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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며 생각하며/말 . 우리말

우리말 훼손하는 문학작품들

by 골든모티브 2008. 6. 7.
우리말 훼손하는 문학작품들
 
  
1. 낱말뜻을 잘못 알아 저지른 실수
 
이윤기의 장편소설《나무 기도원》에는, "임금님이 신하를 손사래로 불렀다"는 표현이 나온다. 어림없는 소리다. '손사래'란 '어떤 말을 부인하거나 또는 조용히 할 것을 요구할 때 손을 펴 휘젓는 짓'이다. 그러니까 '손사래'로 사람을 부를 수는 없다. 부르기는커녕 오히려 오지 말라는 뜻으로나 쓰일 듯하다. 아무리 임금이라도 누구를 부를 때 쓰는 손동작이라면 좀 싱겁기는 해도 '손짓'밖에는 없다.
 
황석영의 대하소설《장길산》에는 "해가 뉘엿뉘엿 떠오른다"는 대목이 있다. 기가 찰 노릇이다. 세상에 '해가 뉘엿뉘엿 떠오르다'니! 설명하기 조차 새삼스럽다. '해가 곧 지려고 산이나 지평선너머로 조금씩 넘어가는 모양'이 '뉘엿뉘엿'이다.
 
신경숙은 그의 단편소설 <부석사>에다 "김장철을 앞둔 가을에는 무청이 반은 드러난 위로 새파란 무잎이 찰랑이고 있다"고 썼다. 그는 아마 '무의 잎과 줄기'를 이르는 '무청'을 왜무나 궁중무의 '땅 위에 드러난 무의 푸른 부분'쯤으로 알고 있는 모양이다. 딱한 노릇이다.
 
하성란의 단편소설 <기쁘다 구주 오셨네>에는 "(술 취한 그의) 후끈한 입김이 내 목덜미에 느껴졌다. 술 냄새와 군내가 났다"는 대목이 있다. 여기서는 '군내'가 잘못 쓰였다. '본래의 제 맛이 변하여 나는 좋지 아니한 냄새'가 '군내'다. "묵은 김치에서 군내가 난다"처럼 쓰인다. 술 취한 사람 입에서 웬 '군내'가 나겠는가? 거기서는 '술내'가 나거나, 좀 지독한 것으로는 '문뱃내'가 나야 제격이다. 술 취한 사람의 입에서 나는 역겨운 냄새가, 배처럼 생긴 '문배'의 냄새와 비슷하다고 해서 생긴 말이다.
 
김주영의 장편소설《홍어》에는 "생목이 턱턱 막히는 시루떡으로 허기진 배를 채운다"는 얘기가 나온다. 그런데 이는 '생목'의 뜻을 모르고 쓴 경우다. '생목'이란 '먹은 음식이 제대로 소화되지 않아 위에서 입으로 올라오는 음식물이나 위액'이다. 그러니까 어디까지나 음식물을 섭취한 이후의 생리현상이다. 따라서 "생목이 턱턱 막히는......"이 아니라, "목이 턱턱 메는 시루떡......"이거나 "먹은 시루떡 때문에 생목이 오르는......"이 되어야 옳은 표현이 된다.
 
이《홍어》에는 또 "옹알이를 하는 암탉"이라는 우스개 같은 표현도 나온다. 익히 아는 것처럼 '아직 말을 못하는 어린아이가 혼자 입속말처럼 자꾸 소리를 내는 짓'이 '옹알이'인데, 웬 암탉이 사람소리까지야 냈겠는가! '암탉이 알을 배기 위해 수탉을 부르는 소리'는 '골골'이고, 그러는 짓을 '골골거리다' 또는 '알겯다'고 한다.
 
2002년도 동인문학상 수상작《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의 작가 성석제는 그의 단편소설 <이인실(二人室)>에서 "농한 수박처럼 상처에 고름이 생겼다"고 표현했다. '농한 수박'. 얼핏 들으면 '푹 익어 흐무러진 수박'으로 들리지만 따져보면 전혀 말이 안 되는 소리다. '농하다'라는 말은 없다. 다만 접두사로서의 '농(濃)-'은 '익다' 앞에 와 '농익다'가 된다. 그래서 "농익은 수박처럼......"이 되어야 한다.
 
김형경의 장편소설《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에는 '해먹을 진 해녀의 사진'이야기가 나온다. '해먹'은 영어 'hammock'으로 '두 기둥 사이나 두 나무그늘 같은 곳에 가로질러 매달아 침상으로 쓰는 그물'이다. 그런데 이 '침상그물'을 왜 해녀가 짊어지고 사진을 찍었는지 모를 일이다. 그리고 사진으로 보아서 해녀가 지고 있는 그물이 '해먹'인지는 어떻게 분간할 수 있었는지도 의문이다. 단순하게 그냥 '그물'이라고만 했어도 이해해 줄 수 있었으리라. 해녀가 지고 있는 그물은 '해먹'이 아니라 '망사리'였을 것이다. '해녀가 바다에서 채취한 해물을 담아 두는 그물로 된 그릇'이 '망사리'다. 아울러(아마 그 사진 속에도 분명 있었을) '테왁'이라는 '해녀가 물 위에 뜨게 하거나 망사리를 고정시켜 주는 역할을 하는 물건'이 있는데 이는 제주도 방언이고 표준말은 '뜸'이다.
 
김영하의 장편소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에는 "현관문이 열리자 차가운 황소바람이 들어왔다"는 묘사가 있다. '황소바람'을 단순히 '세찬 바람'쯤으로 아는 모양인데 실은 그렇지 않다. '좁은 틈으로 세게 불어드는 바람'이 바로 '황소바람'이다. 그래서 '바늘구멍으로 황소바람 들어온다!'지 않던가! 그러니 '열린 현관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은 결코 '황소바람'일 수 없다.
 
2.사개 뒤틀리고, 서까래 내려앉은 문장들
 
이청준의 중편소설 《날개의 집》에는 "늘 하찮시하여 경계해 오던 법식(......)더 소중시해 온 법식......"이라는 대목이 나온다. 여기의 '하찮시'는 전혀 터무니없는 표현이다. '-시(視)'는 몇몇 명사 뒤에 붙어 '그렇게 여김' 또는 '그렇게 봄'의 뜻을 더하는 접미사다. '등한시', '백안시', '적대시'처럼 쓰이는데 예문의 '소중시'도 이와 같은 용법이다. 그러나 '하찮다'와 같은 형용사에다 갖다 댈 수는 도저히 없다.
 
① 나는 사타구니에 손을 넣고 모로 누워 웅크리고 자는 그의 모습을 볼 때, 채 물 내리는 것을 잊은 변기 속의, 천진하게 제 모양을 지니고 물에 잠겨 있는 똥을 볼 때 커다란. 늙어가는 그의 속에 변치 않은 모습으로 씨앗처럼 깊이 들어 있는 작은 그를, 똥을 누고 나서 자신이 눈 똥을 신기하고 이상해 하는 눈길로 물끄러미 바라보는 어린아이, 유년기의 가난의 흔적을 본다.
② 나는 그의 뒤로 있는, 사과나무들이 심겨진 비탈을 등지고 있는, 잡초들이 난립하고 있는 작은 마당이 딸린 그의 집을 쳐다보았다.
 
①은 오정희의 단편소설 <옛우물>에서, ②는 정영문의 단편소설 <내장이 꺼내진 개>에서 각각 따온 대목이다. 무슨 소리를 하려는 건지, 원! 답답하기만 하다.
 
김용택의 산문집《인생》에는 "모낸 논에 들어가 모춤을 나르고 (......)모를 찔 때 파랗게 한쪽으로 몰리던 어린 메뚜기들......"이라는 대목이 있어 읽는 이로 하여 어안이 벙벙하게 만든다. 글이란 적당히 얼버무려서는 결코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다. 한번 짚어보자.
 
'모낸 논에 들어가 모춤을 나른다'니. 그만 기절초풍할 대목이다. '모낸' 논에는 들어갈 필요도, 모춤을 나를 까닭도 없기 때문이다. 모춤을 나르는 곳은 '모낸 논'이 아니라 '무삶이한 논'이어야 한다. 또 '모를 찔 때 몰리던 어린 메뚜기'도 말이 안 된다. 모내기철에 메뚜기 본 사람 어디 나와 보라! 모르긴 해도 김용택 한 사람뿐이리―.
 
공지영의 단편소설 <인간에 대한 예의>에는 "차를 몰고 가다가 막 학교를 파한 초등학교 앞 횡단보도에 멈추어 설 때 와와 뛰어가는 아이들......"의 얘기가 나온다. 그런데 이 문장을 자세히 뜯어 보면, '막 학교를 파한'것은 아이들이 아니라 '초등학교'라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져 있다. 왜 이런 꼴이 되었을까? 이 문장을 바로잡으면 이렇게 된다.
"차를 몰고 가다가 초등학교 앞 횡단보도에 멈추어 설 때 막 학교를 파한 아이들이 와와 뛰어가는......"

이밖에도 "다이너마이트로 댐을 폭파시킨다"고 해야 할 것을 "댐 속에 들어가 다이너마이트를 폭파시킨다"고 한다든지, 또 "시멘트가 얇게 발라져 있다"를 "얇은 시멘트가 발라져 있다"고 하고, 심지어 "도서관에서 20여 년 전의 그의 공소자료들을 찾아낸 복사물이었다"와 같은, 도저히 종잡을 수 없는 표현들이 수두룩하다.
 
조정래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에는 "똥 한번 잘못 밟은 셈 치고......"라는 표현이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똥 잘못 밟다'라는 문장은 허용될 수가 없다. '똥 잘 밟다'가 말이 안 되는 경우와 같다. 똥은 근본적으로 '잘 밟고 잘못 밟고'가 없다. 일단 밟으면 '잘못된'것인 까닭이다.
 
최명희의 대하소설《혼불》에는 베 짜는 모습이 비교적 상세하게 그려져 있다. 그 중 한 대목에 "용두머리 위에 놓인 등잔불이 닭이 홰치는 소리에 놀라 까무러친다"는 내용이 있다. 그런데 '용두머리 위에 놓인 등잔불'이란 현실적으로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한마디로 베틀 구경도 못한 사람의 표현이다. 베틀의 구조를 알고, 또 베 짜는 모습을 한번이라도 본 사람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망발이다. 최소한 베를 짜고 있는 동안에는 용두머리 위에는 도저히 등잔을 올려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베틀신대를 당겼다 놓았다 할 때는 물론이려니와 바디를 칠 때에도 용두머리는 심하게 움직이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있다. 특히 도투마리를 뒤집을 때에는 베틀 전체가 요동을 치기 때문에 용두머리에 등잔을 올려놓기는커녕 대못을 박아 놓았어도 오래 견디기는 어렵지 싶다.(베틀부품의 이름도 '부티'를 '부테'로, '앉을깨'를 '앉칭널'로 하는 등 전라도 사투리를 버젓이 쓰고 있다.)
 
3. 방언·비표준어·조어(造語)의 난장판

이문구의 단편소설 <장이리 개암나무>에는 "학문이는 본래 부모를 타기지 않아 말수가 적다"는 대목이 있고, 복거일의 장편소설《마법성의 수호자, 나의 끼끗한 들깨》에는 "네가 엄마를 탁해서 그림솜씨가 좋다"는 표현이 나온다. '타기다' 또는 '탁하다'는 흔히 널리 쓰이는 말이지만 바른 말은 아니다. '닮다' 외에 다른 말이 없다. 그러나 '친탁(親-)', '외탁(外-)'이라는 말이 있는 걸 보면 '타기다', '탁하다'를 '터무니없는 사투리'로만 내몰아서는 안 되겠다는 객쩍은 생각도 든다. '성격이나 모습이 꼭 닮다'의 뜻인 '빼쏘다'가 '빼박다' 또는 '빼다 박다'로 잘못 쓰이는 경우를 흔히 본다. 양귀자의 장편인물소설《길모퉁이에서 만난 사람》에도 "얼굴이 왕년의 인기 배우 남궁원씨를 빼다 박았다"고 되어 있다.
 
① 섬돌 밑에서 찌르레기가 찌르륵찌르륵 울었다.
② 송씨는 틈만 나면 숫돌질을 한다.
③ 노인은 물조리개를 기울여 한 방울까지 떨어내려 한다.
④ 정례 이모는 박 주사집 아기업개로 들어갔다.
 
①은 공선옥의 장편소설《수수밭으로 오세요》에서, ②는 천운영의 단편소설 <숨>에서, ③은 함정임의 단편소설 <가난한 마음>에서, ④는 김원일의 중편소설 <나는 두려워요>에서 각각 따온 대목들이다.
①의 '찌르레기'는 '귀뚜라미'를 잘못 쓴 듯하다. 가을밤 섬돌 밑에서 '찌르륵'대는 것은 귀뚜라미가 분명하다. '찌르레기'는 어른 손으로 한 뼘 정도는 되는 큰 '새'다. 그렇게 '큰새'가(그것도 한밤중에) '섬돌 밑'까지 날아와 울 리가 없다.
 
②의 '숫돌질'은 어처구니없는 조어(造語)다. 한마디로 '숫돌질'이란 말은 없다. '숫돌에 칼을 문지르는 짓'이라 하여 '숫돌질'이 된다면 이발소에서 가죽띠에 면도칼을 문질러 날을 세우는 짓은 '가죽질'이 되어야 한다. 그냥 '칼을 간다' 또는 '칼갈이를 한다'면 되는 것을.
 
③의 '물조리개'는 도대체 무엇인지 모르겠다. 앞뒤 문맥으로 보면 '물뿌리개'가 틀림없다. 혹 '물뿌리개'와 '조로(jarro)'가 뒤섞여 빚어낸 착각 아닌가 모르겠다.
 
④의 '아기업개'는 '업저지'의 잘못이다. '남의 집 어린아이를 업어주며 돌보는 여자아이'가 그 뜻이다. '애기업개'라는 말이 있기는 하나 우리의 표준말은 아니고 북한에서 쓰는 말이다. 뜻 또한 '업저지'와는 달리 '아이를 업는 데 쓰는 포대기나 띠 따위의 물건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박완서의 장편소설《아주 오랜된 농담》에는 "길게 괴성을 질러 옆의 사람을 놀래키는 일이 잦았다"고 되어 있고, 김인숙의 단편소설 <풍경(風磬)>에는 "산은 그녀를 놀랬겼었다"고 나온다. 흔히 '남을 놀라게 하다'를 '놀래키다'로 알고 있다. 그러나 '놀라다'의 사역형은 '놀래키다'가 아니라 '놀래다'이다. 따라서 앞의 두 경우는 각각 "놀래는 일이 잦았다"와 "그녀를 놀랬었다"가 되어야 한다.
 
안도현은 그의 시 <바닷가 우체국>에서 "눈을 비비거나 귓밥을 팠다"고 노래했고, 신경림은 <갈구렁달>이라는 시에서 '뿌리 뽑힌 삶'을 처절하게 노래했다.
 
'귓밥'은 '귓불'과 같은 말이다. '귓바퀴의 아래쪽에 붙어 있는 살'이 '귓불'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팠다'고 했으니까 '귓불'이 아니라 '귀지'를 이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귓구멍 속에 낀 때'인 '귀지'를 일부 지방에서 더러 '귓밥'으로 쓰고 있다. '귀에지' 역시 '귀지'의 잘못이다.
 
'갈구렁'은 '갈고리' 또는 '갈고랑이'의 방언이다. 따라서 '갈구렁달'은 '초승달이나 그믐달 따위와 같이 갈고리 모양으로 몹시 이지러진 달'인 '갈고리달'의 방언이다.
 
윤대녕의 단편소설 <배암에 물린 자국>(제목에서부터 비표준어가 등장하고 있다)에는 "(날씨가)꺼끔하다"는 표현과 "데면하게 얘기를 주고 받는다"라는 얘기가 나온다. 우선 '꺼끔하다'는 어느 지역 방언인지 모르겠다. '날씨가 흐리다'의 뜻으로 쓰이는 '꾸무럭하다'도 방언인데 이와도 그리 가까워 보이지 않는다. '날씨가 활짝 개지 않고 자꾸 흐려지다'는 '끄물끄물하다'이다. '날이 흐리고 어둠침침하다'인 '끄무레하다'도 있다. 다음, '데면하다'는 '데면데면하다'의 잘못이다. '푸릇푸릇하다'를 '푸릇하다'로 써도 크게 다르지 않는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 '데면데면'이 아니고 그냥 '데면'이면 아예 말이 되질 않는다.
 
이혜경의 단편소설 <일식>에는 "선풍기의 안전망에 더껑이진 때" 이야기가 나온다. '더껑이'는 '몹시 찌든 물건에 앉은 거친 때'의 뜻인 '더께'의 잘못이다. '더껑이'는 '걸쭉한 액체의 거죽에 엉겨 굳거나 말라서 생긴 꺼풀'이므로 '선풍기 안전망'에 낀 때와는 거리가 멀다
 
이밖에도, '살다 가기를 바랬다'→바랐다(배수아의 장편소설 ≪붉은 손 클럽≫), '쥐 오줌이 지린 천장'→지려진 천장, 쥐가 오줌을 지린 천장(권지예의 단편소설 <내 가슴속에 찍힌 새의 발자국>), '콧날개'→콧방울(최수철의 단편소설 <소리에 대한 몽상>), '입초시'→입길(윤후명의 단편소설 <별들의 냄새>), '약지손가락'→약지, 약손, 약손가락(윤성희의 단편소설 <이 방에 살던 여자는 누구였을까>), '묘지지기'→묘지기(김명수의 시 <묘지 옆으로 나는 길>), '손살피'→손샅(김훈의 장편소설 ≪칼의 노래≫)등등 며칠을 주워섬겨도 끝이 없을 정도다.
 
출처 : 국립국어원 새국어생활 2002년 겨울 - 권오운 / 시인《우리말 지르잡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