할 수 없는 것. 그것이 삶이든 시간이든 현실이든 사상이든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 모든 것을 황폐한 쪽으로 몰고 가는 문명이 나를 에워싸고 있는 한 이 뼈저림은 사라지지 않는다. 소외는 이 문명의 구조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기형도 이후 한국시에서는 외로움을 말하지 말 일이다. 젊은 시인들로부터 시작되어 중견시인들까지 가세한 최근의 '곶감 빼먹기 파' 모두 합쳐봤자 기형도 높이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 그는 외로워서 죽은 사람이다. 죽은 척하는 자들하고는 근본부터가 다르다. 기형도 이후 새로운 시의 방향은 송찬호의 시에서 희미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송찬호는 지금 새로운 방향만 바라보며 그대로 멈추어있다.
10) ?
지금까지 아홉 명을 소개했다. 마지막으로 한 명을 더 결정하려고 할 때 언뜻 떠오른 시인은, 윤동주, 한용운, 백석 같은 옛 시인들 말고도 시삶일여(詩-一如)의 문정희, 해골빛 자기 관조의 최승호, 숙명의 그물을 드러내려는 송찬호, 밑바닥 훑기의 김신용 등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시에서는 무언가 2% 부족이 느껴진다는 생각을 끝내 거둘 수 없었다. 나머지 2%를 채울 때까지 기다려 볼 일이다. 게다가 나머지 한 명까지 결정해버린다면 스스로 우리나라의 최고라고 생각하던 많은 시인들이 실망할 것 같아서 마지막 한 칸은 비워두는 것이 좋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니 독자 여러분이 나머지 한 명을 채우기 바란다.
3.맺으며
시집 뒤에 붙어있는 해설을 읽다 보면 우리나라에서는 노벨 문학상 수상자가 해마다 나와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만큼 해설의 내용은 훌륭한 시인을 소개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정작 노벨 문학상은커녕 외국에 우리 시의 현황을 제대로 알릴 기회조차 없는 것이 엄연한 우리의 현실이다. 그런데도 해설에 훌륭한 시만 나타나는 것은 해설가의 능력이 너무 탁월한 까닭인가? 알 수 없는 일이다.
만약에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정실비평이 판을 치고 있다는 결론에 지나지 않는다. 장사도 잘 안 되고 읽을 사람도 별로 없는 판국에 좀 그럴 듯하게 설명한들 어쩌랴 싶은 생각도 들 수 있다는 동정론에 동정을 표하고 싶은 바가 없는 것은 아니나, 좀 더 길게 내다보면 그런 동정론과 정실비평이 결국 자신이 들어갈 무덤자리를 파는 짓이 된다는 것은 정신을 차려도 될똥말똥 한 디지털 시대 앞에서 단순한 기우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시가 현실을 직시하는 자리에서 출발하는 것이라면, 그리고 그곳으로부터 솟구친 정신이 이루는 우람한 산이라면 이런 동정론은 시인들에게 현실에 안주하도록 하는 달콤한 속삭임에 지나지 않는다. 속삭여주면 좋아하는 자들은 소인배들이다. 소인배들의 특징은 자신만을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칭찬을 좋아하는 것이고, 그들의 허영심에 맞장구를 쳐주는 자들이 있을 때 시는 가서는 안 될 길로 접어들게 된다. 그 결과는 그들만의 몰락이 아니라 전체의 몰락에 이른다는 점이 사람 사는 사회의 속성이다. 이 사실을 시인들만이 모를 까닭이 없다.
세상에 칭찬을 좋아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칭찬과 아첨을 구별하지 못하는 자에게 칭찬이란 복어의 맹독과도 같다. 복용한 모든 사람에게 골고루 독을 뿌려 감성의 싹을 말려버린다. 그러니 자신에게 돌아오는 쓰디쓴 말을 넉넉히 받아들여 자신의 시에 발전의 원동력으로 활용할 줄 아는 것이 진짜 시인의 태도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나라는 쓴 소리 비평이 너무 없다. 쓴 소리를 하면 그것을 인신공격으로 받아들이는 의식의 후진성이 그런 풍토를 만든 것이겠지만, 그렇다고 그 자리에 주저 물러앉는 것은 늪에다가 돗자리를 펴는 것과 같다. 자신에 대한 채찍만이 한국시의 구원이 될 것이고, 그것이 바닥 없는 질퍽한 현실로부터 저 고고한 정신의 산으로 솟구치는 유일한 방법이 될 것이다. 여기 10 봉우리처럼.
-사화집 <새로운 감성과 지성> 제2집(2005년)에서
'▒ 시의 향기 > 시론 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디카시(dica-poem) - 새로운 시 장르 (0) | 2008.01.30 |
---|---|
무의미 시란 무엇인가 ― 임보 (0) | 2008.01.29 |
우리는 왜 시를 사랑하는가-정호승 시인 (0) | 2008.01.22 |
시를 왜 쓰고 읽고 가르치나-김재홍교수 (0) | 2008.01.21 |
시인선서 - 김종해 시인 (0) | 2008.01.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