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창제의 부당함 주장한 '발칙한' 상소문
세종은 기자(箕子)와 단군의 위패를 분리해 모셨다. 그것은 세종 스스로도 명 황제의 제후가 아니라 독립 군주임을 간접적으로 보여준 것이었다. 그러한 상징적 개혁에서 나아가 세종은 독립적 문화도구인 문자를 만들어냈다. 그것은 수천 년을 이어온 한자 문명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다. 여러 가지 구구한 설명이 있지만, 한글을 창제한 단적인 이유는 쉬운 글을 만들어 누구나 쓰게 하자는 것이었다.
그 '불순하고 불경스러운' 동기에 조선의 사대주의자들은 깜짝 놀랐다. 천한 백성들도 쉽게 배울 문자를 만들다니, 참 불쾌한 일이었다. 사대부 집단 내부가 술렁거렸다. 집현전부제학 최만리와 정창손, 김문 등 사대부들은 한글 창제의 부당함을 역설했다. 그러면서 '독립 문자' 창제에 대한 우려를 여섯 가지 조목으로 정리해 장문의 상소를 올렸다. 그 내용은 대략 이렇다.
첫째는 중국과 전통적인 사대교린관계에 금이 가는 것이 두렵다고 했다. 조선은 예로부터 정성껏 대국(大國)을 섬기며 중화(中華) 제도를 따라 왔는데, 새로 만든 글자의 음을 쓰고 글자를 합하는 방식이 모두 옛 것에 반대되니, 중국 쪽에서 비난 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상소의 두 번째 조목은, 한글 창제가 문명에 흠집을 낸다는 것이었다. 예로부터 변방 국가에서 따로 문자를 만든 적이 없었다. 몽골·서하·여진·일본 등에 각기 그들의 글자가 있지만, 이는 모두 오랑캐들이므로 언급할 필요도 없다고 했다. 또 지금 언문(한글)을 만드는 것은 문명을 버리고 스스로 오랑캐와 같아지는 것이라고 했다.
▲ 훈민정음 해례본. /조선일보 DB
한편, 네 번째 조목 또한 임금의 한글창제 논리에 대한 반론이었다. 세종은 한글창제의 필요성을 언급하며 언문을 널리 익히면 형벌이나 옥사에 관하여 백성이 쉽게 알아듣고 글자 착오로 인한 억울한 일이 사라질 것이라고 말한 바 있었다. 이에 대하여 사대부들은, 예로부터 중국은 말과 글이 같아도 형옥과 송사에 억울한 일이 심히 많았고, 백성이 억울한 옥살이를 당한 것은 글자를 몰라서가 아니라 매를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언문을 쓰는 것만으로 형옥(刑獄)의 공평함을 이룰 수는 없다는 논리였다.
다섯 번째는 세종의 국정운영 스타일에 대한 비판이었다. 세종은 일을 빨리 이루기 위해 너무 서두르는데 그것은 바른 정치가 아니라는 것이다. 또 굳이 언문을 만들어야 한다면 백관과 논의하여 깊이 생각하고, 중국에 고하여 부끄러움이 없어야 하는데, 그런 절차도 없이 갑자기 젊은 학자 10여 명으로 팀을 짜서 옛 운서(韻書)를 뜯어 고치고 각본(刻本)을 하여 반포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었다. 마치 아랫사람을 가르치듯 묘한 느낌이 드는 내용이었다.
마지막 여섯 번째 조목은 세자(문종)의 거취에 관한 비판이었다. 당시 세종은 세자를 국정에 참여시키고, 자신은 주로 한글 연구에 몰두하고 있었는데, 그것이 적절치 않다고 것이었다.
이와 같은 여섯 가지 조목의 상소를 훑어본 세종은 적잖이 마음이 상했다. 실제로 최만리 등의 상소는 신하로서 목숨을 내걸지 않고서는 주장하기 어려운 내용이었다. 단적으로 사대의 논리가 임금의 권위보다도 위에 있다고 본 것이며, 따라서 목숨을 걸고서라도 그 통치원리를 지키려 한것이다. 이토록 발칙한 상소에 대해 세종은 어떻게 대응했을까. 다음 장면이 사뭇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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