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시를 사랑하는가
우리들은 누구나 가슴에서 치솟아 오르는 시의 덩어리들을 하나씩 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남북의 정상이 만나는 순간 그 자체가 하나의 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정도의 감격이 있는 시를 우리가 평생 동안에 한편이라도 쓸 수 있다면 얼마나 큰 기쁨이겠습니까? 두 사람이 손을 맞잡은 것을 보면서 문득 몇 년 전 백두산 천지에 갔을 때 일이 떠올랐습니다. 저는 1989년경 중국 땅을 통해서 백두산 천지에 가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천지를 바라보면서 '아! 이 천지는 절대자가 쓴 시다'라는 생각이 저절로 우러났습니다. 남북의 두 정상이 만나면서, 북한이 우리들에게 준 어떤 감동과 같은 것이 가슴속에 자리잡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동화작가 정채봉 씨가 쓴 짧은 시가 있습니다. 그 역시 백두산 정상에 올라 천지를 본 다음 '이렇게 큰 산도 눈물샘을 가지고 있구나' 하고 노래했지요. '슬픔 없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부제는 백두산 천지에서)는 제목의 시인데, '이렇게 크고 웅대한 산도 가슴속에 눈물샘을 감추고 있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습니다' 하는 감동이 표출된 시입니다. 어느 긴 시보다도 정채봉의 짧은 시가 제 가슴을 울렸던 적도 있습니다. 우리는 백두산을 항상 민족의 상징으로만 생각하고 분단과 통일의 상징으로만 여겨 왔습니다. 시를 쓰는 제 경우에는 '절대자가 쓴 시'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가 '천지는 백두산이 흘린 눈물샘이다'라고 노래하자, 저도 모르게 가슴이 뭉클해졌던 것입니다. 이런 일들을 돌아보면 시의 소재는, 사실은 우리 일상 어디에나 널려 있는 것 같습니다.
인간에게는 육체만이 아닌 고귀한 영혼이 있다
인간은 육체만으로 존재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은 기계가 아니고, 인간에게는 가장 중요한 영혼의 부분이 있습니다. 인간을 한 그루의 나무라고 생각해 본다면, 나무가 살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합니까? 땅 속에서 뿌리를 통해서 수분과 영양분을 공급받아야 살 수 있지 않습니까? 그래야 인간이라는 나무가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인간이라는 나무의 수분과 영양분은 나무의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 나무의 육체일까요? 그 나무의 영혼일까요? 그 나무의 육체를 통한 영혼이겠지요. 그런데 그 인간이라는 나무가 실뿌리를 통해서 필요한 정보만을 빨아올린다고 한다면 그 나무는 과연 살 수 있을까요? 인간은 기계로서의 삶으로 존재하기보다는, 장차는 영혼으로서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지금 오늘의 삶에서 어느 부분에 중요한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인가? 저는 그것은 서정(抒情)의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조용필도 좋아하고 최진희씨도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조용필 씨의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부르면 그 가사 속에는 서정이 있습니다. 부산항이라는 항구도 있고 갈매기도 있고 동백섬도 있고 서정이 있습니다. 오늘날 십대들이 부르는 노래의 가사를 보면 서정이 거의 상실되어 가고 있습니다. 욕으로 이루어지는 노랫말의 시대입니다. 그것은 서정이 말살된 산문(散文)의 시대라는 뜻입니다.
제 견해로는 인간이 정보에만 매몰되지 않기 위해서는 서정성의 회복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서정성의 회복이 필요할 때에, 저로서는 시를 통한 서정성의 회복을 여러분에게 권하고 싶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어쩌면 산문의 시대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산문의 시대에도, 운문의 정신을 회복할 수 있는 삶을 살아야 되겠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건물의 벽돌이라는 고체화된 물질이 산문이죠. 담쟁이 넝쿨이라는 운문이 감싸고 어루만져 주고, 물을 공급하고 다시 생명의 피를 공급하는 것을 그렇게 느꼈습니다.
마찬가지로 여름날의 나무 한 그루가 서울에 없다고 생각해보면 우리는 살 수 없습니다. 이 뜨거운 여름에 서울 시내에 있는 한 그루의 나무가 바로 시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평소에 사람은 누구나 다 시인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 가운데 하나입니다. 사람의 가슴속에는 아름다움을 보고 아름답다고 느끼고자 하는 기본적인 정서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 기본적인 정서가 아름다운 것을 만나면 아름답다고 느끼는 서정을 갈구하는 마음의 바탕입니다.
저 자신도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어느 봄날 아침에 일어나서 냉수를 한 잔 마시러 가다가 창밖을 봤더니, 갑자기 눈이 막 내리고 있었습니다. 지금 눈이 내릴 철이 아닌데 웬 눈이지 하면서 다시 보니까, 창 밖에 백매화가 활짝 피어 있었습니다. 분부시게 하얀 백매화를 보고, 하얀 눈으로 착각했던 거지요. 말을 못하고 입만 탁 벌리고 있어야 했습니다. '아! 내가 저 백매화가 핀 것을 보고 봄눈이 내렸다고 생각했구나. 역시 인간은 형편없는 존재야.' 하는 탄식이 마음속에서 저절로 우러나왔습니다.
아름다운 것을 보고 아름답다고 느끼는 마음 그 자체가 바로 시인의 마음입니다. 그렇게 느끼는 것은 우리 인간의 마음속에 시가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단지 그 시를 발견하지 못할 따름입니다. 자기 자신을 기계화된 인간, 산문화된 인간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시가 가득 들어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누르기만 하면 시가 나올 것입니다. 물이 가득 들어 있는 통에 구멍을 내고, 약간의 자극만 주어도 물이 쫙 나오듯이 말입니다. 우리의 온몸이 시로 가득 차 있는데, 여러분들은 자극을 주지 않고 그냥 눈과 마음을 통해서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망만 생각하기 때문에, 시심이 솟지 않는 겁니다. 그러나 여러분 가슴속에 가득 차 있는 시를 한번 자극해 보십시오. 그러면 한없이 많은 시들이 나올 것입니다. 시를 발견하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가슴속에 있는 시를 끄집어낼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가슴속의 시를 끄집어내는 능력 있어야
제 경우를 예로 들겠습니다. 어느 날 퇴근을 해서 집에 갔더니 제 처가 시장에서 무지개떡을 사왔습니다. 무지개떡을 보니까 '아! 무지개떡 옛날에 엄마가 많이 사주셨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먹으면서 '무지개떡 참 맛있다. 마누라가 사주니까 더 맛있다. 잘 먹었어.' 하고 말면 그 속에는 시가 없다는 거죠. 무지개떡 속에는 무엇이 들어 있습니까? 무지개가 들어 있지요. 무지개떡을 먹을 때는 무엇을 먹었습니까? 저는 무지개를 먹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제가 짧은 시를 하나 썼습니다.
엄마가 사오신 무지개떡을 먹었다
떡은 먹고 무지개는 남겨 놓았다
북한산에 무지개가 걸렸다
마누라가 사온 무지개떡을 먹었다고 하면 재미가 없는데, '엄마가 사온 무지개떡을 먹었다'라고 표현한 데 시의 비밀이 있습니다. 시적 화자가 소년의 마음이 된 거죠. 떡은 먹고 무지개를 남겨놓을 수 있는 마음, 그 마음이 내 마음속에 있는 시를 그냥 자연스럽게 밖으로 내보낸 거죠. 제가 무지개떡을 먹으면서 시를 발견한 겁니다.
여러분들의 마음의 눈 속에도 시를 발견할 수 있는 눈이 다 있는데, 스스로 가지고 있는 마음의 눈을 활용하지 않기 때문에 시를 발견하지 못한 채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어린 왕자'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마음의 눈으로 보는 거지, 눈에 보이는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니다." 즉 마음의 눈으로 보는 것이 가장 소중하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마음의 눈을 가진 때에는, 모든 사물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것입니다. 무지개떡이니까 분명히 그 속에는 무지개가 있듯이….
얼마 전에 '종이학'이라는 시를 썼습니다. 종이학은 저의 큰 아이가 군에 입대를 하게 된 것을 계기로 씌어졌습니다. 녀석은 군에 입대하기 전날 술에 취해서 제 방에 천 마리의 종이학이 담긴 커다란 유리 항아리를 가지고 들어왔습니다. 그러면서 "아빠, 제가 제대할 때까지 이걸 잘 좀 보관해 주세요." 하고 말했습니다. 저는 아이에게 대답했습니다. "걱정하지 말아라. 내가 이 종이학을 제대하는 그날까지 한 마리도 죽이지 않고 잘 보관했다가 너한테 돌려주겠다." 그런데 녀석이 입대한 후 천 마리의 종이학이 유리 항아리 속에서 사는 모습을 보니까 너무너무 불쌍해 보였습니다. 아! 저 종이학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갑갑한 항아리 속을 뛰쳐나가서 저 푸른 하늘 속으로 날아가고 싶을 텐데…. 종이학은 비상의 꿈을 끊임없이 꾸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아들이 잘 간직하라는 말만 듣고, 명색이 시인인 아버지가 종이학들을 날려보내지도 않고 있다는 것은 시인으로서의 직무를 방기(放棄)하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유리 항아리를 들고 옥상으로 올라가서 종이학을 날려 보낼까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시인으로서 가장 치졸한 방법이었습니다. 아주 물리적인 방법이라는 거지요. 마지막으로 시인이 종이학들을 날려 보내는 방법으로 택한 것은 시였습니다.
시를 썼는데 어떻게 하면 종이학이 날아갈까요? 시인이 종이학이 날아간다고 하면 날아가는 거에요. 시인이 꽃이 웃는다고 하면 꽃이 활짝 웃는 거에요. 꽃이 핀 것을 보고 시인이 '꽃이 운다. 한 방울 두 방울 눈물을 떨군다.' 하면 꽃이 눈물을 흘리는 겁니다. 그것은 시인의 힘입니다. 그래서 내가 '종이학이 날아간다'고 썼더니 종이학들이 막 날아갔습니다. 유리 항아리를 뛰쳐나와서 날아가는 것이 보였습니다. 이왕이면 멀리 날려 보냈으면 해서, '관악산을 넘어서' 하고 생각하다가 너무 가까운 것 같아서, '지리산으로 날아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종이학이 날아간다. 지리산으로 날아간다'라고 썼습니다. 그러자 지리산을 향해서 날개에 힘을 싣고 천마리나 되는 종이학이 날아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걱정이 되었습니다. 비가 오면 어떡하지? 종이학이 날아가는데 갑자기 폭우가 쏟아지면 어떻게 됩니까? 종이학이 다 젖어서 떨어져서 죽을 것 아닙니까? 종이학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하고 생각했는데 간단하다고 생각했어요. '비가 오면 종이는 슬쩍 남겨두고 날아간다.' 라고 쓴 거죠. 그러자 비가 와도 아무런 걱정이 없어졌습니다. 그렇게 해서 저는 좁은 항아리 속에 갇혀 있던 종이학 천 마리를 날려보냈습니다.
당신은 시를 쓰는 사람이니까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느냐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큰 오산입니다. 여러분들과 제 가슴속에는 누구에게나 시가 가득 들어 있습니다 그 가득 들어 있는 시를 발견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것을 발견하는 가장 쉬운 방법으로 제가 무지개떡과 종이학을 빌어 말씀드렸습니다.
제 친구의 이야기입니다. 아이가 초등학교 1, 2학년 때 저녁 시간이 되었는데 골목에서 '고등어 사려. 금방 바다에서 가져온 싱싱한 고등어 사려!' 하는 소리가 들리더랍니다. 저녁에 고등어나 좀 지질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고등어를 사러 나갔는데, 자기 아들이 골목 쪽 창문을 열고 내다보더니, 고등어 장사 아저씨한테 "아저씨, 고등어 얼굴 예쁜 걸로 주세요." 하고 말하더랍니다. 그 말을 들은 제 친구가 깜짝 놀랐습니다. 그는 고등어의 얼굴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자기 아들이 "얼굴이 예쁜 고등어로 달라."고 말하는 걸 들으면서, 친구는 너무너무 감동을 받아서 이 아이를 낳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답니다. 친구는 자기 아들의 말 한마디가 바로 시라고 했습니다. 금방 양념이 발라지거나 해서 죽어버릴 고등어이지만, 소년의 마음속에서 이왕이면 예쁜 얼굴인 걸로 달라고 하는 마음이 바로 시의 마음입니다.
어느 봄날 여수까지 가는 기차를 타고 여수역에 내렸습니다. 역에 내린 순간 '아니 왜 기차가 여수역에서 더 가지 않고 멈추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 생각에는 여수역에서 기차가 멈추지 않고 여수 앞바다에서 오동도로 한 바퀴 휙 돌고 저쪽 바다로 기차가 계속 가면 될 텐데 왜 여기서 멈추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제 머리 속에서는 기차가 여수역에 멈추지 않고 그대로 바다속으로 달리는 장면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속에 탄 승객들이 기분이 좋아서 창문을 열고 갈매기들과 손짓도 하고 바다 속으로도 기차가 은하철도 999처럼 들어갔다 나왔다 하고 물고기들도 함께 타고….
기차를 타고 수평선 위를 달리는 기차를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현실 속의 기차는 부산역이나 목포역이나 여수역에서 더 이상 앞으로 달리지 못하지만, 우리 마음속의 시는 그 기차를 얼마든지 수평선 위로 달리게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다 내리고 빈 기차가 달리면, 바다 속에 있는 물고기들이 전부 자기들이 승객이 되어 차창에 기대어 애인 물고기들끼리 서로 손을 잡고 서로 사랑하는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지 않을까요. 저는 그런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그런 생각이 바로 시입니다. 우리 가운데 있는, 시를 표현하는 마음인 것입니다.
바꾸어서 말하면, 인간의 눈으로만 사물을 바라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있는 시를 어떻게 하면 잘 끄집어 낼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보다 자극을 주어서 끄집어 낼 수 있을까요. 그 가장 좋은 방법은 눈이 아닌 인간의 마음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또는 어떤 현상만을 바라보지 말라는 말씀을 여러분들한테 드리고 싶습니다. 시계가 있다고 하면, 이 시계의 마음으로 인간을 바라보면은 인간의 모습이 달라지고 시계의 모습이 달라지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안도현이 쓴 「연탄재」라는 짧은 시가 있습니다. 아마 이런 내용이었을 겁니다.
'연탄재를 함부로 차지 말아라.
당신은 언제 이 연탄재만큼
뜨겁게 누구를 사랑해 봤느냐?'
그런데 이 시에 감동이 있습니다. 이 시는 어떻게 쓰여졌을까요? 인간의 눈으로 연탄재를 바라보고 썼을까요? 아닙니다. 연탄재의 눈으로 연탄재의 마음으로 쓴 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연탄재가 뜨겁게 누구를 사랑했다'고 쓴 겁니다. 항상 우리는 인간의 눈으로만 사물을 바라보지 말고 사물의 마음이 되어서 인간을 바라보는 그런 마음을 가질 때 우리 마음속에 가득 들어있는 시는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고 또 쓸 수 있을 것입니다. 시는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단지 우리가 발견하지 못했을 따름이지요.
시는 은유의 세계입니다. 시는 은유의 방법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기본입니다. 은유는 시의 본질입니다. 은유를 이해해야만 시가 쉬워집니다. 먼저 국어사전에서 은유를 찾아보면 '비유법의 하나다. 예를 들면 그 사람은 전봇대다라고 표현하는 것이다.'라고 씌어 있습니다. 키가 큰 것을 전봇대로 비유한 것이 바로 은유입니다.
백마디의 말보다 한 송이 장미가
한번은 신사역에서 지하철을 타려고 가다가 어떤 젊은 남녀를 보았습니다. 여학생이 개찰구 표를 넣은 다음 남학생을 쳐다보면서 계단을 내려가려고 하는데, 남학생이 "선영아!" 하고 불렀어요. 그러자 여학생은 "서로 인사해놓고 왜 불러?" 하고 말했습니다. 그러다 그녀는 남학생 쪽으로 갔습니다. 이윽고 그 남학생은 감추어 놓았던 한 송이의 장미꽃을 내밀었습니다. 아무 말 없이 눈만 쳐다보면서 주었더니, 갑자기 선영이의 얼굴에 웃음꽃이 막 피어나면서 아무 말 없이 장미꽃을 받아든 채 계단을 내려갔습니다. 남학생은 기분이 좋은지 입이 벌어지는 게 보였습니다. 남자가 선영이한테 장미꽃을 전했다는 건 무엇을 의미할까요. "나는 너를 사랑해."라고 말했을 때와 말 없이 장미꽃을 건네줬을 때와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말을 했을 때는 산문의 세계고 말없이 장미꽃을 건네줬을 때는 운문의 세계, 즉 시의 세계입니다. 그 장미꽃을 건네주는 행위 자체는 은유(隱喩)입니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라는 것에 대한 은유죠. 그리고 그 장미는 하나의 은유물입니다. 그런 은유의 행위를 여러분들의 일상 속에서 누구나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은유의 세계이고 시의 바탕이 되는 세계입니다.
건물을 뒤덮고 있는 담쟁이와 같은 것이 시입니다. 여름날에 쏟아지는 소나기가 바로 시입니다. 만일 바다가 보이는 곳에 창이 하나도 없는 곳에 있으면서, 바닷가에 있는 건 무의미합니다. 우리가 바닷가에 있을 때, 바다를 바라볼 수 있게 해주는 창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시입니다.
여러분 모두 마음의 눈으로 사물을 보십시오. 자신의 마음에 들어와 있는 사물이 말을 하게 할 때 시심은 무르익을 것입니다. 그리고 시의 꽃은 활짝 피어날 것입니다. /정호승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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